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5화 (35/862)

10화. 아카샤의 뱀 (3)

올포원.

그 작자는 정말이지 최악의 인간이었다.

* * *

올포원(All for One).

부동의 랭킹 1위이자 클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그에 대한 정체는 탑에서도 크게 알려져 있는 것이 없었다.

수십? 수백? 혹은 수천 년일지도 모르는 아주 기나긴 세월 동안 더 이상 탑의 공략을 하지 않고, 오로지 77층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부로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직접 목격한 플레이어조차 찾기 힘들었다.

9명의 최고위 랭커들, ‘아홉 왕’이나 멀리서 그를 본 게 전부일까.

그 정도로 올포원은 절대 타인과 같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혼자서 생각하며, 혼자서 판단한다.

그리고 혼자서 움직인다.

하지만 움직였을 때에는…… 언제나 탑에는 커다란 지각 변동이 생겨났다.

분명 혼자인데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힘은 거대 클랜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최강.

최고.

혹은 최후라고.

탑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죽거나 떠나더라도, 그만큼은 여전히 탑의 1위 랭커이자 클랜일 것이기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의 자리를 위협해 보고자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단념을 해야만 했으니.

다만, 그런 도전자들이 올포원을 연구한 성과가 누대에 걸쳐 계속 쌓였고, 덕분에 그의 스킬 중 일부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축지.’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올포원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타날 수 있었다. 층계 간의 이동도 티켓 없이 너무 자유로웠고.’

처음에는 올포원이 텔레포트나 블링크 같은 공간 전이 스킬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었다.

하지만 공간 전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과 긴 캐스팅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올포원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별다른 캐스팅 시간이나 마력 유동도 없이,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곳으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랭커와 클랜들이 이 스킬을 파훼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제아무리 튼튼한 방벽이나 결계를 설치해 놓더라도, 올포원은 안 쪽을 너무 쉽게 드나들었으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지 비밀리에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 알아낸 사실이 바로 축지를 갖고 있다는 것.

다만, 사람들은 다시 여기서 난관에 봉착해야만 했다.

축지 스킬을 분석하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경로를 모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포원만 갖고 있는 고유 스킬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정도로만 끝내야 했다.

하지만.

멀리서나마 올포원을 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절대 고유 스킬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갖고 있는 것들을 부단히도 쌓고 또 쌓아, 극한에 다다르고, 그마저도 최고의 업에 달성했을 때에 이룰 수 있는 모습이라는 걸.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튜토리얼을 시작할 때에 갈리어드가 보였던 순보. 아이작 녀석이 조르고 졸라 얻었던 순보가 축지로 통하는 열쇠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작 녀석은 죽어도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동생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동료들에게는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그때엔 이미 한창 아르티야 내부에 균열이 가고 있을 때였으니까. 말해 줄 정신도 없었다.

대신에 동생은 갈리어드를 떠올리면서 순보를 틈틈이 연구했고, 성과를 일기장에다 기록했다.

연우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순보를 얻고자 했다.

순보를 얻어야만 비로소 동생이 연구한 성과들이 빛을 볼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어느 정도 기반을 확보했을 때에 축지를 열 수 있을 테니까.

* * *

“시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몸을 숨기고 있는 나를 찾아 가볍게 터치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제한 시간은 각 횟수마다 15분.”

갈리어드는 연우와 같이 모옥 밖으로 나와서 시험의 규칙을 설명했다.

“물론 너와 나 사이에는 격차가 클 테니 어느 정도 핸디캡은 둘 것이다. 양손을 쓰지 않고, 움직이는 것 외에는 다른 스킬도 쓰지 않도록 하지.”

갈리어드는 두 손을 높이 들더니 가만히 뒷짐을 졌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갈리어드의 장기는 체술이 아닌 보법과 신법에 있었다.

‘그래도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못하니 그것만으로도 승산은 충분히 올라가.’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 대신에 대검 두 자루를 뽑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살짝 상반신을 낮췄다.

언제라도 튀어 나가기 위한 준비 자세.

갈리어드는 그걸 승낙으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지.”

팟!

갈리어드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

육안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연우는 감각 강화와 용마안, 두 가지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분명 갈리어드의 기척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바람을 따라 잔잔하게 홀러나오는 결이 있었다.

