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명계의 왕 (5)
『여긴……?』
눈을 뜬 스테로페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없이 어두운 어떤 굴레 속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는 느낌만 간간이 받고 있었을 뿐. 별다른 의식 없이 지냈던 그로서는 갑자기 찾아온 자아가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하데스는 처음으로 충격받은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혼을 저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은 그의 상식상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죽음의 신이었지만, 죽은 자를 다스리는 신이 아니었다. 특히 영혼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섭리와 법칙을 거스르는 일. 신은 순리를 구성하는 존재였지, 거스르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해냈다는 것은.
“하.”
하데스는 허탈한 듯이 옥좌에 다시 털썩 주저앉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 사이로 갖가지 갈등이 묻어 나왔다.
동시에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가를 따라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질투. 혹은 시기. 욕심도 잠깐 감돌았다.
[헤르메스가 자신의 숙부를 보며 쓰게 웃습니다.]
[아테나가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의 숙부를 바라봅니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마라. 나를 포세이돈, 그 돌대가리와 비교하는 건 내게 있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
하데스는 연우와의 채널링을 통해 조카들이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연우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려 할 경우에 대비한 경계에 찬 시선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지난 일에 대해 실수이자 과오라고 인정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힘을 다른 누군가가 잇는다고 해도 그것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굳이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헤르메스 세대의 아이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알기에. 굳이 저 눈빛들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거나 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제 성에 풀리지 않으면 죄다 부숴 놓고 마는 단순무식한 포세이돈과 비슷한 취급당하는 것이, 그로서는 불쾌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헤르메스가 자신의 숙부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아테나가 자신의 숙부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여하튼.”
하데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힘을 이렇게나 쓰고 있단 말이지? 대단하군.”
칠흑왕의 힘은 섭리를 거스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이 펼칠 수 있는 기적의 이상을 달리는 셈이었다. 대신(大神)을 훨씬 넘어선 태초신(太初神), 혹은 개념신(槪念神)의 힘. 그렇게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하데스는 고요한 눈빛으로 연우를 지켜봤다.
한편.
연우는 키클롭스 3형제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하데스와 조카들 사이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야……!』
『형, 님……?』
브론테스가 재빨리 달려가 스테로페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스테로페스는 흐리멍덩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곧 점차 초점이 잡히면서 놀란 얼굴이 되었다.
『형님!』
『그래! 둘째야. 어째서, 어째서 너까지 이런 꼴이 된 것이냐! 어째서 너까지……!』
『형님……!』
“아아!”
『막내까지!』
3형제는 서로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200년 전에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차에 이루어진 해후였기에. 그들은 제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눈물만 펑펑 쏟아 냈다. 브론테스와 스테로페스는 죽은 영혼이라 흘릴 눈물도 없었지만, 슬픔만은 강하게 느껴졌다.
“스테로페스.”
그때, 연우가 나섰다. 그도 마음 한구석이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죽은 형제들의 해후. 저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아닌가. 저 자리에 자신과 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해후를 방해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이 있었다.
스테로페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연우를 단번에 알아봤다.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나를 부른 인간이, 너로군.』
“그렇습니다.”
『섭리를 거스르고, 새롭게 섭리를 만드는 힘이라니…… 너는 ‘그’의 후예로구나.』
스테로페스는 3형제 중에서 신학을 통달한 자. 그래서 따로 현자라 불리기도 해서, 그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리송했다.
『하지만 이것도 숙운일지니. 이렇게 형제를 만나게 된 것도 인과율이 내린 명이 아니겠는가. 그래.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느끼셨겠지만, 스테로페스께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우는 타르타로스가 처한 입장에 대해서 짧게 요약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디스 플루토가 역전을 하기 위해서는 퀴네에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키클롭스 3형제가 한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스테로페스는 정좌를 하며 한참 동안 연우의 설명을 듣다가, 잠시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 말인즉, 내가 이곳에 체류를 할 필요가 있단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너에게 종속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로페스의 얼굴에 잠시 갈등이 어렸다. 신격이나 되어 한낱 인간에게 얽매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연우가 계승한 칠흑왕은 그들 형제에게도 철천지원수였다. 그런데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둘째야.』
그때, 맏이인 브론테스가 갈등 중인 스테로페스의 어깨를 짚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다. 그리고 저 아이는 그 사람이 아니지. 이미 죽은 몸이 되어 왜 굳이 과거에 얽매이려 하는 것이냐.』
『형님.』
『그리고.』
말허리를 끊은 브론테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나는 우리 형제들이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옆에 있던 아르게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척했던 그의 얼굴에는 강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두 형님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생김새가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갖가지 학대와 구박을 받으면서 살아야만 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제가 세상의 전부였다. 더 이상 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스테로페스는 두 형제의 설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심유 해진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좋다, 인간. 입발림 소리에 넘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너의 종속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테로페스는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듯, 못을 박았다.
『단, 조건이 있다. 난 사람 좋은 형님과는 달라. 스틱스 강에 맹세하건대, 만약 주인이 될 네가 이 조건들을 무시하려 한다면, 나는 스스로 영혼을 소멸시켜서라도 거부할 것이다.』
“말씀하십시오.”
