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73화 (473/862)

23화. 흡혈군주 (5)

“암굴이 무너져? 그것도 야네크의……?”

다시 긴급 소집된 중앙 관리국의 회의에서, 최고 관리자들은 처음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이블케만 고요하게 웃고 있을 뿐. 국장 클루스는 손으로 안면을 덮으며 침음을 흘렸고, 다른 최고 관리자들은 섣불리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보고를 하고 있는 타넥은 먼지를 뿌옇게 뒤집 어느 거지의 몰골을 하고 있어, 그들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웬만한 사건으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스테이지가 붕괴되는 사고도 가볍게 웃어넘기던 그들이었지만.

이번 사안은 결코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야네크의 암굴은 그만큼 중앙 관리국에서 중요하게 다루던 장소였다.

‘암굴’이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에 정확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만든 위장막일 뿐. 혈루석과 혈정을 채굴하는 것도 블러핑에 불과했다.

그 정체는 바로.

‘타계 신의 사체.’

그것도 그저 그런 타계의 신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탑이 생성되기도 전에 천마와 겨뤘다가 쓰러진 타계의 신.’

탑의 근간과 시초에 관련된 비밀을 품고 있는 비경(秘境)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앙 관리국은 맨 처음 타계 신의 사체를 찾았을 때. 이것을 깊게 조사하는 한편, 외부에는 절대 드러나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천계와 하계 가릴 것 없이, 관리국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곳들이 많기 때문에 연막작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정보를 공개하는 것으로 블러핑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미개척지’라는 이름으로 두었다.

특히 중앙 관리국은 올포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따금 그들의 감시를 피해 암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대개 타계 신이 위장 속에 남긴 잔여 찌꺼기에 잡아먹히기 일쑤였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우드 형제단이 몰래 잠복해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진즉에 받았어도 여태 무관심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관심이 너무 길어졌던 걸까. 안일한 태도는 결국 태만으로 이어져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으니.

“무왕보다 더한 새끼…….”

최고 관리자들은 그들에게 이보다 더 치욕적일 수 없는 욕을 내뱉으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다른 최고 관리자들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상스러운 소리라며 한마디 쏘아붙였을 유(酉)의 라피스 라줄리도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내 꼬락서니를 봐서 알겠지만, 이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이미 놈과 채널링 된 신과 악마들을 중심으로 암굴은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고, 자칫 라플라스의 신병도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놈을 잡아야만 한다.”

곧 머지않아 천계 쪽에서 어떤 말이 나올 건 불에 보듯 뻔한 일. 그땐 올포원도 나서게 된다. 정국이 요동치게 되는 것이다. 중앙 관리국이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풀리려는 것이다.

영왕, 그놈은 딱히 별다른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겠지만. 대전쟁은 하계에서만이 아니라, 천계를 넘어 관리국이며 올포원까지 잠식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무왕의 제자를 암굴에다 처넣자고 의견을 내놨던 거요? 놈과 연결된 신이나 악마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이딴 짓을……!”

“뭣이? 그럼 그게 전부 의견을 내놓은 나의 잘못이란 건가, 뭔가?”

“흥! 틀린 말은 아니지. 그딴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이딴 사달이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 작자가 아직도 그딴 말을……! 지금 나와 해보겠단 건가?”

“못할 것도 없지.”

“뭐?”

“그만!”

쾅!

클루스는 소동이 더 커지기 전에 탁상을 세게 내리쳤다. 압도적인 마력장이 퍼져 나가면서 소란을 멈추게 했다.

그는 더 소란을 일으키면 정말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시스템이 모두 단절되는 곳에서 힘을 쓰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니 다들 좀 닥치게. 설마 영왕이 의념 통천을 깨달은 진인 급일 줄,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

“…….”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하루라도 빨리 영왕이 라플라스와 접촉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것. 다행이라면 비경에는 괴물들이 가득해 영왕이 접근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란 점이고, 변수가 있다면 놈에게 길잡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비경에 대해 우리에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가.”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플레이어에 대한 적극적인 제재는 되도록 않으려 했지만, 지금만큼은 예외로 두겠다. 인과율은 우리 중앙 관리국이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추적대를 꾸리려 한다. 이의는 받지 않겠어.”

