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차정우 (1)
『퀴네에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준 것,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네.』
브론테스는 연우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 동안 미묘한 갈등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브론테스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구원의 동아줄을 가져온 사람이 연우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
연우가 이렇게 나서지 않았더라면. 키클롭스 3형제가 다시 한자리에 모일 수도, 퀴네에를 완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 형제들에게도, 타르타로스에게도. 연우는 은인이었던 셈이었다.
『나 역시.』
“동감일세.”
스테로페스와 아르게스가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크기가 수 미터나 되는 단안기형의 괴물들이 그러니 뭔가 어색했다.
『그러니 무엇이든 시켜만 주시게. 따르도록 하지.』
“말씀드렸지만, 이건 거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 조건은.”
연우는 잠시 말을 끊으면서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브론테스의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
『그것의 봉인을 푸는 것이었지?』
“예.”
『잠시 이리 주겠나?』
연우는 회중시계를 브론테스에게 조심히 건넸다.
[대상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대상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
[‘용신안’의 권한으로 대상의 정보 파악을 재시도합니다.]
[일부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과를 표시합니다.]
[헤븐윙의 회중시계]
분류: ???
등급: ???
설명: 헤븐윙 차정우가 남긴 회중시계. 루시엘의 영혼석, ‘오만(Superbia)’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안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여전히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용신안은 여태 연우가 수없이 도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결과를 노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오만의 돌로 만들어졌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영혼석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숙련도를 더 높인다면 영혼석을 분석할 수도 있게 된다는 뜻이니까. 첫 단계가 어려울 뿐이지, 그다음부터는 진행이 쉬웠다.
『이 돌에 대해서는 얼마나 파악하고 있나?』
“7대 죄악의 오만을 성질로 띠고 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브론테스가 조금 놀란 눈이 되었다.
『벌써 그것까지 파악했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말했듯이 루시엘이 죽으면서 남긴 영혼석은 모두 14개. 선악 개념으로 분류되어 각각 7대 주선과 7대 죄악으로 불리지. 그리고 각 영혼석은 불리는 명칭마다 특징이 다 달라. 우리가 사용한 태초의 불은 ‘순결’하기 때문에 신물을 제작할 수 있었던 걸세.』
연우는 비에라 듄을 대지모신으로 만들어 준 영혼석의 명칭은 무엇일까 잠깐 궁금해졌다.
언뜻 짚이는 명칭은 있었다.
색욕(Luxuria).
『반면에 오만은 모든 것을 압도하지. 고고하고, 드높고. 또한 단단해서 절대 굽히는 법을 몰라. 잘 부서지지도 않으니 뭘 숨기기엔 아주 제격인 셈이지. 돌 위에다 회중시계를 덧씌운 형태인 것 같은데. 이것을 제작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기예가 아주 깊군.』
“뭘 숨기려 했던 것 같습니까?”
브론테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만든 사람만이 알겠지. 다만.』
“다만?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봉인이 완전하지 않고, 한 곳에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조건이 걸린 듯싶네. 특정 조건하에서만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짚이는 게 있었다.
일기장.
『그러니 봉인을 해제하려면 바로 이 지점을 주로 공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애당초 이 시계를 만든 사람이 마음을 먹었다면, 안에 든 물건은 영원토록 단단히 봉인을 시켰을 걸세. 그런데도 구멍을 내놓은 것은 언젠가 봉인을 풀어 달란 뜻이라네.』
브론테스의 눈이 빛났다.
『열쇠 구멍이란 뜻이지.』
* * *
‘열쇠 구멍.’
연우는 화로 앞에 앉아 회중시계를 손으로 매만졌다. 화르륵, 화로가 불을 내면서 따스한 온기를 내보내 주었다.
-그리고 사실 탁 터놓고 말하자면. 나는 이 봉인을 풀 자신이 없네. 아니, 풀 수 없다는 말이 옳겠군. 여태껏 영혼석의 비밀을 풀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영혼석을 가진 모든 이들이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했었겠지.
헤노바는 말했었다. 어쩌면 키클롭스 3형제라고 해도, 봉인을 완전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이 정확했던 셈이었다.
-그래도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법이니. 일단 여기에 대해서 가르쳐 줌세.
-다만, 열쇠 구멍에 들어갈 열쇠가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봉인을 정말 풀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게 아쉽긴 해.
연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열쇠 구멍.’
그것은 분명 일기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정답은 금방 나왔다.
‘나.’
동생은 일기장을 남기면서까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했다.
클랜 하우스까지 와서 엘릭서를 가져가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단순히 그게 전부라고 하기에 일기장에는 여러 마법적 장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오랜 연구 끝에 발견한 여러 히든 피스들. 각 층계의 공략 방식. 스킬 트리 등등.
단순히 엘릭서만 가져가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엔 너무 방대한 자료들이었다.
더군다나 일기장은 끝마무리가 어설펐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는 듯이.
‘역시 일기장의 진본을 찾는 수밖에 없겠어.’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영혼석의 구조나 기초적 특징에 대해서는 브론테스에게서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자신이 찾아야 했다.
‘일단은 열쇠 구멍부터.’
연우는 회중시계 안쪽으로 마력을 밀어 넣었다. 회중시계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시침이 혼란스럽게 흔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예전에는 정말 부서질 것 같아 더 많은 마력을 쏟아부을 수가 없었지만.