『종속된 순간, 난 너의 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퀴네에를 비롯해, 정의와 질서를 위한 것에만 해당할 뿐. 만약 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연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
스테로페스는 연우를 가만히 노려봤다. 하지만 단단한 눈매는 도저히 속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알았다. 계약을 시작하도록 하지.』
결국 스테로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천천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스테로페스는 사리사욕에 자신을 쓸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몇 번씩이나 신신당부를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연우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들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울 컬렉션이 주는 제약은, 그들의 의지 따위로는 절대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번 종속 관계가 맺어지면 끝이지.’
컬렉션 한쪽 구석에서 ‘또 한 명 낚였구만. 파닥파닥’이라고 중얼거리는 샤논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했지만.
연우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 * *
계약이 끝난 뒤.
『한낱 망자의 신분에서 괴이라. 신격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몸이지만. 그래도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스테로페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게스는 영혼의 상태로나마 두 형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에 찬 얼굴이었다.
그리고.
[뛰어난 신격을 권속으로 종속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뤘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서브 퀘스트(어둠의 투구)가 생성되었습니다.]
연우는 연계 퀘스트, 페르세포네의 간절한 소망에 딸린 항목으로 분류된 새로운 퀘스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서브 퀘스트 / 흑암의 투구]
내용: 기가스의 왕, 티폰은 오랜 연구 끝에 죽은 크로노스의 신력인 시정(屍精)을 채취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성공해, 티탄과 기가스의 전력을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거신이 된 티탄은 점차 타르타로스의 하늘을, 기가스는 권속들을 양산하면서 대지를 조금씩 약탈해 타르타로스를 지배하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 수백 년간, 하데스와 디스 플루토는 패퇴를 거듭하며 마지막 주둔지인 ‘명왕의 신전’까지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명왕의 신전마저도 적들에 둘러싸여 언제 점령당할지 모르는 위기감에 잠겨 있던 중,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흩어졌던 키클롭스 3형제를 모으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디스 플루토는 전력을 증강시킬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데스의 전력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키클롭스 3형제를 도와 신물, ‘퀴네에’를 제작하세요. 신물을 완성시킨다면 하데스로부터 깊은 찬사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달성 조건:
1. ‘퀴네에’의 구성 재료 모으기
- 아포디스의 비늘(30/45)
- 카트란 액(液)(0/5)
- 침묵하는 소라(12/300)
……
2. ‘퀴네에’ 제작
- 제련 0%
- 정련 0%
- 단조 0%
- 접철 0%
……
전체 공정률 0%
보상:
1. 하데스의 호감도 +150
2. 칭호 ‘명장(名匠)’ 획득
3. 신물 ‘퀘네에’의 사용 권한
‘역시 떴어.’
퀴네에는 신물 중에서도 ‘대’자가 붙을 수밖에 없는 물건. 당연히 제작을 시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공적치와 기여도가 제공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연우는 ‘명장’이라는 칭호에 집중했다.
탑에서도 헤노바와 브라함, 빅토리아 등, 단 다섯 명만이 얻을 수 있었던 칭호. 이것을 얻을 수 있다면.
‘회중시계를 볼 수 있는 권한도 더 높아지겠지.’
탑에서 제공하는 칭호는 절대 낮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한 분야에서 업(業)을 이룬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 당연히 장인으로서 가능해지는 권한도 높아질 터였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비축된 재료가 턱없이 부족한데.’
연우는 내심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데스를 돌아보니, 그가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자조로 가득했던 입가의 미소는 어느새 냉소로 변해 있었다.
“퀴네에를 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순간, 아르게스는 하데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는지, 수척해진 얼굴이 되었다. 연우는 대충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퀴네에는 신물이니만큼 뛰어나고, 귀중한 재료들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한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다시피, 현재 우리들은 군량이며 병참이며 모든 게 부족하다. 그런 재료들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을 터. 있다 하여도 내어 주기가 힘든 상황이다.”
연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아무리 퀴네에를 제작하는 일이라고 해도 당장의 전투에 쓰일 자원까지 끌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 말은.
“제가 직접 재료를 공수해야겠군요.”
하데스는 냉소를 짓는 낯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누가 본다면 부탁하는 입장에서 오만하게 군다고 할 수도 있을 모습이었지만.
연우는 지구에서 숱하게 보았던 모습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피로를 겪을 대로 겪어, 정신이 극한까지 마모된 자들. 그래서 반쯤 자포자기가 되어 늘 비관적인 어조와 냉소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끈을 놓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하데스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퀴네에가 만들어진다면 좋을 일이다. 하지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말해 두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티탄과 기가스는 언제라도 덤빌 준비를 하고 있고, 크로노스의 시정은 거의 바닥을 보여 가고 있지. 그 안에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연우의 눈이 빛났다.
“아니. 해야죠.”
하데스의 한쪽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여태껏 보였던 냉소와는 또 다른 일면. 투지를 불사르는 전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크로노스와 일전을 치를 때의 모습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좋다. 건승을 기원하지. 칠흑왕의 후예여.”
그리고.
팟-
시커먼 빛무리가 터지면서, 연우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었다.
[하데스의 권한으로 히든 스테이지, ‘타르타로스’의 시련이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칭호 ‘하데스의 대리인’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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