그녀를 또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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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또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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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또 놓쳤다.
2023.03.01.
런던 히드로 공항.
지호가 게이트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그를 마주한 승무원의 입에서 작게 감탄이 흘렀다.
시선을 사로잡는 수려한 얼굴과 압도적인 키.
날렵한 턱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검정 터틀넥 스웨터 위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브라운 컬러의 캐시미어코트는 그가 걸을 때마다 런웨이가 떠오를 만큼 멋스러웠다.
무엇보다 귀티가 흐르는 우아한 자태는 일등석과 한 치의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네.”
담당 승무원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겨울방학 동안 런던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좌석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은 지호는 곧 시작될 길고 지루한 비행을 생각하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줄곧 나른한 표정이던 그의 시선 끝에 이제 막 기내로 들어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일등석에서 마주친 또래라서 그런지 옅은 호기심이 번진 그의 눈동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또렷한 이목구비. 눈처럼 하얗고 긴 목선이 드러나는 단발머리.
여자는 도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눈빛이었다.
터벅터벅.
안으로 걸어온 여자는 지호를 무심하게 지나쳐 통로를 사이에 둔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의 수려한 얼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
잠시 뒤 핸드폰을 귀에 댄 여자의 입 밖으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걱정하지 마. ……도착하면 전화할게. ……엄마도 잘 지내.”
이륙 전 아직 조용한 기내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짧은 통화가 끝나고 잠시 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흐흐흑. 흑. 흑.”
감정이 격해지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도 점점 커졌다.
지호는 낯선 여자의 울음소리에 얼굴을 옅게 찡그렸다.
기내의 불이 모두 꺼진 시간.
지호는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프 바로 가기 위해 통로로 나온 그는 옆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여자를 흘깃 보았다.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여자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호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얼굴을 파묻은 담요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까 그렇게 울어놓고 또 우는 건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보던 지호는 느리게 돌아섰다.
**
서서히 고도를 낮추던 비행기가 굉음과 함께 강렬한 진동을 일으키며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몸을 크게 휘청거린 여자의 가방이 떨어지며 바닥에 물건들이 쏟아졌다.
탁.
여자는 어지러운지 조금 비틀거리며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지호는 자기 발 옆에 떨어진 지갑과 여권을 주워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아. 네.”
짧은 순간 고개를 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빨갛게 부은 눈.
새하얀 얼굴이 눈물의 흔적으로 울긋불긋했다.
가까운 거리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밤새 울었던 모양이네.
냉큼 고개를 내린 여자는 서둘러 기내를 빠져나갔다.
잠시 뒤 지호는 느긋하게 짐을 챙기며 일어났다.
그때 한 걸음 내디딘 신발 밑으로 얇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발을 들자 눈에 익숙한 디자인의 카드 한 장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국대 의예과 정이수]라고 새겨진 글자 옆으로 선명한 사진이 박힌 학생증.
“……같은 학교였네.”
지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간 지 얼마 안 됐으니 만날 수 있겠지.
학생증을 주운 지호는 그때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서두른 덕분에 짐이 나오기 전에 배기지 클레임에 도착했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떨어뜨린 가방 하나 들고 런던까지 갔다 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지호의 손엔 결국 돌려주지 못한 학생증이 그대로 있었다.
평소의 지호라면 주저 없이 공항 분실물센터에 맡겼겠지만, 빨갛게 부어 있던 그녀의 눈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좀 번거롭겠지만 어차피 곧 개강이었고, 이름과 전공을 아는 이상 돌려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지호는 지갑 안으로 학생증을 밀어 넣었다.
**
개강 첫날.
3월의 캠퍼스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고, 이른 아침인데도 학생들의 표정엔 봄기운 같은 생기가 가득했다.
경영대로 가던 지호는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을 흘깃 올려보았다.
건물 위쪽으로 [한국대학교병원] 이라고 큼직하게 새겨진 글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의과대학는 캠퍼스 오른쪽에 십여 개의 병원 건물들과 함께 있었다.
여기저기 흰 가운 입은 사람들이 건물 주변을 바쁘게 오가고 있어서인지 학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지호는 언제나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 길을 눈에 담으며 느리게 걸었다.
우연히 정이수를 마주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학생증 사진과 눈물로 얼룩졌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운 좋게 만난다면 일부러 찾아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지호는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엔 어떤 얼굴일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지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위로 떠오른 하준의 이름을 확인한 지호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하준아!”
지호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지호야. 나…….]
하준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침 전화 잘했다.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너 의대에 아는 애들 많다고 했지?”
모임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하준은 발이 상당히 넓은 친구였다.
