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트리톤 (7)
갑작스런 화이트 드래곤 수장의 등장은 그 근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무 높은 상공에 떠 있어 분명한 생김새도 알아보기가 힘들건만.
녀석이 주는 존재감이 너무 거대해서 사람들은 거리감을 상실하고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아야만 했다. 아니, 오래전에 멸종했다던 거인처럼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자이언트 바스타드 소드를 꽉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히 그가 알기로 봄의 여왕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엘로힘이 한창 76층 공략을 위해 화이트 드래곤과 전쟁 중이었다. 혈국과 시의 바다는 연계를 해서 아래 층계에 있는 화이트 드래곤의 지부와 전력들을 차례대로 소거 중이었다.
전방위로 벌어지는 공격 때문에 화이트 드래곤은 한창 정신이 없었다. 특히 수많은 전장에 나타나는 봄의 여왕 왈츠의 활약이 너무 눈부셨다.
덕분에 76층을 두고 벌어진 전투들이 대부분 소강 상태에 빠졌다지만. 그래도 한눈을 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왈츠를 둘러싼 대기가 일렁이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니군.”
왈츠는 마치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처럼 공간에서 유리되고 있었다.
“분신…… 원영신(元嬰身)인가!”
아르드바드 공작은 왈츠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원영신.
내공을 극한으로 압축시켜서 순도가 원기(元氣)에 가깝게 맑아지면, 내공은 그 자체로 영성을 띠면서 원영(元嬰)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육체를 고강도로 단련하게 되면 모든 노폐물이 빠져나가면서 태어났을 때와 같은 순수한 형태만이 남게 되니, 이를 두고 원신(元身)이라고 한다.
원영신은 이런 원영과 원신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형태로서, 육체의 형태를 띠게 된 내공 덩어리가 본체로부터 분리되어 분신을 이루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분신을 구성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 한 가지로, 내공을 깊게 통달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이기도 했다.
사실 이 개념은 외뿔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원영신의 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아르드바드 공작도 무예에 관심이 깊어 외뿔부족을 조사하던 중에 알게 된 잡지식이었다.
그 역시 원영신의 대체적인 개념만 알 뿐, 어떻게 구성되는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원영신을 이룰 정도라면 이미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명인 급마저도 넘어섰다는 의미였고.
그것이 본체로부터 분리되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확실하게 우리를 제거할 목적이겠지!’
아르드바드 공작은 검을 세게 움켜쥐면서 앞으로 내질렀다. 그 순간, 왈츠의 원영신이 허공을 박차면서 단숨에 그가 있는 곳으로 급전직하했다.
콰아앙!
둘의 충돌로 다시 한 번 더 막대한 기파가 파문을 그리면서 잔뜩 퍼져 나갔다. 물살이 거칠게 요동쳤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억지로 왈츠를 밀어냈다. 그의 상징은 용력(勇力). 완력만 따진다면 진짜 왈츠가 오더라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특성,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아 던질 정도로 대단하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웅대하다는 뜻을 지닌 그의 특성은 그를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전사로 만들어 줬다.
그러니 진짜 왈츠가 아닌, 일개 분신에게 당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 였다.
더구나 왈츠가 뭘 노리는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연우. 여름여왕의 숨통을 끊었던 독식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군의 소중한 벗을, 저런 무뢰배들에게 내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퍼퍼퍼펑-
아르드바드 공작과 왈츠의 원영신이 거세게 충돌하는 동안.
『전원…… 후퇴한다!』
진랑은 뒤에 배치된 다른 사도들은 물론, 수하들에게 철수한다는 어기전성을 날렸다.
빠르게 물러서면서 그는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벤티케가 일어나면 크게 역정을 낼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끝낸 게 다행이었다. 아르드바드 공작과 부딪쳤다면 또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분신이라고 해도, 봄의 여왕이 나타났으니 저쪽도 쉽지는 않겠군. 이참에 같이 공멸해 버리면 좋을 텐데.’
진랑은 마지막까지 아르드바드 공작과 왈츠의 충돌을 바라보다가 곧 대장선에 올라타, 빠르게 해역을 벗어났다.
선단도 대장선을 쫓아 그대로 물러섰다.
처음에는 백여 척에 가깝던 그들의 배는 어느새 3할 이상이 침몰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배들도 훼손된 흔적들이 가득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 * *
콰앙-
“큭!”
