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22화 (322/862)

22화. 붕우 안서 (7)

“아나스타샤?”

당혹스러운 연우의 기색을 느낀 걸까. 프레지아가 의외라는 눈빛을 폈다.

『여우…… 아니, 아나스타샤를 알고 계신가요?』

여우라. 구미호의 혼령이 맺혀 있던 아나스타샤를 가리키는 말로 그것만 한 게 없는 것 같기는 했다.

빅토리아의 스승, 아나스타샤. 처음 빅토리아가 걱정되어 찾아 갔던 곳에서 만났던 그녀는 요기와 주술을 부리며 살벌하게 말했었다. 앞으로 찾아올 생각은 꿈에도 말라고.

그때 느꼈던 위압감은. 분명 깊이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의 제자가 한때 사두였었군요. 철사자의 자제분도 있었고. 그럼 그때?』

“예.”

프레지아는 재미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그래도 그녀만큼 세간에 노출이 안 된 사람도 잘 없는 편인데. 그런 그녀와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니. 이제 막 30층대에 진입할 플레이어치고는 대단하군요.』

“인연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할 것까지는 못 됩니다.”

『하긴. 그녀의 경계심이 유달리 강하긴 하죠. 그러면서 뒤로는 별의별 엉큼한 짓을 다 하기도 하고요.』

프레지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하튼 거래는 이것으로 종료 되었어요. 저희도 이제 아나스타샤와의 거래를 사실상 종료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 이 뒷일은 알아서 하셔야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무엇을. 다 셈이 맞으니 하는 것을요.』

프레지아는 그 말을 남기고 홀로그램을 종료시키려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연우를 보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또 남았습니까?”

『율이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하더군요. 조만간에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 그때 뵙도록 해요. 물론, 타르타로스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야겠지만요.』

율. 반가운 이름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거쳐야 할 수고가 있으시겠지만…… 부디 잘 해내시길 빌어요.』

프레지아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연우도 조용히 옥경을 거두는데.

“나…… 혹시 잘리는 건 아니겠지?”

마스터의 제자가 곧 찾아올 거란 소식에, 아트란은 이번 일을 꼬투리 잡혀 자신의 고객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 * *

연우는 탑 외 지역에 위치한 환락가를 찾았다.

‘그때 그곳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지아도 아나스탸사가 머무는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고 했다. 워낙에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알아내기가 힘들다던가. 거래를 할 때에도 언제나 조심스 럽게 움직인다고 했다.

그래서 연우는 무작정 처음 아나스타샤를 만났던 곳을 찾았다. 비록 그때 대결로 인해 지붕이 날아가고 말았지만. 그곳을 중심으로 수소문을 하다 보면 행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저 사람?”

“어. 저 가면…… 독식자 같은데?”

이전과 다르게 연우에게 달라붙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연우의 행색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탑의 세계에서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여섯 신성, 아니, 이제는 다섯 신성으로 줄어든 루키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놓인 자.

그가 지나는 자리에는 항상 태풍이 일어난 것처럼 쑥대밭만 남는다고 하여, 걸어 다니는 재앙으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물은 그새 복구가 완료되었는지, 여러 매춘부들과 그녀들을 사려는 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연우가 나타난 순간, 거짓말처럼 싹 빠져나가 사라졌다.

졸지에 손님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자, 건물 안에 있던 총책임자가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다 사다 바치면서 드디어 거사를 치르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다급한 수하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오던 차였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서 바지가 반쯤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연우를 보자마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오래전에 있었던 소동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때 받았던 손해를 떠올리면 지금도 살이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또 나타날 줄이야.

“아나스타샤, 있나?”

“어, 없……!”

연우는 마장대검을 뽑아 그대로 측면으로 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단절되면서 지붕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졸지에 바깥 야경을 구경하면서 일(?)을 치르겠다고 높은 층에 올랐던 손님과 매춘부들은 기겁해 하며 후다닥 몸을 숨겨야 했다.

“없군.”

연우는 곁눈질로 안쪽을 살피고 다른 곳으로 몸을 돌렸다.

