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대전쟁 (2)
“……아버지.”
도일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라퓨타를 찾아온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칸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5분 전. 한창 엘로힘을 공략하기 바쁘던 순간, 갑자기 허공에 포탈이 맺히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강하를 시도했다.
라퓨타에 내장된 방호 마법 장치들이 작동하며 침입자들을 쫓아내고자 했지만.
아직 라퓨타는 완전한 수리가 이뤄지지 않아 보호막과 결계의 내구도가 많이 약한 상태였다.
하물며 마군의 주교 급이나 되는 인사들이 함께 공략을 시도했으니, 막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침입자 무리의 선두에 있는 이는 도일과 칸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블랙 스컬.
도일의 친부이자, 마군의 삼주교.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 되기 위해서 ‘그릇’이 필요하다는 대주교의 말에, 기꺼이 도일을 가져다 바친 존재이기도 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들아.”
빅토리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절대 반가울 수 없을 두 부자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작게 입술을 달싹이면서 마력을 유동시켰다. 여차하면 곧바로 마법을 퍼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 돼. 지금은 아니야. 기다려, 누이.』
칸이 빅토리아에게 어기전성을 보냈다. 빅토리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칸은 굳은 표정 그대로 고개를 미미하게 가로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 빅토리아의 마음이 조금 복잡해지던 그때.
블랙 스컬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도일을 보면서 소리쳤다.
“위대하신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 될 기회를 버리다니. 그걸로도 모자라, 배교(背敎)라니!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아비의 억장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아느냐?”
이미 블랙 스컬은 도일이 천마와의 채널링을 끊고, 연우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일은 그런 친부의 표정이 가증스럽다는 듯, 고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웃기지 마십시오. 아버지에게 그런 애정 따위 사라졌다는 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블랙 스컬은 천적을 만난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만 세우는 아들을 못내 슬픈 표정으로 보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구보다 두 부자지간의 사연을 잘 알고 있는 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역시 빅토리아처럼 여차하면 블러디 소드를 뽑을 생각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했다.
연우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속박하고 있다고 말했던 아버지, 아이반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꺼내 줄 테니.
-거기에 계속 있으면…… 다치지는 않나?
-시간이 전혀 다르게 흐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현재는 혼수상태이니 자신이 갇혀 있단 사실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고.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보겠어.
철사자 아이반과 블랙 스컬. 욕망에 눈이 멀었던 두 아버지 때문에 그들이 받아야 했던 상처는 얼마나 컸던가.
그런 어린 시절의 상처는 이제 트라우마가 되어 때때로 그들의 목을 옥죄었다. 어떻게든 굳게 다짐하며 떨쳐 내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지금 맡고 있는 일이 바쁘니 전투가 끝나면 아이반을 만나겠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그때 가서도 과연 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물며 뜻하지 않게 이렇게 아버지를 만난 도일이 받을 충격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나마 자신이 옆에 있고, 배후에 연우가 있어 심적으로 많이 안정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칸은 오랫동안 도일의 형으로 있었기에, 도일이 겉보기와 달리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짙은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도.
‘여차하면 바로 뒤를 친다.’
칸은 엘로힘에 계속 휘몰아치는 연우의 파장을 느끼면서. 조용히 녀석들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로힘이 붕괴된 이때. 그 뒤의 적이 누군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 * *
“하하! 개판 오 분 전이로군. 뭐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하나도 없어.”
궁무신 장웨이는 하늘을 따라 번져 나가는 거센 화염 폭풍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정말이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림자는 그나마 남아 있는 생존자들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탑에서 평생 한 번 보기도 드물다는 초월자들 간의 대결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본 드래곤이 저주 섞인 숨결을 내뱉으며 이상한 화신과 격전을 벌이고, 다른 쪽에서는 신과 악마의 군단이 서로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장웨이는 지구에서나 탑에서나 자신은 절대 전장을 떠날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장이 있는 곳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고!’
아르티야가 엘로힘-마군 연합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클랜 하우스를 움직였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장웨이는 드디어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뿔부족을 피해 숨어 있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했고, 한창 아르티야가 격전을 치르고 있을 때만큼 좋은 시기도 없었던 것이다.
연우가 독식자라는 가면을 쓰며 오랫동안 탑을 기만했듯이.
자신도 궁무신이라는 허울을 쓴 채로 연우를 기만하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때.
연우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구에 있을 때부터 감정을 크게 드러낸 적 없이 무뚝뚝하게만 굴던 연우였는데.
그래서 다국적군 본부에서도 작전을 시행할 때면 꼭 사람 같지 않다고 해서 붙인 코드 네임이, 성경 속 첫 살인자인 ‘카인’이었는데.
연인이었던 자신의 누이가 그렇게 눈을 감았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만큼 철면피였던 작자였는데.