아르드바드 공작은 검신을 타고 찌르르 울리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한낱 분신 주제에 이런 힘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하지만 정작 공작을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은 검신을 타고 체내로 쏟아지는 경력(動力)이었다.
외뿔부족의 장기이자 종족 스킬로 분류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는 기예, 내가중수법.
타격한 위치의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 힘은 외뿔부족에 대항하던 수많은 세력들을 몰락시켰던 주범이기도 했다.
경력은 내가중수법을 통해 상대에 심는 힘을 뜻했다.
그런데 왈츠는 그런 경력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휘두르는 주먹 하나하나에, 걷어차는 발길질 하나하나에 막대한 경력이 실려 있었다.
때문에 아르드바드 공작은 어떻게 왈츠의 공격을 막아 낸다 치더라도, 체내로 물밀듯이 쏟아지는 경력 때문에 삽시간에 크고 작은 내상을 수없이 입어야만 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할지 몰라도, 이미 속은 엉망진창이 된 상태.
더구나 연우를 보호하면서 싸우려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이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아르드바드 공작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이 이룬 경지가 정말 제대로 된 것인가 수도 없이 드는 자괴감과 싸워야 했다.
지금은 블랙 드래곤의 수장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81개의 눈 중 하나에 불과했던 탐에게 한쪽 팔이 뜯긴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한낱 왈츠의 분신에게 휘둘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왈츠가 엘로힘의 세 집정관과 대등하게 싸웠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자랑했다지만, 그래도 분신이 본체의 힘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평소 자신의 실력이 아홉 왕을 제외하면 견줄 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공작으로서는. 뼈아픈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르드바드 공작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심란해지려는 마음을 꾹 눌렀다.
지금은 연우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했다.
나의 벗을 정성껏 모셔 와라. 황제가 내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신하이자 기사로서 당연히 따라야만 하는 의무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눈치를 보니 끝까지 내놓지 않을 모양이군.”
하지만 왈츠는 그가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외뿔부족의 기예와 반인반룡의 체질이 더해진 그녀의 힘은 이미 사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다면 죽이는 수밖에. 혈국과 더 갈등을 빚기 싫어 내버려 두려 했지만. 차라리 이참에 공작 급 인사를 하나 제거하는 것도 괜찮겠지.”
마치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겠다는 것처럼 너무 쉽게 내뱉는 말투.
그만큼 왈츠의 원영신은 아르드바드 공작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다시 숨을 고르면서 검을 움켜쥐었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여는 수밖에. 그가 여태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개방하려던 그때.
『제 말, 들리시나요?』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목소리 하나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들리신다면 절대 내색하지 마시고, 가볍게 눈만 깜박여 주세요.』
아르드바드 공작은 오랫동안 전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사람답게, 절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봄의 여왕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
아르드바드 공작은 목소리의 주인이 27층에서부터 연우와 함께 다니던 하이디라는 이름의 엘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그녀를 믿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더구나 바람에 실려 오는 작전의 내용도 간단했다.
시간을 끌어 달라.
눈앞에 있는 분신을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그 정도라면 그도 가능했다.
그 순간, 왈츠의 원영신이 움직였다.
쿵, 콰앙-
왈츠가 수면을 으스러져라 박찼다. 진각과 함께 몸이 단단히 고정되고, 전사경의 이치에 따라 몸이 팽이처럼 돌아가면서 주먹을 앞으로 내뻗었다.
정권의 끝에서 경력이 회오리치면서 아르드바드 공작을 덮었다.
『지금이에요!』
그때, 아르드바드 공작은 품에 안고 있던 연우를 강물 아래로 세게 던져 버렸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왈츠의 얼굴에 순간 낭패감이 어렸다. 설마하니 여기서 연우를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정령……!”
왈츠는 뒤늦게 아르드바드 공작의 노림수를 깨닫고 몸을 그쪽으로 날리려 했다.
하지만.
쾅!
이번에는 아르드바드 공작이 왈츠에게 와락 달려들면서 검을 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왈츠는 두 팔을 교차시켜 검을 가까스로 막았다.
투박한 칼날이 목덜미 바로 위에 다다라 있었다.
공작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왈츠를 만나고 처음으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어딜 가시나. 그쪽은 나와 어울려야 하지 않은가?”
“감히!”