회중시계가 영혼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제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뱅그르르-
회중시계가 손바닥 위에서 둥실 떠올라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마력량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실내를 따라 강풍이 불다가, 끝내 마력 폭풍이 일어났다.
쿠쿠쿠!
연우가 있던 대장간이 크게 들썩거렸다. 누군가 본다면 전쟁이 벌어졌다 착각할 정도로 거친 지진이었다.
화로 속의 불길이 크게 출렁거리고, 벽에 걸렸던 갖가지 무구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모루가 한쪽으로 쓸렸다. 대기가 이리저리 휘어지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벌……!”
밖에서 브론테스 등과 이야기를 끝내고 연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헤노바 등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연우를 중심으로 마력 폭풍이 거세게 일면서 모든 것을 부숴 나가고 있었으니.
이대로 있다가는 대장간뿐만 아니라, 하데스의 신전도 같이 날아갈 판국이었다. 성역 한가운데에 커다란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다.
브라함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헤노바를 곧바로 뒤로 잡아당기면서 연우를 따라 심상 결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도 재빨리 여기에 손을 얹었다.
마법진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결계가 중첩되고, 연우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유리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연우는 회중시계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인의 눈]
고룡 칼라투스의 눈이 열리면서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여기에 아수라왕 비마질다라의 눈까지 더해지면서 회중시계를 이루고 있는 표층을 계속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모든 의념이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표층을 계속 벗겼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회중시계라는 겉면을 넘어, 여러 톱니바퀴를 지나, 그 속에 담긴 핵까지 다다랐다.
영혼석이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성하게 보이기도, 불길하게 보이기도 하는 광채.
광채는 영혼석을 따라 감돌지만, 한쪽 지점에서 발원하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아주 미세한 구멍.
열쇠 구멍이었다.
연우는 의념을 그쪽으로 밀어 넣었다.
찰칵-
착각인지 모르지만. 연우는 왠지 모르게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열쇠가 알맞은 열쇠 구멍에 맞물려 들어갔을 때 나는 소리. 그리고 열쇠를 완전히 돌려 그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을 때.
“……!”
연우의 의식이 구멍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루시엘의 영혼석(오만)’과 연결되었습니다.]
[동기화가 이뤄집니다.]
영혼석의 내부는 망망대해였다.
외부를 따라 흐르던 보라색 광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나 많은 양의 광채가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양.
그것 하나하나가 전부 마력이었다.
신력이었고, 마기였고, 용력(龍 力)이었다.
또한, 요력이었으며, 영력이었고, 주력(呪力)이기도, 술력(術力)이었다가 법력이기도 했다. 그러다 원기로 변하면서 내공이 되기도 하는 등 다시 다른 다양한 성질을 뗬다.
탑의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운들이었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기운. 어디든 수용이 가능하고, 삼킬 수도 있었다.
그런 기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끝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이게…… 루시엘의 영혼인가?’
연우는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을 잡아먹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무한하고 무궁무진한 기운을 다룰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그리고 영혼석 하나만 해도 이만한 힘을 품고 있을진대. 14개가 모두 모인다면? 신과 악마들이 두려워할 법도 했다. 어째서 루시엘이 신과 악마들의 타깃이 되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든 치워야 할 것 같다는 건데.’
연우는 너무 많은 양의 기운을 보면서 잠깐 고민에 잠겼다. 여기에 대해서 브론테스가 했던 당부도 있긴 했다.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은 아주 천천히 뽑아내는 수밖에 없네. 태초의 불도 바로 거기서 뽑아낸 것이니.
-하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말게. 그랬다가는 기운이 폭발하고 말 테니까. 신화 속의 루시엘처럼 아주 사납거든. 모든 과정이 아주 정교하게 이뤄져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자네도, 여기 있는 우리들도 모두 다쳐.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어. 빼낸 기운을 어디다 담아야 하냐는 것이지. 순결은 화로라는 매개가 있지만…… 오만은 모르겠네. 어떤 게 될지. 그리고 담는다고 해도 그 전부를 수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순결의 돌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디스 플루토에 태초의 불을 제공해 줄 정도로 방대한 양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기운을 뽑아낸다고 한다. 키클롭스 3형제도 화로로 쓰는 게 전부일 뿐, 돌을 온전히 다룰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만의 돌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브론테스는 바로 이 점을 우려했다.
오만의 돌에 새겨진 열쇠 구멍을 찾고, 어떻게 열쇠를 넣어 문을 열어젖힌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있을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숨겨져 있을 봉인을 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키클롭스 3형제가 모르는 게 있었다.
‘현자의 돌.’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심장이라면. 어떻게든 영혼석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연우는 문득 현자의 돌에 잠들어 있는 마성이 떠올랐지만.
일단은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자칫 마성에게 막대한 힘을 실어다 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테지만.
현자의 돌에 영혼석의 기운을 모두 담을 수 있다면 반대로 자신 역시 그만큼 괄목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단 뜻이었다.
‘요즘 들어 하급 악마 정도로는 동력원으로 부족하다 싶었던 참이었으니.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동력원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브론테스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순결의 돌에서 태초의 불을 추출해 내듯이, 오만의 돌에서 보라색 기운을 천천히 뽑아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의 심장 옆에 자리 잡은 현자의 돌 쪽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후후. 재미난 짓을 하는군.
어디선가 마성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