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트리톤 (6)
화아악!
벤티케는 뭔가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서로 상대의 심장에다 칼과 창을 쑤셔 넣고, 누가 먼저 명줄을 끊어 놓느냐를 겨루던 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지금 심장에 칼이 박힌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걸까?
“무슨…… 짓을 한 거로군.”
벤티케의 창은 연우의 오른쪽 가슴에 박혀 있었다.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우는 큰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연우는 몸이 텅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계속 중상을 입고도 악마술과 재생으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현자의 돌이 계속 쏟아 내던 마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간 예지는 그 많은 마력도 한꺼번에 소진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타이밍이 아니면 절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연우가 확보한 미래는 5초.
아주 짧았지만, 생사가 오고 가는 순간에서는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시간.
덕분에 연우는 벤티케의 창이 날아오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었고, 피하는 대신에 몸을 살짝 뒤트는 것으로 창끝이 향하는 위치를 바꿨다.
대신에 그의 칼날은 더 정확하게 벤티케의 심장을 가격했으니.
심장은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신체에 공급하고, 마력을 생산하는 기관. 당연히 심장이 부서지는 건, 보통 플레이어들이 절명하기 십상인 치명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벤티케는 뛰어난 고수이니만큼 심장이 망가져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또한, 거의 소진되었어도, 신력이 일부 남아 그를 지탱시켜 주었다.
“크할할할! 그래. 누구나 다 비장의 한 수는 갖고 있는 법이니까 말이지.”
벤티케는 허망하게 당한 상황에서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억울해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킬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도 플레이어의 재량이며 기술이다. 그것을 숨겨 뒀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꺼내는 게 오히려 더 대단했다. 실력의 3할을 숨기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벤티케가 봤을 때. 연우는 영악했다. 맹수이면서도 본능에 휘둘리지 않았다. 도리어 어떻게 상대를 사냥할 것인지 철저한 계산 하에서 싸우는 타입이었다. 본능에 의존해서 부딪치는 자신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의 싸움도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벤티케는 새롭게 개안을 한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런 기분이 좋았다. 싸우고 있을 때의 희열감. 그리고 그 뒤에 얻는 깨달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에다 발을 들이는 기분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가 싸움을 끊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러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벤티케는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꽈악!
그는 왼손으로 비그리드의 칼날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저대로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게 베이고, 핏물이 칼날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더 깊숙하게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비그리드는 마치 바위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완력이었다.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는 자가 절대 낼 수 없는 힘이었다.
그리고. 시간 예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미래이기도 했다.
이런 일은 본 적이 없었기에. 가면 아래에 있던 연우의 낯이 살짝 굳어졌다.
‘뭐지?’
시간 예지는 회중시계가 가진 독특한 스킬 효과에 의존한 채, 용종이 가진 뛰어난 연산력을 통해 상대의 수많은 공격 투로를 예측하고, 그것을 파훼할 방법을 여러 개 도출해 내어 그중 하나를 택하는 스킬이었다.
때문에 방대한 마력을 잡아먹는다는 흠이 있었어도. 여태껏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언제나 연우에게 승리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연우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한 공격이 그만한 효과를 내지 못했을 때. 그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력도 체력도 바닥이 나 버린 지금. 연우에게는 위험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위기감에 다시 현자의 돌을 쥐어짰다. 코어가 과열되면서 마력을 다시 쏟아 냈다. 이 이상 코어가 열을 내면 자칫 안에 봉인된 동력원이 개방되어 마기에 감염될 위험이 컸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비그리드를 붙잡은 벤티케의 손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밀리지도, 밀지도 못한 팽팽한 힘의 균형 속에서.
갑자기 벤티케가 창을 버리더니 오른손을 뻗어 연우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았다.
“기분 좋게 실컷 싸웠으니 이대로 쓰러져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미안하지만, 쓰러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되어 줘야겠어.”
화아아-
벤티케를 따라 새로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짙은 남색으로 빛나는 기운. 마력도 신력도 아니었지만, 심장이 부서지고도 녀석이 여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임이 분명한 힘이었다.
