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8화 (38/862)

13화. 아카샤의 뱀 (6)

서쪽 밀림 지대에서 일어난 불길은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불길은 무너진 코볼트 부락을 집어삼키면서 몸집을 불렸고, 화마는 점차 옆으로 번져 나가면서 게걸스럽게 밀림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터전을 잃은 고블린과 코볼트는 화마를 피해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이에 기존 영역의 몬스터들과 충돌이 벌어졌으니. 하지만 그들마저도 곧 화마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혼란은 도미노 현상처럼 E구획 전체로 퍼져 나갔다.

때문에 모두가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플레이어들도. 몬스터들도.

* * *

시커먼 연기. 붉은 불길.

키에엑!

키에!

고블린 대부락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불타는 영역. 곳곳에서 쏟아지는 구원 요청.

“대족장! 대족장! 큰일…… 컥!”

고블린은 대족장이 있는 막사를 열다가 날아온 손도끼에 머리통이 박살 나 널브러졌다.

“나. 대족장 아니다. 왕이다.”

고블린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른 족장들을 돌아봤다.

“오크, 나타난 거 맞나?”

“확실하다. 죽은 부족. 손 다 채울 만큼 많다. 오크, 부락에서 자꾸 발견됐다.”

으드득!

고블린 왕은 이를 잔뜩 갈았다.

빌어먹을 오크 놈들 같으니. 자신들의 터전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까지 질러?

여태껏 알려진 것만 따져도 벌써 무너진 부락이 8개가 넘는다. 구원 요청을 하는 곳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조사해 본 결과, 오크들은 정말이지 집요하게 도발을 해 왔다.

부락 내 고블린들을 통째로 학살하고, 불을 질러 완전히 전소시켰다. 그리고 생존자를 한두 명씩 풀어 다른 부락으로 구원 요청을 떠나게 만들었다가, 뒤를 밟아 그쪽 부락까지 습격해 버렸으니.

원수가 복수를 해도 이렇게까지 덤비지는 않을 정도였다. 별다른 선전 포고나 자잘한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최근에 인간의 숫자가 많아졌으니 당분간 손을 잡자는 약속까지 나눴었는데.

결국 고블린 부락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3할에 달하는 전력이 허공에 증발하고 말았으니.

“오크. 목적 모른다. 하지만 우리 고블린 절대 원한 안 잊는다.”

고블린 왕이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뜰 무렵.

갑자기 막사가 열리면서 다른 고블린이 뛰어왔다.

“왕! 왕! 코볼트와 놀이 전령 보냈다! 오크, 같이 복수하자고 한다! 동맹 맺자고 한다!”

고블린 왕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오크 놈들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들에게도?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당장은 복수부터 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안내해라! 그들, 만난다! 오크. 다 죽인다!”

고블린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볼트와 놀의 전령이 있는 곳으로 바쁘게 발을 놀렸다.

상황은 다른 종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우리도 고블린과 같다! 오크들이 공격했다!”

“철천지원수! 오크들, 우리 왕 죽였다! 복수해야 한다!”

고블린 왕은 그들의 말을 모두 취합한 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크들이 갑자기 미쳤는지 전방위로 도발을 감행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이라고 무사할까?

고블린 왕은 즉시 수하들에게 주변에 있는 다른 몬스터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우리 같은 곳 많았다!”

“오우거나 트롤들도 괴롭다고 했다! 잠시 휴전 협상 맺자고 했다!”

고블린 왕은 두 눈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건 기회다! 진짜 숲의 왕이 될 기회!’

고블린 왕은 어렸을 때부터 고블린답지 않게 지능이 높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다.

그래서 이번 일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가 봤을 때, 이번 일은 누가 계획했든지 간에 범인이 오크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분노가 극에 달한 몬스터들을 한데 취합시키고, 그들의 영웅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

몬스터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진짜 숲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쪽의 리자드맨 군단이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을 때.

고블린 왕은 탁상을 세게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겁 많은 리자드맨도 오크와 전쟁을 하러 간다! 용감한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없다! 나를 따라와라! 오크 왕, 내가 목 자른다!”

고블린 왕의 카리스마가 다른 몬스터들에게도 전달된 것일까?

