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카샤의 뱀 (7)
숲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불길이 치솟고, 몬스터가 좀비 떼처럼 쏟아졌다.
키에엑! 키엑!
“젠장! 이게 뭐야!”
“이런 건 듣지 못했는데……! 아랑단 놈들, 튜토리얼 질서를 지키네 마네 하더니 대체 뭘 한 거야”
E구획을 전전하면서 증표를 모으고, 히든 피스를 찾아 공적치를 올리려던 플레이어들은 단숨에 박살이 났다.
검을 휘둘러도, 실드를 쳐도 역부족이었다.
진형을 갖추다가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그러다 곳곳에서 밀려오는 도끼질에 그대로 몸이 아작 났다.
그나마 진형을 갖췄던 이들도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금세 짓밟히고 말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 해일.
여길 둘러보면 고블린이 사람의 머리를 잘라 포효하는 모습이 보이고, 저길 둘러보면 트롤이 플레이어를 뜯어먹는 모습이 보였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 아닐까.
몇몇만이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방 따라잡힐 것 같았다.
어딜 보더라도 몬스터가 없는 곳이 없었으니까.
E구획에 어떻게 이 많은 몬스터들이 여태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따돌린다고 해도 빠른 속도로 숲을 집어삼키는 불바다를 만나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오!”
“제기라아알!”
튜토리얼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생각했던 플레이어들은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뒤늦게 E구획의 시련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99개의 증표를 모아 자격을 증명하라.
자격을 증명한다는 것.
그건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도 부족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
플레이어들은 몬스터들을 계속 베고 또 베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팀원끼리 뭉치고, 솔로 플레이어들은 솔로 플레이어들끼리 연대를 시도했다.
그렇게 어수선한가운데.
팟!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나무 사이사이를 날아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스걱!
연우는 순보를 밟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증표를 12개 획득했습니다.]
[증표를 4개 획득했습니다.]
[증표를…….]
……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키면서 주변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읽고, 순보를 밟아 기척을 최대한 죽이면서 막타만 골라 먹었다.
그러다 보니 빠른 속도로 증표를 쌓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연우는 차갑게 웃었다.
‘꿀 빤다고 하던가?’
부대원들이 했던 은어를 떠올리면서.
연우는 조금씩, 그러면서도 빠르게 다시 오크 부락이 있는 곳으로 전진했다.
목적지는 아카샤의 뱀 굴.
이제 슬슬 아카샤의 뱀을 꺼낼 시기였다.
* * *
오크 부락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취이익! 리자드맨이 전쟁을 시작했다! 리자드맨이 북쪽 방벽을 넘었다!”
북쪽을 지키던 32부족장이 갑자기 가져온 보고.
오크 왕은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리자드맨이 전쟁을 일으키나!”
“모른다! 자기네 왕 죽였다는 이상한 말하면서 쳐들어왔다! 왕! 도와 달라!”
“취이이익! 이 미친 도마뱀들이! 감히!”
오크 왕의 두 눈이 불을 뿜었다.
신의 부활 의식이 한창 진행되던 이때 하필이면!
가뜩이나 신을 죽인 인간들도 아직 찾지 못해 짜증이 나던 판국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오크 왕은 침착했다.
괜히 나쁜 생각을 가져서 부활 의식에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께 드릴 음식이 풍족해졌다며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취익! 너는 샤먼께 전해라! 먹이 많다고! 곧 먹이 들고 찾아가니 조심하라고!”
“알겠다, 취익!”
오크 왕은 수하에게 지시를 내린 뒤, 벽에 걸려 있던 칼을 뽑아 밖으로 나섰다.
자신을 종족 최고의 전사로 만들어 줬던 칼.
이것이 있는 한 자신에게는 항상 승리만 뒤따랐다.
그리고 전장에 섰을 때.
오크 왕은 흥분했던 마음 대신에 경악을 멈추지 못했다.
리자드맨뿐만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도 가득 있었으니까!
드넓은 지평선을 따라 모든 몬스터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오크 왕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함정이었다!
숲의 종족들을 모두 혼란으로 몰아넣으려는 간악한 함정……!
하지만 오크 왕은 생각을 논리 있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뛰어나지 못했고, 결국 몬스터 러쉬를 정면에서 부딪쳐야만 했다.
“벽을 쌓아라, 취익!”
“취이익! 수레를 가져와라! 놈들을 막아라, 취익!”
오크들은 수하들을 독려하면서 어떻게든 러쉬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방벽과 수레를 부수고 들어가면서 부락을 짓밟았다. 오크들은 녀석들을 상대로 절대 밀리지 않으며 끈질기게 싸웠다.
황무지를 따라 몬스터 시체가 수북하게 쌓였다.
피가 흘러내리면서 까맣던 땅을 붉게 물들였다. 웅덩이가 곳곳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 위로.
“파락!”
“크라눔!”
고블린 왕과 오크 왕이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서 충돌했다.
쾅!
기세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면서 대지가 내려앉았다.
* * *
‘지금쯤 두 마리가 붙었겠군.’
연우는 아캬사의 뱀 굴 쪽으로 이동하다 말고, 먼 곳에서 들리는 충돌 소리를 듣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고블린 왕, 크라눔.
오크 왕, 파락.
두 마리는 사실 하르간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보스 몬스터들이었다.
서쪽의 지배자, 크라눔과 동쪽의 지배자, 파락은 서로를 원수처럼 무시하고 싫어했다.