클루스의 시선이 타넥에게로 향했다.

“타넥. 특경단의 모든 조를 붙여주도록 하지. 자네의 권능을 개방하는 것도 허락하고. 그런다면 놈을 잡을 수 있겠나?”

타넥은 ‘권능 개방을 허락한다’는 말에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그 말은 옛날 악마왕으로서 부리던 힘을 전부 허락하겠다는 의미. 그리고 그건 곧 자신의 권속들을 부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권능과 권속, 거기다 특경단까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 정도라면 무왕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타넥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클루스는 그걸로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이번에는 원탁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피.”

“으, 응?”

해(亥)의 루피. 키 작은 관리자는 자라목이 된 채로 클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저 표정에 속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가면 뒤에는 흉측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먹고 먹어도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 찬 괴물.

“너도 따라가.”

“하지만…….”

“대신에 여차하면 라플라스에 대한 처리도 네 뜻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순간, 순수하던 루피의 표정에 흉측한 웃음기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감정은 ‘식탐’이었다. 하지만 곧 다시 겁먹은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 알겠어.”

“그리고 나머지는…….”

클루스는 다른 최고 관리자들에게 각자 할 일을 지시했다. 평소라면 ‘명령’에 거부감을 느낄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거기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지시가 전부 끝난 뒤. 클루스는 최고 관리자들을 다시 훑어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이번 일이 외부로 크게 비화되지 않게끔 만반의 준비를 다 하도록. 특히 천계의 동향을 감시해.”

“근데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다우드 형제단은……?”

“클랜 자체에 패널티를 먹이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하도록 한다. 지금은 거기에 몰두할 때가 아니야.”

클루스가 다시 한 번 더 탁상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자, 그럼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고 관리자들의 신형이 움푹 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블케도 자취를 감추기 직전.

“이블케.”

이블케는 클루스가 부르는 소리에 잠깐 멈칫거렸다. 그러다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국장?”

“넌, 대체 무슨 생각이지?”

“오효효! 무슨 말씀이신지?”

클루스의 미간 사이로 골이 잔뜩 팼다.

“이번 일로 라플라스가 죽어도 괜…… 아니다. 괜한 걸 물었군.”

괜히 말을 끌어 봤자 심력 소모만 클 뿐. 이블케가 평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에, 클루스는 자세히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블케는 그런 클루스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국장, 클루스 당신이 하는 것이지요. 저는 어디까지나 그 지시를 따르는 것 뿐이랍니다. 오효효, 오효!”

“그래. 그렇겠지. 가 봐.”

이블케는 다시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취를 감추려다, 떠나기 바로 직전에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국장, 설사 제가 뭔가 딴생각을 품는다 한들, 관리국에 해가 가는 일은 없답니다.”

클루스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이블케는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다.

“하아.”

모두가 사라져 적막이 내려앉은 원탁에서.

클루스는 의자에 몸을 반쯤 묻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가늘게 좁혀진 미간 사이의 골은 도무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무한투.

흡혈군주는 네시가 불러온 괴물들과의 싸움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했다.

연우는 그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검결]

콰릉, 콰르르릉-

쿠쿠쿠!

검환이 폭발할 때마다 팽창한 고열과 섬광이 마해를 몇 차례나 밀어냈다.

수면이 부서지면서 십여 미터나 되는 불보라가 치솟고, 한순간에 증발한 수증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채웠다.

연우를 덮치려던 괴물들은 그대로 밀려나다 못해 몸뚱이가 송두리째 타올라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맷집?

내구도?

권능?