지붕이 또 날아간 모습에 반쯤 영혼이 빠져나갔던 책임자는 다급하게 연우를 붙잡았다.

그가 알기로 연우는 절대 이 정도 선에서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괜히 ‘걸어 다니는 재앙’ 이니, ‘젊은 시절 무왕의 재림’이니, ‘인성 파탄자’니 하는 별명이 뒤따라 붙는 게 아니었다.

“무, 무엇을 하시려고?”

그런데 오히려 연우의 목소리가 질문형이었다.

“너야말로 뭘 하고 있는 거지?”

“예?”

“어서 찾지 않고.”

“……?”

“안 그럼 앞으로 장사 힘들어질 텐데.”

연우는 그 말만 하고 옆에 있던 사창가 건물 쪽으로 마장대검을 휘둘렀다.

콰콰쾅!

폭발 소리와 함께 또다시 지붕이 날아갔다.

건물이 부서질 듯 크게 흔들리자,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 손님이며 매춘부들, 종업원들이 바쁘게 뛰어나왔다.

“여기도 없군.”

「캬! 하는 짓이 자기 스승이랑 똑같다니까, 완전히!」

「확실히 위치를 찾을 수 없으면 전체를 흔들어 놓는 게 좋긴 하겠지요.」

연우는 다시 다음 건물로 이동했다.

“샤논.”

「왜?」

“요즘 들어 깐족대는 횟수가 좀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

「헤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주인님의 착각이십니다요.」

연우는 굽실대는 샤논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도 가벼운 모습은 있었지만, 그래도 진중한 편이었는데. 어째 갈수록 이렇게 경망스럽게 변해 가는 건지. 하지만 그만큼 정서적으로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단 뜻이었으니, 어떻게 터치할 건 아니었다.

쿠쿠쿵, 콰쾅!

그렇게 건물이 하나둘씩 무너질 무렵.

책임자와 각 건물의 주인들, 그리고 암흑 클랜의 관계자들은 어쩌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연우의 뒤만 따라다니다가, 뒤늦게 연우가 뭘 하려는 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연우는 환락가에 있는 건물들을 모조리 부숴 놓을 참이었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환락가의 거주민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한 큰손이었고, 일이 없을 때면 1년 중 대부분을 이곳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건물들을 하나하나씩 부수면서 소란을 일으키다 보면 언젠가 아나스타샤가 나타날 것이라고 여긴 거겠지.

그리고 환락가의 주민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거리가 죄다 박살 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아나스타샤가 있는 곳을 찾아 내라고 말이다.

콰쾅!

“으아아!”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아나스타샤 님을 찾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그들의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은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생계를 위협하는 힘 앞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건물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부서지면서, 약쟁이들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매춘부들은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던 중.

“대체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야!”

갑자기 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막대한 기압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비명을 꽥꽥 질러대던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헛바람을 들이켜며 딸꾹질을 했다.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거친 맹수가 그들 앞에 놓이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요기가 가득 섞인 요력(妖力). 일반 플레이어들은 감당하기 힘든 힘이었다.

연우도 칼질을 멈추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5층 규모의 카페 지붕 위. 아나스타샤가 짜증 섞인 얼굴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자다가 일어난 건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옷은 두루마기 상의만 걸쳐 그 아래로 나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다급하게 뒤따라온 미동이 재빨리 천으로 아래를 가렸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도 불편했던지 인상을 더 찡그리면서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러다 연우를 발견했다.

“애송이, 이것들, 네가 한 짓이냐?”

아나스타샤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즐거운 단잠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미동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약에 취한 채로 잠에 빠져드는 것은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는 유일한 활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로 자신의 단잠을 깨웠으니 화가 날 수밖에.

“아나스타샤.”

“날, 알아? 그러고도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는 자신을 전혀 모른다는 투가 아닌가. 그래서 뭐냐고 반문하려는데.

“아나스타샤 님.”

천을 가져왔던 미동이 아나스타샤를 조심스럽게 부르면서 귓가에다가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아나스타샤도 연우가 누군지를 깨닫고, 요력을 돌려 약과 잠에 반쯤 취해 있던 정신을 멀쩡하게 되돌려 놓았다.

