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억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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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억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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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억 안 나요?
2023.03.04.
-지금 비행기 탈 거야. 도착하면 전화할게.
이수는 탑승구로 걸어가며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런던에 있는 엄마와 서울에 있는 아빠.
한때 부부였던 두 사람은 오래전 남이 되었고 이수는 서울에서 아빠와 살며 방학 때마다 런던에 가서 엄마를 만났다.
아빠는 상처받은 딸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이수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수가 런던에 갈 때마다 기꺼이 일등석 비행기표를 끊어주는 아빠였다.
-그래. 시간 맞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딸 빨리 보고 싶다.
지금 서울은 새벽일 텐데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장이 왔다.
이수는 아빠의 다정한 문자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가 엄마 생각에 다시 울컥했다.
원망과 서러움은 이미 한계치였고 온몸으로 차오른 눈물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질 것 같았다.
공항으로 오기 전 엄마는 할 얘기가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수야. 엄마가 서울 가서 사는 건 힘들 것 같아.”
“…….”
“음……. 엄마가 여기서 좋은 사람을 만났어. 너도 이제 엄마가 꼭 필요한 나이도 아니고.”
필요할 때 옆에 없었으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이 이수의 입안을 맴돌다 삼켜졌다.
“미안해. 너도 어른이니까……. 엄마 이해하지?”
두 사람이 이혼할 때도 아빠가 재혼할 때도 자기들 멋대로 해놓고 이수에게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5년 동안 엄마와 함께 살 거라는 희망으로 기다렸는데.
엄마는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그 긴 기다림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
이수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입국장으로 걸어갔다.
밤새 울었더니 눈물뿐만 아니라 온몸의 기운까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너무 어지러워 휘청거리다가 가방까지 쏟았다.
그때 떨어진 물건을 같이 주워줬던 남자가 있었는데.
“고맙단 인사도 못 했네.”
부은 눈이 민망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커다란 손을 내밀었을 때 코끝을 스쳤던 향기는 몽롱한 정신을 깨울 만큼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향수인지 묻고 싶을 만큼.
“이수야, 여기!”
입국장에서 기다리던 정원진은 보름 만에 온 딸을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달려왔다.
“안 나와도 된다니까.”
이수는 아직 부어 있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들킬 걸 알면서도.
“이수야, 너 눈…….”
아니나 다를까 정원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는 빨갛게 부은 이수의 눈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울었어?”
“아빠 빨리 가자. 나 너무 피곤해.”
이수는 대답 대신 아빠를 재촉했다.
피곤한 건 정말 사실이기도 했고.
“엄마 보러 그 멀리까지 갔는데, 왜 운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정원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유를 알 때까지 물을 걸 알기에 이수는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엄마가 서울에 못 온대. 아빠도 기억하지? 엄마가 나 대학 가면 서울 와서 같이 살기로 했던 거.”
“아…….”
정원진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오랜 별거 끝에 결국 이혼했다.
성격 차이로 시작된 불협화음은 끝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들 걱정에 잠 못 잔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재혼을 서둘렀다.
참한 여자라며 어머니가 소개해 준 여자였다.
정원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이수에게 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런던에 계속 있을 거래. 그래서…….”
엄마를 떠올리자 이수의 눈자위가 다시 뜨거워졌다.
이혼 후 처음 몇 년간 이수는 엄마와 함께 살았다.
런던에 있는 외할머니의 병세가 나빠지면서 엄마는 런던으로 갔고, 이수는 그 뒤로 아빠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아빠뿐만 아니라 새엄마와 새엄마가 데려온 딸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있었다.
이수가 그 틈으로 끼어들었다.
적어도 이수의 느낌은 그랬다.
**
집에 오자 새엄마가 현관까지 나와서 반겼다.
그녀는 아빠 앞에서는 늘 천사처럼 이수를 대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는 그녀는 아빠를 만나서 자기 꿈을 이뤘다면서 아빠에게 입안의 혀처럼 구는 여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에겐 좋은 아내였다.
“이수야, 어서 와. 오느라 많이 피곤했지?”
“네.”
“엄마가 너 온다고 맛있는 거 많이 준비했어. 얼른 씻고 나와서 저녁 먹자.”
“네.”
아빠가 옆에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모습이었다.
이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엄마, 아빠가 공항까지 가서 쟤 데려온 거야? 병원 진료까지 미루고?”
주방으로 들어 온 유미는 뭐가 불만인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게 뭐. 하루 이틀 그랬던 일도 아니고. 이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인데 진료가 문제니.”
“쟨 아빠한테 고마운 줄도 모르잖아.”
유미가 계속 툴툴거리며 말했다.
“쉿! 너 이수한테 자꾸 쟤라고 할래? 아빠 있을 땐 조심하라고 했지! 언니라고 제대로 호칭 붙여.”
최수민은 행여 남편이 들었을까 봐 놀란 눈으로 주방 밖을 살피며 유미를 나무랐다.
“개월 수로 따지면 쟤랑 나랑 5개월밖에 차이 안 나는데 꼭 언니라고 불러야 해? 진짜 짜증 나!”
유미가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너 아빠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래. 이수 오랜만에 왔는데 나와서 인사라도 좀 하지! 아빠 있을 땐 이수한테 잘하라고 했잖아.”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 친아빠 대신 유미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른 사람이 정원진이었다.
유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가 생겨서 행복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이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5년 전 이수가 이 집에 온 뒤로 깨달았다.