폭발하는 검환 앞에서 그런 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여차여차 폭발을 막아 낸다고 해도, 뒤이은 연쇄 폭발, 난회전(亂回轉)과 초진동(超振動)이 생성해 낸 수백여 개의 파편들이 사방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밀어 버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보호막이나 결계는 그 앞에 무용지물이었고, 신력으로 밀어내려고 해도 초고열이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제히 태워 버리니 괴물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연우에게 달려들던 이백여 마리의 괴물 중 절반 가까이가 단번에 통째로 날아가는 결과가 나타나고 말았으니.

‘먹힌다.’

연우는 그 상황에서 유성검결이 이들에게도 확실하게 먹힌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유성검결이 초월적인 존재들에게도 충분히 먹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해의 괴물은 그들과 근본부터가 전혀 이질적이니 내심 걱정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 몇몇은 혼돈을 너무 많이 머금고 있어, ‘물리적인 법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 녀석들에게 초고열과 섬광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높아, 자칫 허튼짓이 될 수 있어 걱정했었는데.

‘아무리 물리 법칙에서 떨어져 있어도, 이런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다 똑같단 건가.’

사실 유성검결이 가진 파괴력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단 한 번의 폭발로 그치는 것이 아닌, 연쇄 폭발로 파괴력을 수백 배로 증폭시키는 힘.

제대로 틀어박힌다면 행성 하나쯤은 그대로 날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그런 것이 연달아 터지니 어디 제대로 남아나는 것이 있을까.

물론, 이런 폭발의 향연 속에서 몸이 부서져도 아직 멀쩡한 녀석들이 있었다.

서열이 제법 높은 놈들, 비교적 뒤에 있던 놈들, 폭발의 범위에서 떨어져 있던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도 열 폭풍이 가져다준 끔찍한 화상이나, 강기 조각들로 인해 신체 일부가 절단되면서 부상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으니.

저주는 바로 그 뒤에 이어졌다.

[검은 구비타라 - 혈화(血花)]

[불의 파도 - 불벼락]

괴물들의 몸뚱이에 새겨진 화상 자국들이 갑자기 시리도록 붉게 빛나더니, 꽃문양을 그리면서 신체 전체로 번져 나갔다.

혈화.

한번 잠식되면 영혼이 메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숙주의 목숨을 쥐어짠다는 아수라왕 비마질다라의 시그니처 스킬이 터진 것이다.

괴물들은 신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인 혼돈이 ‘비틀린다’는 느낌에 고통을 호소했고, 아주 잠깐 멈칫거린 사이에 새로운 공격이 이어졌다.

쿠르르릉-

콰릉, 콰르릉, 콰르르!

여태 상공을 가득 채우던 붉은 불씨들이 일제히 하늘로부터 불벼락을 끌어왔다. 목표는 각 괴물들의 몸에 이식된 혈화.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불벼락이 그대로 혈화 위를 강타했다.

쿠에엑-

취익! 췩!

결국 괴물들은 계속되는 타격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뭉쳐 있는 녀석도, 덩치가 큰 녀석도. 일절 구분이 없었다.

「미쳤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샤논은 할 말을 잃었는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만큼 유성검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끔찍하다 못해 너무 충격적이었다.

천지개벽. 하늘을 열고, 대지를 쪼갤 정도로 대단하다. 샤논은 이런 이가 어째서 아직도 초월로 가는 길, 탈각을 완전히 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낸 자를 두고 보통 ‘신’이라고 하지, 대체 누구를 두고 ‘신’이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폭발이 지나간 뒤에도, 훨씬 더 많고 강한 괴물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고.

콰르릉!

촤르르륵-

하늘의 별 무리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은하수가 녀석들의 무리 사이로 내려앉았다.

폭발이 잔뜩 번지는 가운데, 그 사이로 검은 쇠사슬이 연결된 비그리드가 맘껏 유영하면서 괴물들의 몸뚱이를 강제로 찢고, 또 찢었다. 부수고, 또 부쉈다.