그 얼음장 같은 얼굴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아니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지,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장웨이는 어깨에 매달고 있던 사일동궁(射日形弓)을 풀어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휘휘휘!
처음 탑에 왔을 때, 아무것도 몰라 버벅대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뻗어 주었던 이예의 신력을 맘껏 풀었다.
그리고.
팟-
연우의 기운이 일렁이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도록.
아주 은밀하게.
* * *
[00:00:57_35]
타이머는 지금도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연우는 그 안에 베이럭을 감싸고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흔적부터 전부 지워야겠다고 판단했다.
“죽어어어!”
베이럭은 피투성이가 된 채, 갈라진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몰골로 소리를 질렀다.
한평생 연금술사로서 격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던 그로서는 지금의 고통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는 곧 기어 다니는 혼돈의 축복을 받아 신화(神化)를 이뤄야만 하는 몸.
한낱 재료밖에 되지 않는 필멸자 따위에게 이딴 수모를 겪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휘리릭-
베이럭의 몸뚱이에서부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촉수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촤르륵!
연우는 자칫 촉수에 감기겠다 싶어 하늘 날개로 해를 치면서 베이럭과 거리를 띄우는 한편, 쇠사슬을 안쪽으로 잡아당겨 촉수를 모조리 잘라 내고자 했다.
촤촤, 촤촤촤-
가지치기하듯이 비그리드의 칼날에 촉수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하지만 피질을 따라 기운이 흐르면서, 잘린 부위에서는 곧 훨씬 더 튼튼하고 두꺼운 새 촉수가 돋아났고, 잘려 나간 부분도 땅에 닿자마자 단숨에 뿌리를 박으면서 더 많은 촉수를 뽑아 올려 휘둘렀다.
연우는 그림자와 망령을 끌어와 망자의 벽을 두껍게 세우면서 촉수들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놈! 네놈만큼은 살아도 절대 살지 아니한 것만 못하게 만들 것이다!”
베이럭은 이제 연우가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상체를 일으키면서 크게 포효했다.
반쯤 부서졌던 얼굴도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금세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자존심은 복구할 길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연우를 잡아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촉수가 다시 세 배나 불어나며 대지를 뚫고, 하늘을 덮었다.
하지만.
[시차 괴리]
연우는 한껏 느려진 세상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덮치려 하는 촉수들의 사이사이를 읽고, 약점을 빠르게 판단하고자 했다.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인의 눈]
덕분에 그는 최단 시간 안에 촉수의 세례를 통과할 루트를 찾았고, 그 너머에 있을 결의 응집체도 발견할 수 있었다.
베이럭의 오른쪽 어깨 위.
‘핵.’
[바람길 - 광풍]
콰아앙!
길이 보인다면 곧바로 움직여야 한다.
지면을 거세게 밟자, 거친 바람이 일어나면서 연우를 앞으로 빠르게 밀었다. 베이럭의 촉수들이 그를 잡기 위해서 후두둑 아래로 쏟아졌지만, 그 어느 것도 연우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도리어 쇠사슬이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면서 여러 촉수를 한 다발로 묶거나, 궤도를 틀게 만드는 등 기상천외한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팔괘검의 팔대 비기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무결참을 이룬 덕분에, 이미 연우는 병기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진인의 영역을 밟았던바.
오히려 이런 기병(奇兵)이 다양한 투로를 만들 수 있어 그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흡!”
콰직!
베이럭은 눈 깜짝할 새에 연우가 다가오자 다시 저항을 시도했다.
웬만한 아티팩트쯤은 쉽게 녹일 수 있을 만큼 지독한 산성을 띠는 점액질을 쏟았지만, 비그리드는 너무나 손쉽게 독을 가르며 녀석의 우측 어깨에 박혔다.
빠각! 오른쪽 어깨가 떨어질 것 같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핵에 비그리드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베이럭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고작 이 정도 충격으로 부서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상하게 신력이 꿈쩍도 않았다. 아니, 신력이 다른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비마질다라가 흡족하게 전쟁을 굽어 살핍니다.]
[검은 구비타라 - 피의 꽃]
우측 어깨에 맺힌 혈화(血花)가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을 맹렬한 속도로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빼앗긴 신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거기다 검은 불꽃도 혈화 위로 번지면서 그의 육체를 사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이럭은 소리를 지를 겨를도, 저항을 할 겨를도 없었다. 어느새 쇠사슬이 그의 어깨와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촤르륵, 촤륵-
철컥!
“컥, 커커컥!”
쇠사슬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베이럭의 팔뚝을 감는 것은 물론, 단숨에 몸뚱이를 타고 넘어가 목에다 똬리를 틀었다.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단단히 옥죄어지면서 컥 하고 숨이 저절로 막혔다.
