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녀 사냥 (5)
연우가 뚫어 놓은 길을 따라, 레드 드래곤을 비롯한 여러 거대 클랜들이 이동에 박차를 가하던 그 시각.
가장 선두에서 침투를 하고 있던 엘로힘은 어느덧 요새가 보이는 협곡의 끄트머리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앞장서서 걷던 아이온이 걸음을 뚝 멈췄다.
“음? 뚫렸나? 마녀 놈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군.”
아이온은 후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인상을 잔뜩 찡그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두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원래 아이온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기형적인 유전자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가문, 생명의 가문이 프로토게노이 족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전지적 시점〉. 바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혈계 능력 덕분이었다.
전지적 시점은 여러모로 올포원이 가진 천리안과 비슷했다.
다만, 원하는 곳을 전부 볼 수 있는 천리안과 달리, 전지적 시점은 자신이 와드(Ward)를 심은 물체의 시점을 빌려 주변을 관찰한다는 점이 달랐다.
아이온은 수하들을 시켜 브로켄 성 곳곳에 와드를 심었고, 덕분에 마녀들이 있는 곳들을 속속 피하면서 빠르게 5개의 방호 결계를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뒤따라오는 자들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아이온의 와드에 여태껏 마녀들에게 밀리기만 하던 레드 드래곤 등이 빠르게 역전을 하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거리를 벌려 놨지만, 그래도 언제 따라잡힐지 모르는 일.
아이온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밟는 것이 아주 불쾌했다. 신의 혈통을 타고난 그들은 언제나 앞장서서 우민들을 인도해야 하는 입장이어야 했지, 누군가에게 따라잡혀서는 절대 안 되었다.
하물며 현자의 돌과 같은 선진 문물은 원래 그들이 가져야 격이 맞았다.
“아이테르.”
그래서 아이온은 자신을 따라온 수하들 중 한 사람을 콕 집었다.
아이테르는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아이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이다. 그래서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온, 전……!”
“네가 남아 놈들을 어떻게든 막아라. 왜 그래야 하는지는.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아이온은 노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테르를 노려봤다.
아이테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이온이 저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브라함에게서 새끼 용인을 탈취하지 못한 실책을 여기서 만회하란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백광을 받을 정도로 클랜에서 촉망받던 헤메라가 죽기까지 했으니. 지금 아이온의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아이테르는 명령에 따라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건 아이온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온 원로원의 의원이며 다른 가문의 가주들까지. 그들의 시선에는 갖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불쾌함. 멸시. 차별. 경멸. 비웃음. 냉소.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시선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기랄.’
언제나 저들의 저딴 오만한 눈빛이 문제였다.
아버지 때에 비롯된 죄는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게도 동화되고자 노력했었는데.
자신을 믿어 주던 아르티야의 뒤통수를 치기도 하고, 갖가지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정말 개처럼 일했다. 먹이만 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충견처럼.
‘그런데도 당신들은…… 당신들은! 여전히 날……!’
하지만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원로원 의원이라는 허울 좋은 자리만 던져 줬을 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테르는 마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인정’이었고, 이곳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분의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 그때는. 그때야말로 당신들이 네 발로 기어서 내 발을 핥아야 할 거야! 개 같은 것들.’
아이테르는 그렇게 70명가량 되는 수하들과 함께 남아 아이온 등이 올라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 봐야만 했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가주.”
그때, 수하가 부르는 소리에 아이테르는 울분을 삼키면서 반대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이온의 와드는? 여기는 없겠지?”
“예. 확인했습니다.”
“개놈들. 우리가 당연히 여기서 죽을 줄로만 아는 것이로군.”
감시에 필요한 와드조차 설치하지 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을 버리는 패로 쓴다는 뜻이었다. 레드 드래곤 등의 발목을 묶는 것만으로도 쓰임새가 다한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이테르는 아이온의 생각대로 호락호락 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원, 마안(魔眼)을 개방하라.”
명령과 함께 순간 아이테르와 일행들을 따라 강렬한 마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미간 부근에 혈선이 그어지더니 좌우로 갈라지면서 문장이 나타났다.
