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카샤의 뱀 (2)
연우는 동북쪽으로 이동하는 내내 보이는 오크들을 잡으면서 갈리어드가 있는 곳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오크들이 말하는 ‘바오트리’란 험준한 돌산을 의미했다.
주변에 보이는 게 온통 돌산 지대인 곳에서 한 지점을 특정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오크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정찰대가 자꾸 죽어 나가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 열댓 명 이상씩 같이 돌아다니거나, 자체적으로 연우를 수색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다행히 그때쯤에는 갈리어드가 머물고 있는 모옥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여긴가?”
연우는 어느 돌산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고 뾰족하게 선 돌산.
얼마나 높은지 주변의 다른 돌산들이 야트막하거나 낮게 보일 정도였으니.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안력(眼力)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카메라를 줌 인(Zoom in)한 것처럼 돌산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짝 깎여 나간 절벽에 두터운 나무 기둥 몇 개로 겨우 받치고 있는 작은 모옥.
저대로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연우는 가볍게 쾌재를 외쳤다.
일기장 속에서 봤던 갈리어드의 집과 똑같았으니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갈리어드는 매 회차 때마다 머무는 집의 위치를 옮기곤 했다.
때문에 매번 찾아갈 때마다 인근을 샅샅이 뒤져야 하는 게 얼마나 귀찮던지.
동생도 갈리어드가 왜 집을 계속 옮기고 다니는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튜토리얼에서 아카샤의 뱀만 쫓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기만 할 뿐.
‘일단 가 볼까?’
연우는 가볍게 지면을 박차면서 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전 장비 하나 없이 단순히 클라이밍으로 오르기에는 너무 가파르고 험준한 높이었지만.
튜토리얼을 통과하는 내내 꾸준히 스탯과 스킬을 올린 연우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강화된 시각으로 발을 디딜 장소만 정확하게 짚어 내고, 강해진 각력으로 차올리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연우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올라 어느덧 모옥 앞에 마련된 작은 마당에 착지했다.
그리고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실례합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감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모옥 내부를 가볍게 훑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도 없나?”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
실제로 갈리어드는 집에 잘 있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성격이기도 했다.
결국 연우는 마당에 마련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갈리어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뭐냐, 너는?”
갈리어드가 돌아온 건, 노을이 짙게 깔렸을 무렵이었다.
연우는 기다리기 따분해 명상을 취하면서 몸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던 중이었다.
곧바로 눈을 뜨면서 인사했다.
“카인이라고 합니다.”
“카인이고 뭐고 간에. 넌 뭐기에 남의 집 앞에서 알짱대고 있는 거지?”
갈리어드는 영 수상쩍어 하는 얼굴로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갈리어드가 신기하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종족이라. 정말로 있을 줄은.’
190센티미터쯤 되는 장신. 탄탄하지만 날렵한 체구. 갈색 피부. 나이를 짐작키 힘든 뚜렷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얼굴.
그리고, 길쭉하고 뾰족한 귀.
갈리어드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인종, 혹은 이종족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엘프. 그중에서도 타고난 전사로 분류된다는 다크 엘프였다.
“동료로부터 소개를 받아 찾아왔습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만. 당신이 갈리어드, 맞습니까?”
갈리어드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갓 잡아 온 짐승을 바닥에다 던지고, 어깨에 걸었던 활을 아래로 내렸다.
여차하면 바로 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다크 엘프는 흔히 엘프 내에서도 별종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엘프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아끼는 데에 반해, 다크 엘프는 잔혹하면서도 때로는 냉혹한 사냥꾼에 가까웠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스스럼없이 동료를 버리고 공동체의 이익을 구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 때문일까?
갈리어드도 처음에는 의심이 많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운디네의 잔’을 구하고 싶습니다만.”
갈리어드는 살짝 눈살을 구겼다.
“그 말, 누구한테 들었지?”
“브라함에게서.”
“그 빌어먹을 새끼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니까, 또?”
브라함은 갈리어드의 오랜 친구의 이름이었다. 원래는 그와 같이 탑을 공략하려 했던 인물.
‘그리고 정우의 두 번째 스승이기도 했지.’
연우는 브라함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갈리어드와도 필요한 물건만 구매하고 나면 모른 척할 생각이었으니까.
‘정우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굳이 가까이 할 필요가 있을까?’
갈리어드는 동생이 겪은 배신과는 거리가 떨어진 인물이었다. 탑에는 입성한 적도 없고, 개입할 의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의 정체를 드러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피차간에 서로 머리만 아파질 뿐이겠지.
연우는 그저 동생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어쩔 수 없군.”
갈리어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활을 어깨에 걸고, 떨어뜨렸던 짐승을 다시 들었다.
“들어와라.”
연우는 갈리어드를 따라 모옥 안쪽으로 들어갔다.
모옥 내부는 일반적인 사냥꾼들이 머무는 곳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벽을 따라 온갖 짐승의 머리가 박제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갖가지 사냥 무기가 걸려 있었다. 탁상에는 무두질을 하다 만 피혁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적당한 곳에 앉아. 이거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갈리어드는 의자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고, 탁상 위에 얹어진 피혁을 옆으로 치워 짐승을 그 위에다 얹었다.
짐승은 노루를 닮았지만 지구에서 보던 것들과는 생김새가 많이 달랐다.