“너, 그때 빅토리아를 찾아왔던 그놈이로구나. 정말이지…… 인간들의 낯은 구분하기가 어려워.”

아나스타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낯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내가 그때 분명히 다시는 낯짝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텐데?”

“이번엔 빅토리아를 찾아온 게 아니라서.”

“그럼?”

『아다만틴 노바. 당신에게 있지?』

연우는 보고 있는 눈이 많아 어기전성으로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어떻게…… 그럼 네가 그 귀찮게 굴던 놈의 주범이었구나.”

아나스타샤는 계속 귀찮게 달라붙던 아트란을 떠올리고, 인상을 더 크게 구겼다.

“아니, 그보다 내가 그걸 갖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히 비밀이었을…… 늑대, 그년이 날 팔았구나!”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잔뜩 성을 냈다.

“하여간 이래서 천한 장사치들은……! 신뢰니 뭐니 입발림 소리만 해 댈 줄 알았지.”

아나스타샤는 다음에 프레지아를 만나게 되면 이 일을 단단히 따지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정보가 외부에 제공되는 것만큼 불쾌한 것도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단단히 꼈다. 매듭을 묶지 않은 두루마기 사이로 속살이 보였지만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는 투였다.

“돌아가.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 물건을 팔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단 거지?”

아나스타샤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오만한 눈빛으로 연우를 깔보았다. 그녀에게 아다만틴 노바는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연우는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스르릉-

마장대검을 허리띠에 찔러 넣고, 천천히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뽑았다. 그를 따라 살벌한 투기가 조금씩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휘휘휘!

“뭐지? 말로 안 되면 무력이라도 불사하겠단 건가?”

아나스타샤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연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고얀!”

아나스타샤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화아악!

좌중에 뿌려졌던 요력이 끓기 시작했다. 새하얀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고, 곳곳에 푸른 여우불이 붙으면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뒤편으로 거대한 여우의 환영이 나타났다. 체고가 6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여우. 아홉 개의 꼬리를 활짝 펼치니 위압감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연우도 막대한 투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권능들이 차례대로 풀리고, 용체 각성이 이뤄지면서 용의 비늘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불의 날개와 용의 날개가 섞이면서 하늘 높이 치솟고, 용의 꼬리가 바닥을 거세게 두들겼다.

특히 비그리드로 아나스타샤를 적수로 지정한 순간, 막대한 투기와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으니.

두 하이 랭커가 일으키는 기세가 거친 지진을 일으켰다.

쿠쿠쿠, 콰콰콰-

지축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강풍이 휘몰아치면서 비교적 멀쩡했던 환락가의 건물들이 죄다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주민들이나 암흑가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지만, 어떻게 따지지도 못하고 도망쳐야만 했다.

그렇게 환락가가 모조리 쓸려 나가는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멍청한 제자의 벗이라 어떻게든 용서해 주려 했지만. 오냐. 죽고 싶다면, 죽여 주마.”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크게 튕겼다. 그러자 주변을 어지럽게 맴돌던 여우불들이 일제히 기괴망측한 모습을 가진 마물과 요괴가 되어 일제히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여기에 맞춰, 연우의 그림자도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괴이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길쭉한 손톱에 저마다 잔독혈을 품은 녀석들은 마물과 요괴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하였고, 뒤따라 나타난 샤논과 한령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연우의 머리 위로 실선이 그어지면서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나타나 아나스타샤가 흘려 대던 요력을 물리치기 시작했으니.

고오오오-

어마어마한 기세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쾅!

연우는 으스러져라 지면을 밟으면서 아나스타샤에게 달려들었다.

거래가 안 된다면 힘으로라도 빼앗아야 한다.

어쩔 수 없었다. 아다만틴 노바가 있어야만 퀴네에를 제작하고, 회중시계의 봉인을 풀 단서를 얻을 수 있으니.

여기서 물러난다면? 언제까지,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어딘가에 갇혀 있을 동생의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도 저히 시간을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비그리드를 휘둘렀다.

불의 파도가 폭발했다. 여러 개의 벼락이 잇달아 아나스타샤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히면서 연거푸 폭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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