삼각 도형 속에 세 개의 원이 눈처럼 나 있는 문장.
마안. 천마의 종복들에게만 허락되는 낙인이었다.
화아악!
특히 최근에 죽은 아홉 번째 주교, 예비치의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는 아이테르가 내뿜는 마기는 질적으로 달랐다.
등 뒤로 검은 안개가 후광(後光)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령. 천마의 힘을 빌려 쓸 때에 나타난다는 현상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이테르?』
그때, 아이테르의 변화를 읽고, 킨드레드에게서 텔레파시가 도착했다. 킨드레드는 다른 마군들과 합류해 아이테르가 가르쳐 준 길로 엘로힘의 뒤를 따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이…….”
아이테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이온의 견제와 레드 드래곤 등을 막아야 하는 임무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용건을 덧붙였다.
“……해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멍청한 놈.』
“…….”
싸늘한 목소리. 아이테르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 말투. 감정. 조소. 그에게는 전부 너무 익숙했다.
『고작 이깟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쯧!』
킨드레드는 혀를 차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너, 아홉 번째의 자리를 원한다고 했었으렷다?』
“……예. 감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험, 지금 바로 여기서 치르겠다.』
아이테르의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금 네가 있는 지점은 요새로 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처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아이온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그곳을 지켜라.』
자격시험이라는 말과 다르게. 킨드레드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가득했지만.
아이테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기회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흘리기도 했다.
아르티야, 엘로힘, 마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결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홀로 발버둥치는 건 똑같았다.
‘저주라면 이것도 저주인가? 정우. 너의 망령은 여전히 나를 옭아매는구나.’
아이테르는 킨드레드와 다른 주교들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수하들과 함께 땅을 박찼다.
마기를 줄줄 흘리면서 일제히 달리는 모습은 마치 허기에 굶주린 늑대 무리를 연상케 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익숙한 녀석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
“엘로힘? 마군? 저놈들은 또 뭐지?”
탐은 가뜩이나 엘로힘보다 늦은 판국에 정체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방해꾼이 나타나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테르는 지면을 박차고 높이 떠올라 포물선을 그리면서, 탐을 덮쳤다. 오른손에는 마군에게서 얻은 천마의 힘을, 왼손에는 동생 헤메라에게서 강탈한 백광의 권능을 빌려서!
번- 쩍!
〈마령〉
〈백광 - 천 개의 빛(百光)〉
새하얀 빛이 레드 드래곤을 덮쳤다.
“비켜라, 잡종!”
탐은 아이테르를 밀어 버릴 생각으로 용의 권능, 원소 접촉을 이용해서 아이테르를 둘러싼 공간을 마구잡이로 비틀었다.
그때.
우르르, 콰콰쾅!
수십 개에 달하는 벼락이 일제히 하늘에서부터 쏟아졌다.
* * *
‘겨우 따돌렸나.’
궁무신 장웨이는 왼쪽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를 억지로 지혈시키고, 간단한 소독을 마친 후 갖고 있던 붕대로 꽁꽁 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신이 온통 타박상으로 가득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상태여서 별 티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계속된 외뿔부족의 추격은 장웨이의 정신을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녀석들은 마치 자신에게 눈이라도 붙여 둔 것처럼 은신처를 계속 찾아냈고, 몇 번은 죽을 위기를 느낄 만큼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때마다 장웨이는 기책을 발휘해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날이 늘어나는 상처까지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무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때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으니.
장웨이는 그동안 자신이 가진 무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신 이예의 사도로 선발되었고, 그러고 나서도 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마저도 빛이 바래게 만드는 무왕은. 그야말로 거대한 벽을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두들긴다 한들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을 벽.
‘아홉 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괴물이라더니.’
저 오만한 여름여왕마저도 무왕과 직접 대립하는 것만큼은 피한다고 했으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그런 자에게 쫓기는 기분은.
‘재미있어.’