크라눔은 파락이 무식하다고 싫어하고, 파락은 크라눔이 열등한 고블린이라면서 경멸했다.
서로가 비교 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이라는 듯이.
하지만 둘 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둘 다 웬만한 플레이어쯤은 쉽게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이 때문에 녀석들을 잡아 공적치를 올려 보려다가 죽은 플레이어들도 꽤 많았다는 것.
그런 두 놈이 부딪쳤으니 승부는 절대 쉽게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오히려 분위기만 더 과열되겠지. 피해는 더 커질 거고, 광기는 무르익을 것이다.
연우가 딱 바라던 상황.
그렇기 때문에 아카샤의 뱀을 최대한 빨리 인도할 필요가 있었다.
먹잇감으로 가득한 곳으로!
[‘아카샤의 뱀 굴’에 입장했습니다.]
연우는 익숙한 메시지를 보면서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카아아!
“취, 취이익! 시, 신이시여! 체통을…… 컥!”
“취이이익! 신이 화났다! 신이 뿔났다!”
“신이 우리를 징벌한다, 취익!”
“도, 도망치자, 취이익!”
바깥과 마찬가지로 온통 혼란에 잠겨 있었다.
아카샤의 뱀이 온통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언제 몸집을 다시 불렸는지 5미터나 되는 크기를 가지고, 이리저리 난동을 피워 대면서 마구잡이로 오크들을 먹어 치웠다.
제단은 이미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의식을 지내던 샤먼은 제일 먼저 잡아먹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신실한 신도였던 오크들은 어떻게든 아카샤의 뱀을 진정시켜 보려 하거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아카샤의 뱀은 절대 한 번 점찍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도망친다면 독액을 뿌려 녹여 버리고, 가까이 있으면 날래게 움직여 잡아먹는다. 꼬리로 후려치거나, 몸집으로 깔아뭉개기도 하니,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역시.”
연우는 동공이 시뻘겋게 젖은 아카샤의 눈을 봤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피에 잔뜩 취했어.’
아카샤의 뱀은 절대 신으로 모실 수 있을 만큼 대단하거나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몸집만 크고 강할 뿐.
언제나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해야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궁리할 뿐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잔뜩 허기가 진 상태.
그런데 밖에서 대규모로 피를 뿌려 대고 있다면?
‘미치지 않고 배길까.’
애초 이런 걸 노렸고, 만약 피에 취하지 않았다면 강제로 취하게 할 생각이긴 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효과가 훨씬 더 잘 먹혔으니.
딱히 뭔가를 추가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카아아아!
아카샤의 뱀은 마지막 남은 오크까지 먹어 치우고 천장을 보면서 울부짖었다.
이미 10미터까지 불어나 입가에는 핏자국과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한참 동안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다 대가리를 두어 번 벽에다 부딪치더니, 갑자기 땅에다 구멍을 내서 빠른 속도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간다.’
연우는 혹시 아카샤의 뱀이 자신의 기척을 읽을까 싶어 계속 흔적을 지웠다.
그러면서도 아카샤의 뱀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끝까지 감각을 놓지 않았다.
녀석은 지하를 헤엄치면서 빠른 속도로 밖으로 향했다.
방향은 남서쪽. 몬스터들이 서로 뒤엉키고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됐다!’
연우는 긴장을 풀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카샤의 뱀이 없는 뱀 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아카샤의 뱀이 전장을 전부 휩쓸려면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전부 허비할 수는 없어.’
히든 피스는 괜히 히든 피스라 불리는 게 아니다.
특히 아카샤의 뱀 같은 독특한 히든 피스가 머무는 구역이라면, 분명 어떻게 숨겨진 커다란 뭔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동생도 여기에 대해서 언급해 놓은 게 있었으니.
평범해 보여도 히든 피스가 자리한 곳에는 히든 피스가 있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튜토리얼에 있어서는 안 될 난이도를 가진 아카샤의 뱀. 녀석이 거기에 있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물론이고, 녀석을 오랫동안 쫓았던 갈리어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절대 그 이유가 작지는 않을 거란 것.
그리고 수천 년을 자랑하는 탑의 역사를 통틀어, 그 ‘이유’를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것.
탑의 기나긴 역사 동안 아무도 찾지 못한 장소.
그곳을 찾을 수 있다면?
연우는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면서 공동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용마안을 활짝 열었다.
그는 아카샤의 뱀이 똬리를 틀었던 보금자리를 찾고자 했다.
‘뱀의 습성 상, 녀석이 숙면과 휴식을 취하는 장소나 외부로부터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있을 거야.’
그 순간.
용마안으로 뭔가가 감지되었다.
벽면을 따라 좁게 갈라지는 통로.
하지만 아카샤의 뱀의 입장에서나 좁지, 연우에게는 충분한 너비였다.
연우는 재빨리 순보를 밟아 통로를 통과, 뱀 굴 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섰다.
그리고 그때.
쏴아아!
갑자기 안쪽에서부터 으슬으슬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뭔가가 있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거기에 발을 들인 순간.
연우는 볼 수 있었다.
‘여기구나.’
바깥의 메마른 황무지와는 전혀 다른 광경.
벽면을 따라 살이 에일 것 같은 바람이 감돌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눈과 미끄러운 빙판이 깔렸다.
천장에는 종유석 대신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설경(雪景).
그리고 중심에.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찾았다.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