두 배만한 덩치에 다리에 근육이 가득했다. 뿔은 산양의 것처럼 두세 개가 얽혀 단단해 보였다.
갈리어드는 빠른 속도로 짐승을 해체시켰다. 피를 빼고, 살을 발라내고, 내장을 드러냈다.
연우는 기가 막힌 솜씨에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이런데 관심이라도 있나?”
갈리어드가 슬쩍 연우를 봤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비슷한 처지였었군.”
갈리어드는 연우가 가져온 백팩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안쪽으로 도축한 재료들이 몇 가지 보였다.
연우는 갈리어드의 웃음을 보면서 경계심이 많이 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모든 해체가 끝난 뒤.
갈리어드는 피가 묻은 칼을 세게 내려놓으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좋아. 그럼 거래 이야기를 해 보지. 운디네의 잔을 구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운디네의 잔.
아카샤의 뱀을 지상으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회성 아티팩트였다.
‘정확하게는 아카샤의 뱀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에 가깝지만.’
아카샤의 뱀이 딱 한 번 정해진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그만한 덩치가 포만감을 느끼려면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
양이 많거나.
아니면.
‘영양분이 그만큼 많거나.’
아카샤의 뱀에서 말하는 ‘아카샤(Akasha)’란, 영적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물질을 의미했다.
다른 말로는 에테르, 혹은 영자(靈子)라고도 불리는 물질.
아카샤의 뱀은 이런 아카샤를 영양분으로 삼는다.
대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지력을 대량으로 흡수하고, 몬스터 부락을 덮쳐 녀석들의 생명력을 갈취한다.
때문에 아카샤의 뱀이 머무는 지역은 풀 한 포기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하기 일쑤였다.
E구획의 동쪽 지대가 온통 메마른 황무지와 돌산으로 가득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가 동쪽 지대의 마지막 남은 정기(아카샤)가 사라질 시기였다.
아카샤의 뱀이 가장 허기와 갈증으로 고생하는 시기인 것이다.
운디네의 잔은 바로 이럴 때에 아카샤의 뱀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미끼였다.
운디네의 잔은 아카샤를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는 아티팩트. 당연히 아카샤의 뱀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큰 문제점은.
‘운디네의 잔을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갈리어드만 알고 있다는 점이지.’
때문에 다른 이유로 운디네의 잔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브라함의 소개를 받아 암암리에 튜토리얼을 찾는 경우가 있었다.
갈리어드가 귀찮아서 숨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걸 구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대가가 아닌 조건.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충은.”
“좋아. 그럼 지체하지 말고 시작하지.”
그 순간.
[다크 엘프, 갈리어드가 당신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이 시험을 받을 시에만 원하는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갈리어드의 집요한 시선이 연우가 쓴 가면을 꿰뚫었다.
‘이거구나. 갈리어드의 시험이.’
갈리어드가 운디네의 잔을 내주는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내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
따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았다.
오로지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만 운디네의 잔을 보상으로 건넬 뿐이었다.
역시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아카샤의 뱀만 쫓는 것처럼,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것 외에는.
그리고 그런 행동을 선보인 사람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수십 년째 같은 시험만 똑같이 되풀이되는 중이었다.
너무나 ‘괴짜’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행동이기도 했다.
탑의 시스템이 그의 시험을 히든 퀘스트로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메시지가 사라지고,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 갈리어드의 시험]
내용: 다크 엘프, 갈리어드는 오랫동안 ‘자격’을 가진 자를 찾고자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시험을 내렸습니다.
그는 바람의 축복을 받을 정도로 발이 날랜 자. 그와 숨바꼭질을 하십시오. 술래가 되어 10번 중 5번 이상 그를 잡아야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보상: 성공 횟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3번 이상: 운디네의 잔
-5번 이상: 운디네의 잔 + ???
연우는 크게 눈을 반짝였다.
‘역시 절반 이상을 성공해야만 하는 거군.’
숨바꼭질.
갈리어드는 반드시 자신을 잡을 것을 지시한다.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함정을 파도 좋고, 아티팩트를 써도 된다. 동료와 같이 움직여도 좋다.
하지만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시험자가 갈리어드를 ‘터치’ 해야만 이기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절반 이상을 성공한 사람은 여태 수십 년 동안 다섯 명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전부 성공할 수 있다면. 갈리어드가 가진 기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연우는 퀘스트창에 물음표로 숨겨진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갈리어드에게서는 스킬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순보(瞬步).
다크 엘프 내에서도 대대로 전승자에게만 전해지는 특이 스킬.
‘순보는 몸을 최대한 날래게 하고, 기척을 차단시키는 효과가 있어. 내게는 아주 적합한 스킬이야.’
감각을 이용한 은밀한 움직임과 날카로운 공격을 주무기로 삼는 연우에게 이보다 잘 어울릴 스킬은 없을 터였다.
연우가 계획에 순보를 포함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가 순보를 가장 탐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순보는 분명 단순히 보기에 넘버링에도 들지 못하는 그저 그런 스킬로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순보를 얻은 동료를 보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순보의 장점은 단순히 빠른 몸놀림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순보는, ‘축지(縮地)’로 연결 될 수 있는 열쇠였다.
랭킹 1위.
‘올포원’을 상징한다는 최고 스킬 중 하나를 열 수 있는 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