처음 해저에서 불기둥에 몸이 녹았어도 되살아났었던 힘인 것 같았다. 트라이아나나 권능 말고 다른 숨겨 둔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 몸은 패왕이다. 절대 패배를 해서는 안 되지. 차정우도, 라나도. 결국 패배했기에 스러지고 말았지. 난 그런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다.”
연우의 가면과 머리를 움켜쥔 녀석의 오른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연우는 두개골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때, 비그리드가 조금씩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녀석의 왼손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가면이 먼저 부서질 것인가. 아니면 비그리드가 먼저 심장을 마저 꿰뚫을 것인가.
우지끈-
그때. 가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조각이 하나둘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죽어라.”
벤티케가 포악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에 더 강하게 힘을 실었다. 위태롭게 있던 가면의 반쪽이 부서졌다. 조각이 우수수 쏟아지면서 얼굴의 절반 정도가 드러났다.
그 순간.
연우가 갑자기 비그리드에서 손을 놓았다. 대신에 아공간에서 마장대검을 빠르게 뽑아 올리면서 벤티케의 턱밑을 노렸다. 칼끝이 그대로 박히려는데.
챙강!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툭 떨어진다 싶더니, 연우와 벤티케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벤티케의 오른팔이 잘려서 허공으로 튀었다. 마장대검도 길을 잃고 옆으로 튕겨 났다.
두 공격이 허무로 돌아간 가운데. 둘 사이를 가로질렀던 바람은 두 개로 나뉘어 각각 연우와 벤티케를 휘감았다.
연우를 휘감은 바람은 장신의 남자가 되었다. 자이언트 바스타드 소드를 아래로 늘어뜨린 외팔의 중년인. 하지만 내뿜는 기세만큼은 벤티케가 트라이아나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중년인은 품에 안긴 연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그의 말마따나 연우는 기식이 너무 약했다. 체력과 마력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 있었다. 이대로 탈진해서 쓰러지거나, 죽지 않은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을 구한 자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자신과 면식도 없었다.
중년인을 따라 풍겨 나오는 강렬한 위압감은 살갗이 저릴 정도였다. 벤티케가 패도적이라면, 이 자는 위험하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아르드바드 공작.
혈국의 식탐황제를 지킨다는 네 명의 수신호위, 괴·력·난·신 중에서 ‘력’, 용력을 상징한다는 자가 바로 그였다.
발푸르기스 밤의 공방전에서는 혈국의 군(軍)을 이끌기도 했던 자가, 갑자기 여기는 왜?
다행히 반쯤 부서졌던 가면은 그새 자동 수복이 되어 눈가를 덮고 있었다.
덕분에 녀석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하긴. 알았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목을 자르려 들었을 테지. 혈국에도 아르티야는 원수였다.
“왜 날 구해 준 거지……?”
“그대를 정성껏 혈국으로 모셔 오라는 폐하의 명이시다. 한번 방문하겠다던 약속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아, 폐하께서는 여전히 그대를 참 많이 보고 싶어 하신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비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용종의 고기가 맛 보고 싶었던 것이면서 저런 명분을 두다니. 참 식탐황제다운 짓이다 싶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혈국에는 자신의 이미지가 좋게 박혀 있는 것 같아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아르드바드 공작은 그런 웃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여긴 건지,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쉬어라. 나 역시 그대가 처한 입장을 모르는 게 아니니, 억지로 본국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그대는 폐하의 벗. 당연히 모시는 데 있어 무례를 끼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런다고 해서 정말 마음을 놓을 연우가 아니었다. 오히려 감각만큼은 더 날카롭게 벼리면서 아르드바드 공작을 살폈다. 그래도 정신과 달리 육체는 조금 휴식을 취해도 될 것 같았다. 무력감이 너무 심했다.
벤티케의 숨통을 마저 못 끊은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싸움을 속개하지 못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진랑. 내가 이딴 짓 싫어한다는 거 잘 알고 있을 텐데?”
