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97화 (497/862)

22화. 공적(公敵) (3)

세상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굉음이 들렸을 때는 이미 검뢰에서 일어난 거친 폭발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뒤였으니.

음속이 빛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연이어 퍼져 나가는 연쇄 폭발과 팽창하는 공기 때문에 진공이 찾아와 금세 묻혔다.

그러다 끝없이 퍼질 것 같던 빛과 열의 파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았을 때에는.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충격에 빠집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말도 안 된다며 당신의 격을 의심합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창공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한 의구심을 품습니다. 당신에게 격렬한 충동을 느낍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파기를 검토하던 동맹 조약을 무기한 연기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당신의 힘에 침음을 삼킵니다.]

……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신과 악마들 모두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눈보라가 불고, 용오름이 치솟던 스테이지가 완전한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얼음 바다는 모조리 증발해서 휑한 밑바닥이 드러났고, 새카맣게 녹아내린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용암과 유황 가스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푸르렀던 하늘도 온통 붉게 물들었다. 오존이며 대기 등도 모두 망가져 사람이 절대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으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은 엄청난 고열(高熱)과 고압(高壓)이 스테이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스테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죽음’의 냄새였다.

제아무리 격이 높은 존재라고 해도, 설사 초월자라고 해도 여기서 생존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냄새였다. 제아무리 불멸(不滅)이니 초월(超越)을 이뤘니 해도, ‘죽음’이란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제법 눈치가 빠른 신과 악마들은 저 폭발에 휩쓸렸을 경우, 단순히 스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강제로 속박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검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오로지 연우를 위해 만들어진 그만의 성역(聖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죽음과 불길만이 가득한 대지.

스테이지는 이미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지 않은 건, 그나마 탑이 가진 대단한 내구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앙 관리국이 나선다고 해도 복구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망가졌으니. 시련은 당분간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검뢰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과 악마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우를 단순한 필멸자라고만 여기며 공적으로 선포한 상태였으니까.

아마 대신격과도 맞설 수 있는 이런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루시퍼의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단 사실을 알았다면 섣불리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천계가 가진 전력이 막강하다고 한들, 올포원과도 대적하고 있는 이때에 그에 맞설 수 있을지 모르는 실력자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패착일 테니.

[신의 사회, ‘딜문’이 공적 선포를 재검토하고자 합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공적 선포에 유예를 두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당신과 친선을 맺기를…….]

……

하지만.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연우는 그런 놈들을 보며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너희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곧 그쪽으로 올라갈 테니.”

눈가에서부터 강렬한 안광이 쏟아졌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서 목 씻고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올림포스’의 수장, 티폰이 당신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아스가르드’의 수문장, 헤임달이 당신의 오만한 발언에 이를 갑니다.]

[‘말라흐’의 서기관, 메타트론이 고운 미간을 찌푸립니다.]

……

“됐으니, 이만 꺼져라.”

연우의 그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팟!

52층이 폐쇄되었다.

[52층 전체가 성역, ‘명토’로 임시 지정되었습니다.]

[소유자의 권한에 따라 성역이 닫혔습니다. 권한 설정을 제외한 모든 기능이 정지합니다.]

[외부에서의 개입이 일절 차단됩니다.]

[모든 간섭이 배제됩니다.]

[천계의 시선이 닫혔습니다.]

52층 전체를 권역화, 권한 설정을 통해 신과 악마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시킨 것이다.

물론, 보통 필멸자가 설치한 권역이었으면 시선을 차단할 수 없을 테지만, 연우가 설치한 것은 단순한 권역이 아닌 성역이었다.

신과 악마가 자신들의 성역에서만큼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들의 시선을 모두 물리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스테이지를 사유화하는 것은 인과율에 명백히 위반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제재가 될 수밖에 없는바.

그래서 연우도 성역을 임시로 설정했을 뿐이었다.

제한 시간이 끝나고 나면 저 귀찮은 것들의 눈이 다시 따라붙겠지만.

‘그래도 놈과 싸우는 동안에는 가릴 수 있겠지.’

연우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크아악! 대체! 대체 내 몸에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아!』

마성이 대지 위에서 영체를 드러낸 채, 검은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괴로움이 잔뜩 배어 나왔다. 핏줄이 돋아나 보기 징그러운 형상이었다.

이미 녀석의 영체는 피의 꽃으로 뒤덮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균열이 잔뜩 퍼진 상태였고, 입가에서는 칠흑이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

연우가 작렬시킨 검뢰는 단순한 검뢰가 아니었다.