촤르르륵-
쇠사슬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베이럭의 몸이 통째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마치 처형대에서 교살(紋殺)을 하기 위해 줄에다 목을 매단 것 같은 형국이었다.
베이럭은 어떻게든 쇠사슬을 풀고 싶었지만 도통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단말 역할을 해 주던 마핵이 쪼개지면서, 신력이 통제력을 잃고 물 새듯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신력을 제어하려고 해도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머릿속이 새하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뇌리에 남은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욕구뿐.
하지만.
스걱, 스걱-
연우는 베이럭을 절대 놓지 않기 위해 위쪽 쇠사슬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한편, 아래쪽 쇠사슬을 잡아당기면서 비그리드를 도로 뽑아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면서 녀석의 남은 촉수와 팔다리를 빠른 속도로 잘라 나갔다.
불에 탄 촉수가 이리저리 꿈틀 대면서 어떻게든 재생을 시도했지만, 복구는 이뤄지지 못했다. 뿌리까지 스며든 불길이 남은 신력의 잔재마저 태웠다.
“으어어…….”
베이럭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정말이지 고통스러워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목이 졸리며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불이 체내로 스며들어 몸뚱이가 익어 가는 고통. 팔다리가 잘리는 고통. 신력이 폭주하는 고통. 제어를 잃은 독이 시시각각 몸을 좀먹어 가는 고통…….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적 고통이란 고통은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통각을 통제하려 해도, 연우는 귀신같이 새로운 자극의 고통을 그에게 선사했다.
연우는 무왕에게 무공을 배우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신체의 구조는 물론, 혈(穴)과 맥(脈) 같은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해박한 상태였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베이럭이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리저리 쓸려 나간 끝에 남은 것은 머리통과 반쯤 부서지다시피 한 상반신뿐.
분명 방금 전까지 엘로힘을 집어삼키려 하던 촉수들은 모조리 가죽 벗기듯이 벗겨져 제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문제는 완전한 정지가 아니라는 점. 신력이 일부 남아 있어 죽고 싶어도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불사의 권능이, 지금은 도리어 저주가 되어 베이럭을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크르륵, 크륵…… 차라리…… 죽여…… 줘……!”
베이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죽여 달라며 애원했지만.
“고작 이따위로 아프다고 질질 짜는 거냐? 우습군.”
연우는 도리어 코웃음을 치면서 차갑게 웃었다.
“네 머릿속에 든 정보와 지식을 전부 다 토해 낼 때까지,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뒤에는 깊은 골방에서 실험체로 쓰일 거고. 타계의 신에 감염된 육체는 탑에서도 아주 보기 드문 실험 재료가 될 테니까.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아주 많거든.”
브라함이나 부에게 녀석을 던져 주면 아주 좋아하지 않을까? 브라함에게는 귀한 연금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육체를, 부에게는 새로운 마도 지식을 추가할 수 있는 영혼을 던져 줄 참이었다.
녀석은…… 쉽게 죽지 못할 테고, 죽어서도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할 생각이었다. 자아를 잃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다시 살려 낼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힘들다는 말 따윈 하지 마라. 정우는 이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베이럭이 당한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전부였지만, 동생은 동료를 떠나보내고, 배신까지 당했던 정신적인 고통도 전부 감내해야만 했으니까.
“너…… 설, 마……?”
베이럭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는지, 두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녀석의 발치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위로 길쭉하게 올라오면서 녀석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당분간 산 채로 어둠 속에 유폐시켜 정신마저 메마르게 해 버릴 참이었다.
[00:00:09_59]
어느새 베이럭이 사라진 자리에는 반쯤 쪼개지다시피 한 마핵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역시나 불길한 기운을 마구 뿜으면서.
연우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마핵에다 손을 뻗쳤다.
엘로힘-티탄, 베이럭이나 대지모신, 기가스들도 문젯거리였고, 여전히 밖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전부 무대 위에 올려진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할 뿐, 진정한 조종자는 따로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녀석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손끝이 마핵에 닿는 순간.
화아악!
연우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멈추는 것을 느꼈다. 시차 괴리를 써서 의식 세계를 빠르게 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세상이 ‘정지’하고 있었다. 9초 59. 마핵에 손이 닿았을 때 그대로 타이머도 정지 상태였다.
그 어떤 신격들도 해내기 어려운 전능(全能)의 영역이 발휘된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공간 위로 먹물을 뿌린듯이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물들었다. 연우가 뿌리던 칠흑과는 궤를 달리하는 어둠이 주변을 감싸 안으면서.
그 사이로. 어떤 거대한 존재가 어둠을 울렁이면서 눈을 떴다.
너. 는. 누. 구. 냐.
그것은.
분명히 연우를 정확하게 직시하면서 그렇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