너무나 즐거웠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지구에 있던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랄까? 당시 그는 위험한 생활을 전전했고, 탑에 들어오고 나서도 초창기엔 그런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하이 랭커가 되면서 ‘죽는다’는 것과 거리가 멀어졌었는데.
이렇게 몇 달을 구르고 나니 잊었던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찌릿하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누이. 아무래도 누이를 보러 가려면 아직 먼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장웨이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득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위험한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 아주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야 외뿔부족과 전쟁을 치르더라도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장웨이는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무왕의 머리통에다 화살을 박아 넣고 싶었다.
‘숨을 돌릴 곳. 숨을 돌릴 곳.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어딜 가더라도 따라붙는 저들의 눈이 있는 한 자취를 감추기란 요원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많은 이들 사이에 숨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렇게 잠깐 고민을 하던 중, 갑자기 찢어진 종이가 날아왔다. 장웨이는 그것을 낚아채 심심풀이로 내용물을 읽다가 묘한 눈빛을 뗬다.
‘용병을 모집한다고?’
[용병 모집 공고]
하늬바람 조합에서 여러 용병분들을 모십니다. 의뢰 내용은 발푸르기스의 밤의 토벌.
현상 수배 퀘스트와 공동 진행이 가능합니다.
의뢰비는 별도 협상.
그러고 보니 도망치던 중에 얼핏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켈라트 경매장을 들이쳐서 관리국이 단단히 열이 뻗쳤다던 내용이었지, 아마?
당시에는 무왕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발푸르기스의 밤이라.’
장웨이는 흥미가 돋았다. 하늬바람 조합이라면 신비 상인들의 조합 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니. 몸을 숨기기에도 제격이었다. 때마침 수중에 돈도 바닥을 치고 있었고.
‘다른 거대 클랜들도 개입했다고 들었으니. 필요에 따라서는 진흙탕 속으로 외뿔부족을 담가 버릴 수도 있을 테고.’
사냥하기 힘든 사냥감을 노릴 때에는 어지러운 환경으로 끌어들여 잡는 게 최고였다.
장웨이는 혀로 입을 축였다. 사냥감. 그 단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무왕을 잡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독식자. 그놈도 여기에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 *
“이번 모집 공고에 참여한 용병의 명단입니다.”
아트란은 수하가 가져온 명단을 보면서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좆같은 새끼들.”
레드 드래곤에 의해 경매가 엉망이 되어 버린 이후. 아트란이 여태껏 쌓은 명성도 부서진 경매장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조합은 그를 외면했고, VVIP들은 등을 돌렸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경매를 망친 신비 상인은 이 바닥에서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트란에게는 딱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돈.
VVIP초대장을 발부하면서 끌어 모은 재산이 있었다. 아트란은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재산을 털어 용병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았다.
블랙 스컬과 트와이스를 포함한 S급 용병들은 물론, 빙왕 같은 솔로 플레이어들, 그리고 철사자단을 위시한 거대 용병단도 막대한 웃돈을 주고 끌어모았다.
그렇게 모인 용병 숫자가 대략 500여 명. 하나같이 랭커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암흑가 쪽으로도 손을 뻗어 암살 집단 3곳과 계약을 맺었다. 블레이드 어쌔신, 달그림자, 검은 손길. 모두 이 바닥에서 유명한 곳들이었다.
다만, 모집할 때 대놓고 레드 드래곤을 노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대놓고 복수를 하는 건 아트란의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하려는 일에 훼방을 놓는 것. 그것만이 답이다.’
오히려 레드 드래곤을 애타게 만들어 눈앞에서 목표를 가로채는 것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복수일 테지.
그리고 이것은 아트란에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탁본의 진본을 손에 넣을 수 있으면 막대한 이문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도박에 가까운 짓이었지만.
이런 무모한 올인은 젊은 시절 그에게 늘 있던 일이었다.
“레드 드래곤.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든 찢어 먹을 테다.”
아트란이 쥐고 있던 종이가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 그날 밤.
발푸르기스의 밤이 있는 브로켄 성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거대 포탈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