아무 노력 없이, 아빠의 절대적인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수뿐이라는 걸.
“아! 몰라!”
유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주방에서 홱 나갔다.
지친 기색으로 방에 들어온 이수는 그냥 자고 싶었다.
이수는 스툴 위에 다리를 올리고 1인용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정신이 몽롱해지며 잠이 들려는 찰나.
쾅. 쾅.
거친 노크 두 번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미가 들어왔다.
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오란 말 안 했는데.”
“노크했잖아. 못 들었어?”
유미는 잘 다녀왔냐는 인사 한마디 없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이수는 유미를 앞으로 계속 볼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생증 좀 줘 봐.”
유미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말했다.
“왜?”
“내일 증명사진 찍으러 갈 건데, 미리 좀 보게.”
유미는 올해 한국대 무용학과에 합격했다.
죽어도 한국대에 가겠다는 유미의 강력한 의지와 더불어 새엄마의 열성과 아빠의 경제력이 이뤄낸 성과였다.
아빠와 같은 의대에 한 번에 합격한 이수에게 늘 열등감을 느끼던 유미는 그 뒤로 아주 기세등등해졌다.
이수는 유미를 빨리 내보낼 생각으로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던져둔 가방을 가져와 손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가방 안주머니에 넣어놨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학생증이 어디 갔지.”
**
수업이 끝나고 지호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영화를 본 건지, 정이수를 본 건지.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다.
정이수가 고요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던 모습. 눈물을 흘리던 모습.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던 모습.
기다리면 다음 주 수업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지호는 왠지 그 일주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대각선 너머에 학생회관이 보였다.
동아리 방이 몇 층이라고 했더라.
**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스키부 신입 부원 모집]이라는 포스터가 붙은 벽이 보였다.
그 옆으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지호는 문 앞에서 서서 생각보다 좁은 동아리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무리 지어진 사람들 틈에 정이수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기다릴까.
“어머! 동아리 가입하러 오신 거예요?”
지호가 멈칫하는 사이 환하게 웃는 여자가 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여기 앉으세요.”
여자가 가리키는 자리에 지호가 앉자 그 앞으로 재빠르게 가입 신청서가 떡하니 올려졌다.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한테 다 이런 식인가.
피식 웃음이 나려는 걸 참고 지호가 입을 열었다.
“가입하러 온 건 아니고. 정이수. 만나러 온 겁니다.”
“아……. 이수요…….”
여자가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늘였다.
“네.”
“그럼 이수 기다리는 동안 동아리 소개 좀 해드릴게요. 그냥 기다리면 지루하니까. 하하.”
다시 목소리를 높인 여자가 적극적으로 말했다.
여자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다른 부원들의 소리 없는 응원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서지호가 가입했다는 소문만 나면 그날로 동아리 홍보는 끝난 셈이니까.
모두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네.”
“저희 동아리는 비시즌에도 행사들이 많이 있어요. 봄, 여름, 가을에 MT 가고. 금요일마다 동아리 방에서…….”
지호는 여자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손가락 끝으로 가입 신청서를 툭툭 건드리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생각하는데.
열린 문 너머에서 웃음 섞인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수야, 너 가방 안에 벽돌 넣고 다니는 건 아니지. 뭐가 이렇게 무거워?”
“큭큭. 오늘 반납할 책이 좀 많아서 그래.”
“그럼 도서관도 같이 가자. 내가 가방 들어줄게.”
“됐어. 괜찮아. 여기까지 들어준 것만 해도 고마워.”
“나도 도서관 갈 일 있어서 그래.”
문을 넘어선 대화 소리에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양손에 커피를 든 정이수와 양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는 강동우가 나란히 들어왔다.
친하진 않았지만 같은 경영학과라서 아는 얼굴이었다.
강동우는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이수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지호는 이수를 바라보았다. 진한 눈빛이 이수를 향했다.
“이수야, 너 만나러 왔대.”
“어?”
이수는 여자의 귀띔에 고개를 휙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저를 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동우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서지호, 네가 이수한테 무슨 일이야?”
동우가 이수 대신 나서서 지호에게 물었다.
힘이 들어간 두 눈에 딱딱한 말투까지 더해졌다.
“볼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어이없는 참견에 지호의 대답이 삐딱하게 나왔다.
지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정이수를 만났으니 학생증만 돌려주고 나가면 된다.
그게 여기 온 원래의 목적이니까.
그런데.
“너 설마 동아리 가입하려는 건 아니지?”
동우는 지호 앞에 놓인 가입 신청서를 보면서 다시 물었다.
문장의 형태는 의문문이었지만,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래선 안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지호는 이마를 옅게 찡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잠시 내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게 뭐라고.
“못 할 것도 없지 뭐.”
충동적으로 펜을 잡은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글자를 적어나갔다.
원래의 지호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빈칸을 다 채운 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 앞으로 갔다.
지호는 지갑에서 꺼낸 학생증을 이수에게 내밀었다.
“어! 이걸 어떻게…….”
얼떨결에 학생증을 받아든 이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 기억 안 나요?”
“…….”
잠깐이었지만 눈도 마주쳤는데 지호를 전혀 몰라보는 표정이었다.
평생 잘생겼다는 말을 질리도록 듣고 살았는데 그날은 좀 별로였나.
“다음에 또 봐요. 그땐 꼭 기억하고.”
지호는 이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