파스스-

그렇게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괴물들을 죽이기를 여러 차례. 어느새 드래곤 하트 내에 있던 마력의 3할가량이 줄어 있었다.

혈화를 통해 채우는 마력이 있다고 해도, 심력 소모도 적잖았다. .

이렇게나 많은 녀석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 위한 투로 예측도 만만찮은 데다가, 유성검결이 잡아먹는 마력량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대체 어디서 저토록 많은 괴물들이 꾸역꾸역 나타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무지 끝이 없었다.

[모든 죽음의 신이 당신의 신위에 흡족해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당신이 저들에게 내리는 ‘죽음’에 기꺼워합니다.]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기꺼워한다는 메시지가 이따금 그의 흥을 돋워 주었고.

[비마질다라가 고양된 얼굴로 당신의 사투를 지켜봅니다.]

[케르눈노스가 당신을 지켜보는 ‘네시’를 살핍니다.]

그렇게 착실하게 베어 가면서 전진하다 보니, 어느새 이들을 부리는 네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흡혈군주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못 박힌 채 서서 이 쪽을 관망하기만 할 뿐.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우도 차라리 이참에 잘되었다 싶었다. 유성검결의 위력은 여태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었고, 신체적인 능력은 의념 통천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달한 상태. 마룡신체가 얼마나 대단한 육체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 마굴 같은 마해에서도 자신은 얼마든지 통했다. 지금의 자신을 타르타로스에 가져다 놓는다면 지난번처럼 그리 허무하게 도망만 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촤르륵-

연우는 쇠사슬을 잡아당겨 비그리드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블링크를 전개, 어느새 네시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목표는 네시.

실력이 통한다면 아예 이놈의 목을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네시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무한투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네시는 연우의 움직임을 미처 읽어 내지 못했는지 제자리 그대로였다.

덕분에 연우는 여태 안개에 가려져 있던 네시의 본체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브라키오사우르스처럼 거대한 몸체에 목이 또 그만큼 긴 기괴한 모습. 순간, 연우는 자신의 몸보다도 훨씬 큰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꾸우웅-

건. 방. 지. 다.

비그리드가 네시의 머리통으로 내려앉기 직전, 연우는 갑자기 주변 세상이 정지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몸이 꿈쩍도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단단히 붙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통째로 어디 론가 딸려 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콰직!

“커헉!”

연우는 육체를, 아니, 영혼을 통째로 물어뜯기는 듯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는 될 것 같은 고통이었다. 육체와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끔찍한 고통.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턱 하고 막혀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억지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목 아래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괴물들이 그의 몸뚱이를 갈가리 해체하고 있었다. 전부 그가 방금 전까지 해치웠던 괴물들. 죽었던 녀석들이 되살아나 그를 물어뜯은 것이다.

한 번 죽었던 고통을 되돌려 주겠다는 듯, 하나같이 눈가에 적의를 가득 피어 올리고서.

연우가 있던 장소도 네시의 머리 위가 아니었다. 처음 돌파를 시도했던 마해의 뭍. 흡혈군주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시간이, 되돌려지기라도 한 것일까?

연우는 저만치 멀리서 안개에 가려진 채 여전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네시의 두 눈을 보면서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심상 개변(心象改變)!

외부에 구현한 심상 세계를 제 의지에 따라 움직여 물리적인 법칙까지 뒤바꾸는 초월적인 힘.

네시는 방금 전, 심상 개변을 통해 죽은 괴물들을 전부 되살려 냈을 뿐만 아니라, 인과까지 통째로 바꾸어 그가 물어뜯기는 방향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연우의 입 밖으로 핏줄기가 잔뜩 쏟아졌다.

무한투.

결코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흡혈군주는 죽음의 위기를 눈앞에 둔 연우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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