그들의 두 눈도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오크에 대한 분노와 터전을 잃은 원한이 한데 타오르면서 거대한 광기를 형성했다.

“고블린 왕 따르자!”

“복수하자! 오크를 모두 죽이자!”

결국 고블린 왕의 주도 하에 몬스터 러쉬(Monster Rush)가 시작되었다.

수만 마리로 이뤄진 몬스터 러쉬.

목적지는 단 한 곳.

당연한 말이지만, 동쪽이었다.

* * *

[몬스터들 간의 갈등을 사 전쟁을 시작하게끔 유도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서든 퀘스트 / 몬스터 러쉬]

내용: E구획 내 몬스터들에게는 서로 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불문율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몬스터들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혼란으로 치달을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그치게 만드십시오.

보상:

1. 칭호 ‘괴물사냥꾼’.

2. 고블린 왕의 눈.

3. 몬스터의 5색 보석.

4. 추가 공적치

‘됐다. 뜻대로 잘 풀리고 있어.’

연우는 수만 마리로 구성된 몬스터 군단을 통솔하는 고블린 왕의 연설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기(아카샤)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아카샤 뱀의 부활 속도도 덩달아 빨라진다.

리자드맨에 이어서 몬스터 러쉬까지 더해진다면?

제아무리 오크 부락이 E구획 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해도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부활 정도로 그치지 않겠지.

어쩌면 역대 튜토리얼을 통틀어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거대한 아카샤의 뱀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판은 깔렸다.

연우는 가만히 앉아 구경하다가 필요할 때 나타나서 필요한 것만 취하면 그만이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서든 퀘스트가 뜬 것이지만.’

퀘스트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각 층계의 중심 과제가 되는 메인 퀘스트.

히든 피스로 숨겨져 자격자에게만 제공되는 히든 퀘스트.

그리고.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로 인해 돌출되는 서든 퀘스트.

서든 퀘스트는 아마 메인 퀘스트 때처럼 E구획 내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공고가 되었을 것이다.

뭘 모르는 놈들은 몬스터들을 사냥할 기회가 늘었다면서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눈치가 빠른 놈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채겠지.’

연우는 그런 ‘낌새’를 알아챌 것이 영 꺼림칙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낌새를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일 테니.’

여기서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신호탄은 쏘아졌다.

이 뒤 결과는, 어떻게 될까?

연우는 빽빽하게 진군하는 몬스터 러쉬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 조용히 뒤를 밟았다.

쉭!

* * *

고블린 왕이 몬스터들을 한데 규합하던 그 시각.

“쓸데없는 놈들이 너무 많군.”

베인은 입술 끝을 비틀면서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봤다.

빌드의 지시에 따라 모인 아랑단 1조의 플레이어들.

하지만 그들도 뚱해 있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소리를 대체 누가 하는 건지.”

플레이어 크라수스는 짜증 섞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베인과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베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크라수스를 노려봤다.

크라수스도 똑같이 따라서 차갑게 웃었다.

“왜? 노려보면 어떡할 건데?”

“많이 시건방져졌어, 크라수스. 뒷일 감당할 자신 있나?”

“못할 건 없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감당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베인과 크라수스는 서로를 노려보면서 기세를 흩뿌렸다. 주변으로 바람이 확 불어닥치며 공기가 들끓었다.

남은 플레이어들은 가만히 팔짱을 끼면서 둘의 기세 싸움을 지켜봤다.

1조 내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놈들이 싸우니 구경하기도 좋고, 최소 둘 중 하나는 튜토리얼 랭킹에서 탈락할 테니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둘의 싸움은 이뤄지지 않았다.

딱!

“둘 다 어린애 같은 싸움은 그만하시게나. 이럴 시간에 1분이라도 더 빨리 목표를 제거하는 게 우리한테도 이득이라는 걸 왜 모르지?”

1조의 웃어른 역할을 맡고 있는 다이크가 박수를 세게 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베인과 크라수스는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별다른 반발은 하지 않았다.

다이크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으니까.