연우는 결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면서 근원을 쫓았다.

순보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순보에는.

아주 큰 약점이 있다는 것.

‘여기!’

연우는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위 틈 사이로 대검을 냅다 던졌다.

순간, 갈리어드가 위로 튀어 나왔다.

잔뜩 딱딱해진 표정을 짓고서.

분명 순보는 기척을 차단하고 몸놀림을 가볍게 하는 데 특화된 스킬이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기능에 치중된 탓에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연우는 재빨리 갈리어드가 튀어 오른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

‘순보의 가장 큰 특징은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것. 쓸모없는 행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로지 목적에만 충실해.’

타닥!

갈리어드는 연우에게 잡히기 직전, 몸을 허공에서 뒤틀면서 가까스로 땅에 착지했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뜻은 단 하나.’

이번에는 서쪽. 메마른 나무 위.

팟!

‘순보가 결을 밟으면서 움직인다는 것.’

이번에는 갈리어드의 경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연우가 손을 뻗었다. 갈리어드가 옆으로 몸을 틀었다.

‘순보를 만든 플레이어가 결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어. 본능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순보가 결을 이용하는 한.’

이번에는 한 박자 차이로 갈리어드가 피했다.

하지만.

연우는 이제 어느 정도 갈리어드의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절대 내 눈을 피할 수 없다.’

연우는 다시 결을 밟고 움직이려는 갈리어드의 이동 경로를 파악, 그 전에 대검을 던져 경로를 끊어 버렸다.

갈리어드가 화들짝 놀라 계획했던 경로 옆으로 이탈했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는 연우가 선점하고 있었다.

타악!

“터치 한 번. 성공했습니다.”

“……!”

연우는 어느새 갈리어드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었다.

갈리어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갈리어드는 하얀 가면 너머로 살짝 호선을 그리는 연우의 눈매를 본 뒤에야,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양손과 다른 스킬을 쓰지 않겠다고 제약을 건 것은 갈리어드 자신이었으니.

피식.

그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아무리 도망쳐 봤자, 경로가 사전에 차단 되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결국 연우는 그 뒤로도 끝까지 갈리어드를 쫓아 터치를 하는 데 성공했다.

[다크 엘프, 갈리어드를 7번이나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퀘스트의 최대 달성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운디네의 잔을 획득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추가 보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다크 엘프, 갈리어드에게 요구하십시오.]

“허, 참!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갈리어드는 자신의 우측 가슴에 손을 갖다 댄 연우를 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탑의 랭커들이 오더라도 쉽게 승부를 내주지 않았던 자신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약점이 꿰뚫리고 말았으니.

“대체 무슨 수를 쓴 겐가? 이것은 이리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영업 비밀입니다.”

연우는 가볍게 대꾸했다.

갈리어드는 가만히 연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

다크 엘프는 절대 거짓 약속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자신이 여태껏 기다리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군. 따라오게.”

갈리어드는 다시 모옥 쪽으로 몸을 던졌다.

연우도 곧장 뒤를 따랐다.

* * *

“받게. 이것이니.”

갈리어드는 모옥으로 돌아오자마자 구석에 있던 가방을 꺼내 연우에게 내밀었다.

저렇게 귀중한 걸 어떻게 아무런 잠금장치나 보안 장치도 없이 내팽개쳐 둘 수가 있는 건지.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연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딸칵! 안쪽에는 사파이어를 깎은 것처럼 곱게 반짝이는 둥근 수정체가 있었다.

수정체 내부에는 푸른색 물이 담겨 출렁였다.

‘이것이, 운디네의 잔.’

[운디네의 잔]

분류: 보석

등급: A

설명: 영적 물질, 아카샤가 짙은 농도로 가득 담긴 수정체. 아카샤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는 지고의 보물이 될 테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운디네의 축복

물의 정령, 운디네의 원료가 들어 있다.

“깨지지 않도록 잘 다뤄야 할 거야. 자칫 내용물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라도 한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을 도로 닫았다.

아카샤는 원래 물질세계에서는 빚어질 수 없는 물질. 그런 걸 강제로 구현해 놨으니 새어 나왔다가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연우 하나쯤은 쉽게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하지만 가방에만 잘 보관해 둔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 가방 자체도 특별 제작된 아티팩트였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갈리어드가 이번에는 추가 보상을 연우에게 내밀었다.