“너 혹시 의예과 정이수라고 알아?”
[어? 정이수? 알지. 걔 나랑 같은 스키 동아린데. 걘 갑자기 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하준이었다.
지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됐다.”
[갑자기 뭐가?]
“너 지금 어디야?”
[야, 나 어제 갑자기 맹장 터져서 지금 병원이야. 주말쯤 퇴원할 것 같아.]
“……뭐?”
하준이 아침부터 전화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지호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수술은 잘됐지?”
[그럼. 흔한 수술인데 뭐.]
“그래도……. 고생했겠네.”
[응. 근데, 이수는 왜?]
“너한테 부탁할까 했는데,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회복 잘하고 푹 쉬어라. 퇴원하고 보자.”
통화를 끝낸 지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스키 동아리라.
따로 떨어져 있는 의대보다 경영대에서 가까운 학생회관이 낫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지호야, 여기 서서 뭐 해? 오늘 1교시잖아.”
같은 수업을 듣는 준우가 가던 길에 지호를 발견하고 부른 거였다.
“어. 가야지.”
“지금 9시 거의 다 됐어.”
“벌써?”
너무 여유 부렸나.
지호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7분.
빨리 가야 지각을 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빨리 가자! 이러다 첫날부터 지각이야.”
준우의 재촉에 지호가 움직였다.
일부러 찾아가는 수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금요일 오후.
지호는 필수교양과목인 [영화의 이해] 첫 수업을 듣기 위해 진리관으로 들어갔다.
학점 받기 좋은 수업으로 소문 난 만큼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은 학생들로 빼곡했다.
잠잠했던 강의실이 지호의 등장으로 갑자기 술렁였다.
“어머! 어머! 서지호도 이 수업 듣나 봐!”
“후광이 비친다는 게 저런 거구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아우라 장난 아니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여학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그를 향해 집중했다.
“와……. 쟤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거 봐. 저게 다 얼마야.”
학생 용돈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가격대의 옷과 가방 그리고 신발까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그의 스타일을 두고 감탄이 이어졌다.
“서지호가 입으면 만 원짜리 티셔츠도 명품처럼 보일 것 같지 않니? 굳이 저런 데 돈 안 써도 될 텐데…….”
“쟨 돈이 넘쳐날 텐데 무슨 걱정이야. 쟤한테는 저런 게 우리가 만 원짜리 사 입는 거랑 비슷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몰랐어? 서지호 할아버지가 SN 금융 창업주잖아.”
“진짜?”
처음 듣는 얘기에 여자의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SN 금융은 금융권 취업 선호도 조사에서 매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할 만큼 대학생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 중 하나였다.
“나도 그 소문 듣고 검색해 봤는데, 어릴 때부터 증여받은 주식이 어마어마해. 기사에 쟤 이름까지 나오더라.”
옆에 있던 친구도 아는 체하며 말을 보탰다.
“암튼 난 이 수업, 시작도 전에 너무 맘에 든다. 하하.”
여기저기서 설레는 눈동자들이 지호를 훑어내리며 그에 대한 소문과 저마다의 감상을 곁들였다.
지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덤덤히 받아내며 자리에 앉았다.
웅성거림은 교수님이 등장하고 나서야 조용히 사라졌다.
“오늘은 영화 용어에 대한 이론 강의와 감상문으로 제출할 영화 한 편을 보고 끝내겠습니다.”
짤막한 소개 끝에 시작된 수업.
교재 없이 필기에만 의존하는 강의라 집중하는 학생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한 시간 뒤 조명이 꺼진 강의실 스크린 위로 오래된 영화가 시작되었다.
어린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무심코 고개를 돌린 지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스크린에 반사된 흐릿한 빛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는 여자의 얼굴.
반원 형태의 강의실 맞은편에 정이수가 정지화면처럼 앉아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한눈에 여자를 알아본 지호는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같은 수업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이었다.
바로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스크린 대신 여자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 있던 여자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고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스피커를 뚫고 나온 처연하고 쓸쓸한 첼로 선율이 마치 여자를 위한 배경음악 같았다.
고개를 내린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위로 그날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오늘은 또 왜…….
잔잔한 영화 후반부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안쓰러운 고갯짓 사이에서 우는 사람은 정이수 하나였다.
우는 여자를 질색했던 지호는 처음으로 여자의 눈물이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빠져나온 그의 시선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정이수의 얼굴에 머물렀다.
아직 돌려주지 못한 학생증은 여전히 그의 지갑 안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지호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지만, 출입구 쪽에 앉아 있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강의실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실소했다.
그녀를 또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