벤티케는 자신을 구한 진랑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흥을 망친 수하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실리질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주군이 그렇게 하신다면 달게 받되, 그래도 지금은 당신을 구해야겠다는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쏴아아-
진랑은 벤티케의 잘린 팔이 아물 수 있도록 신력을 불어 넣었다.
일반 플레이어는 절대 신력을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진랑이 사용할 수 이유는 단 하나. 그 역시 사도이기 때문이었다.
포세이돈의 아들로 알려진 성좌의 신, 오리온. 진랑은 그의 사도로서 트리톤을 지키는 3대 수장 역할도 함께 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 시선이 닿지 않는 곳곳에서는 남은 수문장들이 이쪽을 엄호하면서, 아르드바드 공작을 견제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튀어 나갈 생각으로.
“대장께서 방금 전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절대 패배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전 대장을 구했을 뿐입니다.”
진랑의 말에 벤티케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내가 질 것이었다, 이 말이냐?”
“전투에서는 승리하실지언정, 전쟁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몸 상태로 아르드바드 공작을 당해 내실 수 없습니다.”
“네가……!”
“벌은 차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쉬십시오.”
진랑은 벤티케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손날로 뒷덜미를 내리쳤다. 벤티케는 결국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다행히 벤티케의 목숨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진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아르드바드 공작을 견제했다.
사실 벤티케를 구하기 위해 나서긴 했지만. 그렇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무지막지한 무게를 자랑하는 검을 아무렇지 않게 왼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망자의 강에 있는 떨거지들이 이따금 아랫것들을 귀찮게 한다 하여 언젠가 토벌할 생각을 하곤 있었다만. 이렇게 갑자기 좋은 기회가 주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군.”
8대 클랜으로서는 자신들의 아성을 위협하니 마니 하는 신흥 클랜들이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기에 언젠가 본보기로 싹 밀어낼까 하는 생각도 가지는 중이었다.
그래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던 건, 그동안 트리톤에 내려진 포세이돈의 가호가 워낙에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포세이돈과 그 자식들의 사도가 주축이 되어 구성된 트리톤은 상대하기가 그만큼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고, 특히 수장인 벤티케는 아르드바드 공작도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벤티케가 쓰러진 지금. 아르드바드 공작은 트리톤을 토벌할 수 있는 좋은 적기라고 여겼다.
물론, 완전한 궤멸은 힘들 테지만, 그래도 전력의 상당수를 깎아내는 것만 해도 큰 쾌거일 터였다.
특히 무술 실력만큼이나 지혜도 비상하다는 진랑은 미리 제거해 둬서 나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진랑도 쉽게 밀리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아르드바드 공작을 노려봤다. 비록 그가 벤티케보다 실력이 뒤처진다고 해도, 절대 크게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벤티케와 맞먹기도 했었으니.
그리고 그런 자신과 실력이 엇비슷한 사도들이 둘이나 더 숨어서 녀석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셋이라면 아르드바드 공작의 목을 딸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연우와 벤티케에 이어, 아르드바드 공작과 진랑 등이 다시 충돌을 일으키려 하던 그때.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이는군.”
이번에는 하늘을 따라 육합전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확 뒤바뀌었다.
아르드바드 공작의 패기도, 진랑 등의 신력도 단번에 억누르는 압도적인 힘.
강풍이 불고, 격랑이 일어났다. 망자의 강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는 가운데.
연우와 아르드바드 공작, 진랑,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트리톤의 남은 전력들이며 유령선의 플레이어들까지. 경악에 찬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 순간, 하늘이 갈리면서 누군가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살벌한 투기가 그들의 숨통을 턱 하고 막히게 만들었다.
차가운 눈매를 한 채, 외뿔부족의 뿔과 반인반룡의 비늘을 함께 가지고 있는 여인.
아르드바드 공작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잔뜩 얼굴이 굳어졌다.
“……봄의 여왕.”
화이트 드래곤의 수장, 왈츠.
예기치 못한 강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