푸른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

겉면에 알 수 없는 문자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탑의 시스템 덕분에 문자 해독은 어렵지 않았다.

‘순보.’

바로 스킬북이었다.

[순보]

등급: C-

숙련도: 0.0%

다크 엘프 내에서도 대대로 선택 받은 전사들만 터득할 수 있었던 기술. 몸놀림이 가벼워지고, 빠른 공격이 가능해진다. 숙련도에 비례해 이동 속도가 증가한다.

*재빠른 몸놀림

발동하는 내내 공격 속도가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적의 처치 시, 5초간 공격 속도가 2배로 증가하며, 크리티컬 데미지가 발생할 확률도 7% 증가한다.

연우는 드디어 원하는 걸 얻었다는 생각에 쾌재를 외치면서 겉면에다 손을 얹었다.

스킬북은 다른 스킬들과 다르게 습득하기가 아주 쉬웠다. 대신에 그만큼 값이 비싸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려웠다.

‘습득.’

스르륵.

스킬북이 푸른색 기운으로 확 흩어지면서 손아귀로 흡수되었다.

[스킬 ‘순보’가 생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빠른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감각도 같이 예민해져 육체적 능력이 향상됩니다.]

연우는 몸을 억누르고 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육체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아.’

여태껏 연우는 육체를 완성시키는 데에만 주력을 다했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근골을 단단하게 다졌다.

그런데 순보가 더해지면서 단단해진 육체를 기민하게 다룰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갈리어드를 찾아오기 전보다 한 번 더 크게 육체적 능력이 비약했을 터였다.

물론, 그만큼 순보가 완전히 몸에 익도록 다시 단련해야겠지만.

‘그릇은 거의 다 빚었으니, 이제는 내용물을 채울 차례야.’

그릇에 담을 내용물은 간단했다.

가장 부족한 스탯.

마력.

‘그건 아카샤의 뱀을 잡아야만 채울 수 있어.’

녀석이 가진 내단은 상상을 초월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아카샤를 흡수해 체내에 축적한 기운은, 탑에서도 비슷한 건 몇 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했다. 지고의 보물이었다.

연우가 여태껏 아카샤의 뱀만 바라보면서 뛰어왔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강화골을 이룬 육체는 충분히 아카샤 뱀의 내단을 수용할 수 있어. 그리고…… 그땐 비로소 계승 작업도 끝이 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아카샤의 뱀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연우는 바싹 메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였다.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여태 연우를 살피던 갈리어드가 의자에 상반신을 걸쳤다. 그의 입가에는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자네도 그렇고, 이번 튜토리얼에는 참으로 대단한 놈들이 많아. 수백 회차에 걸쳐도, 날 겨우 읽을 수 있으려나 싶은 놈이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했었는데…… 자네까지. 하아! 아니면 나도 이제 늙은 건가?”

순간,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외에도 앞서 다녀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두 명. 남매라던가? 그리고 둘 다 자네처럼 나란히 운디네의 잔과 순보를 가져갔었고.”

“그렇군요.”

연우는 어렴풋이 두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튜토리얼 랭킹 1위와 2위.

‘에도라와 판트라고 했었나? 하긴. 그만한 공적치라면 여기를 들를 만했겠지.’

갈리어드와 운디네의 잔은 딱히 큰 비밀이 아니었으니까. 유명한 것도 아니었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연우는 운디네의 잔이 담긴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한데, 그걸 들고 어디로 갈 생각인가? 보아하니 연금술사나 정령사는 아닌 것 같은데. 운디네의 잔이 굳이 필요한 이유가 짐작이 가질 않아서 말이야.”

연우는 굳이 목적지를 말해 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생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 마지막 예의는 지켜 주고 싶었다.

‘어차피 갈리어드는 막을 사람도 아니니까.’

갈리어드는 아카샤의 뱀을 쫓기만 할 뿐이지, 절대 잡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유는 여전히 아무도 몰랐다.

“아카샤의 뱀을 잡으러 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는데.

순간, 갈리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카샤의 뱀에 간다고?”

불현듯, 연우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갈리어드는 짧게 침음을 내뱉더니 안타까운 시선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카샤의 뱀은 이미 잡히고 없다네. 방금 전에 말한 두 남매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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