다만, 다른 플레이어들만 아쉬운지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다이크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듣자 하니 목표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크 부락 근방에 있다고 하니, 어서 처치하고 돌아가세. 물론, 2조를 전멸시킨 놈이니 만큼 방심을 해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베인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포메이션을 갖추고, 출발하세.”

플레이어들은 빌드에게서 배웠던 대로 진형을 갖췄다.

서로 간의 사이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오랜 훈련으로 물리적 결합은 잘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눈은 탐욕으로 일렁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놈의 머리를 가져야만 한다.’

‘배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상위로 치고 나가야만 해. 여기서 안주할 수는 없어.’

‘머리를 갖고 나서도 분쟁이 벌어질 텐데. 이 머저리들을 어떻게 따돌린다?’

그들은 서로 간의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이동할 준비를 갖췄다.

그때.

쿵-

갑자기 뭔가가 미약하게 울렸다.

다이크가 손을 들어 행군을 멈췄다.

“잠깐.”

“왜 그러지?”

“무슨 일입니까?”

베인과 크라수스는 앞으로 튀어 나가려다 말고, 인상을 찡그리면서 동시에 다이크를 돌아봤다.

다이크가 미간을 좁혔다.

“이 소리, 못 들었나?”

베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데, 갑자기 귓가가 울렸다.

쿠웅! 쿠웅! 쿠웅!

뭔가가 울리고 있었다.

“땅?”

황당해하는 얼굴.

대체 무슨 일이기에 대지가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그때 이중에서 가장 감각이 뛰어난 크라수스가 갑자기 시선을 서쪽으로 돌렸다.

“다이크! 저기를 보십시오!”

베일과 다이크, 그리고 멤버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잔뜩 굳어 버리고 말았다.

쿵- 쿵-

쩌거걱, 쿠웅!

숲을 부술 듯이 가로지르며, 메마른 황무지를 내달리는 거대한 ‘해일’이 있었다.

몬스터로 이뤄진 해일.

그냥 어림잡아 봐도 최소 수만 마리는 될 것 같은 숫자.

E구획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라도 죄다 튀어나온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여태껏 겪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는데!

특히 절대 어울릴 수 없다던 고블린 떼와 오우거, 트롤 따위가 같이 맹목적으로 뒤섞여 있는 모습은 광기마저 느껴졌다.

“다이크!”

크라수스가 다이크를 돌아봤다.

다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제아무리 그들이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해도, 저렇게 많은 머릿수가 달려든다면 그들쯤은 쉽게 짓밟을 수 있었다.

“후, 후퇴한다!”

다이크의 외침과 함께 1조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켜라! 인간! 앞길 막지 마라! 막으면 죽는다!”

“죽어라, 인간!”

몬스터들은 베인과 다이크 등이 방해가 된다 여기고, 그대로 짓밟아 버리고자 했다.

손도끼가 마구잡이로 날아들고, 독침이 쏟아졌다.

쉬쉬쉭-

“크아악!”

“아악!”

과녁이 되다시피 한 플레이어들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위를 화가 잔뜩 난 오우거와 트롤들이 덮쳤다.

퍽! 퍼퍼퍽!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저항하기도 전에 피 떡이 되고 말았다.

다이크는 어떻게 저항을 해 보기도 전에 짓뭉개졌다. 크라수스는 칼을 뿌리기도 전에 팔다리가 뜯겨 나가면서 오우거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크르르-

키에엑!

몬스터들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다음 사냥감을 찾아 와락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그들은 몬스터 러쉬라는 해일 속으로 표류하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자존심이 강한 베인은 이깟 E구획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래서 도중에 방향을 꺾어 저항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몬스터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칼을 휘두르고 스킬을 써도 티도 나지 않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단 말이다아!’

이깟 몬스터들 때문에 자신의 원대한 꿈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청화도의 ‘칼’이 되어 탑을 질타하겠다던 원대한 꿈이……!

“인간, 죽어라!”

베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도낏자루가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빠르……!’

퍼억!

한쪽 팔이 허공으로 튀었다. 몸이 피를 뿌리면서 옆으로 튀었다.

베인이 미처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날려 버린 핼버드를 높이 들고, 고블린 왕이 포효했다.

“다 죽여라! 전부 다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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