왈츠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두 눈에 불을 켜며 몸을 크게 틀었다. 내지르는 정권에서 경력이 폭발했다.
연우를 안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피하려 했겠지만. 이제 더 이상 방해될 것이 없으니, 아르드바드 공작도 몸을 크게 틀면서 숨겨뒀던 힘을 한껏 개방했다.
〈발산개세〉. 특성에서 비롯된 그의 시그니처 스킬은 압도적인 힘으로 공간마저 짓누른다. 빛무리를 잔뜩 토해 내면서 아래로 쏟아지는 검격은 왈츠도 처음으로 표정이 굳을 정도였다.
검격은 경력을 허공에서 모조리 분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간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콰콰쾅-
왈츠는 외공을 통해 단단히 다져진 팔뚝으로 검격을 막아 내다가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팔뚝에 자잘한 균열이 퍼져 있었다.
〈금강불괴〉. 웬만한 공격 따위에 꿈쩍도 않는다는 자신의 외피가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힘이란 뜻이었다.
그때, 다시 아르드바드 공작이 횡으로 검격을 구사했고, 결국 왈츠도 여기에 백보신권이라는 무학으로 맞대응을 해야만 했다.
퍼어엉!
다시 한 번 더 거친 충격파로 물기둥이 위로 치솟던 그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연우는 반투명한 구체에 둘러싸인 채, 빠른 속도로 유령선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유령선의 끄트머리에는 하이디가 서서 정령들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혔다.
가뜩이나 트리톤의 포격으로부터 유령선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을 거의 다 소진했던 마당에, 아르드바드 공작과 왈츠의 결투에서 연우를 빼내 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이디!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힘내!”
델란과 쥰은 그런 동료를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녀를 응원해야만 했다.
사실 두 사람은 하이디가 연우를 구출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크게 만류했었다.
차라리 왈츠가 나타난 이때, 그들도 트리톤처럼 해역을 몰래 빠져나가자는 의견이었다.
연우에게 종속된 식인괴인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선상에는 늙고 어린 녀석들밖에는 없으니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이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러면? 그렇게 독식자를 버리고 가면, 우리를 두고 트리톤으로 넘어가 버린 사람들과 뭐가 다른 거지?
델란과 쥰, 그리고 선상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실 92단에 의해 종처럼 부려먹히다가 버려질 예정이었던 그들을 구해 주고, 배에 태워 주기까지 했던 사람이 바로 연우였다.
비록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연우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선의였던 것이다.
상대가 선의를 보인다면, 이쪽도 선의를 보여야 한다는 게, 바로 하이디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하이디는 몸이 부서질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연우를 구하고자 애썼다.
‘난 아버지와 달라!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든 보여 줄 거야……!’
하이디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실핏줄이 잘게 터지고, 희뿌연 살갗 위로 푸른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
계속된 마력 소진으로 머리색이 빠른 속도로 탈색되어 어느새 은색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래도 연우를 이쪽으로 계속 잡아당겼다. 여러 정령들의 도움을 빌려 왈츠가 쏟아 내는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이디, 너……?”
쥰은 그런 하이디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튜토리얼 때부터 줄곧 함께했던 동료의 못 보던 모습이기도 했지만. 지금 변해 버린 외모에 대해 오래전에 얼핏들은 말이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 은발벽안의 엘프라면……. 하이 엘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을 상징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오래전에 멸망했을 텐데?
하지만 쥰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배리어에 둘러싸인 연우가 수면 밖으로 튀어나와 유령선에 다다르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됐……!”
“저, 저기!”
그때, 갑판에서 아르드바드 공작과 왈츠의 충돌을 지켜보던 델란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 안색이 편해졌던 하이디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잔뜩 굳어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괴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츠츠츠-
아르드바드 공작을 막아선 왈츠의 뒤편으로 무언가가 떠오른다 싶더니, 곧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분영(分影)〉. 원영신은 기가 응집된 형태. 당연히 통제만 가능하다면, 분리도 얼마든지 자유로웠다.
공작이 뒤늦게 아차 싶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그것은 또 다른 왈츠가 되어 유령선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돛! 돛을 펴!”
하이디는 연우가 갑판 위에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플레이어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돛이 크게 펼쳐지고, 바람의 정령들이 바람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강물을 따라 유령선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왈츠의 분신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령선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쐐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