아니,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검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죄악석에서 끄집어 올린 시원의 불을 토대로, 신위인 투쟁과 죽음을 섞어 검뢰의 형태로 풀어낸 것이다.

마성은 시시각각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는 ‘죽음’을 떨쳐 내기 위해 칠흑을 있는 힘껏 뽑아냈지만, 여기에 ‘투쟁’의 성질이 빛을 발해 맞서 버리니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이를테면, 마성은 중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음은 독이고, 투쟁은 항체를 죽이는 효소였다.

제아무리 강한 초월자라 하더라도 죽음으로 인도하는 힘. 그것이 연우가 창공 도서관에서 계시록의 원전을 보며 탄생시키고자 한 자신만의 궁극기였다.

아마 지금쯤 천계에서는 난리가 나도 단단히 났을 터였다.

검뢰가 어떤 효과를 낼지, 그들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알게 되었으니. 문제는 연우가 층계를 폐쇄시키면서 그 수준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연우도 바로 이 점을 노린 거였다. 검뢰를 이만큼이라도 보여 준 건 위협을 하기 위해서였을 뿐, 그 외의 전력을 굳이 놈들에게 노출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의심암귀라, 의심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가기 바쁘니, 아마도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추론으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미지의 영역은 신과 악마들에게도 똑같이 두려움의 대상일 테니.

천계의 존재들에게 공포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우가 이참에 차지하고자 하는 포지션이었다.

[아이쉬마- 다르바가 당신을 보며 흥미로워합니다.]

[헬이 요염한 미소를 띱니다.]

[오시리스가 당신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합니다.]

……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각 사회에 따로 자신에 대해 이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들은 사회의 소속원이기에 앞서 칠흑왕의 열혈한 추종자. 이제는 연우와 거의 한 몸처럼 굴고 있으니.

[비마질다라가 이제 당신이 어떻게 싸울지에 대해 흥미를 보입니다.]

[케르눈노스가 당신의 여정을 살핍니다.]

오래 전부터 그와 함께 했던 두 존재도 있었지만.

화아아-

연우는 하늘 날개를 있는 힘껏 활짝 펼쳤다. 검고 붉은 세 쌍의 날개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커졌다. 검붉은 색을 띠는 불길이 그의 몸 주변으로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을 인도하는 천사처럼 황홀했다.

『놈!』

하지만 마성에게 그 모습은 자신의 자존심을 땅바닥으로 끄집어 내린 존재가 보이는 가증스러움, 그 자체였으니!

마성은 자신을 이딴 꼴로 만든 연우를 어떻게든 씹어 삼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카아악!

턱을 잔뜩 벌렸다.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나며, 그 아래로 공허가 활짝 열렸다.

* * *

쾅! 콰앙!

콰르릉-

연우와 마성의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스테이지는 몇 번씩이나 파괴되었다.

검뢰가 잇달아 내리꽂히면서 공간을 거의 찢어발기다시피 했고, 그럴 때마다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연우를 삼킬 듯이 아슬아슬하게 굴었다.

그리고.

촤르르륵-

철컥!

쇠사슬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면서 각각 그들의 손발을 마구 묶었다.

연우의 왼쪽 팔에서 뻗쳐 나간 쇠사슬은 마성의 발을 묶었고, 마성이 꺼낸 공허의 사슬은 연우의 목을 감았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시키고서 싸우는 형태라, 도무지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뭔가를 하려 할 때면 도중에 신력 공급이 중단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아…… 하아…….”

『빌어먹을……!』

연우와 마성은 둘 모두 지친 상태가 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만 냉혈 특성으로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는 연우에 반해, 마성은 몇 번씩이나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연우가 강해져도 너무 강해졌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픽 하고 쓰러질까 봐 다루기 조심스러웠던 녀석이 아니었나.

그래서 조금만 더 여물기를, 그래서 맛있게 익기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서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커지고 말았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재 마성의 상태가 온전한 건 아니었다.

비그리드라는 임시 그릇에 있기에 마력을 출력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의식을 이렇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모든 힘을 연우를 상대하는 데 집중할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으니.

연우는 현재 의도적으로 탈각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또다시 올포원이 어떻게 나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천계와 대적 중이라지만, 녀석은 하계에서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하는 것을 더 경계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연우도 필멸자의 격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바.

굳이 따지자면, 둘 모두 비슷한 패널티를 안고 싸우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마성이 더 불리했다.

연우는 죄악석과 드래곤 하트라는 두 개의 영구 마력 기관(永久魔力機關)을 통해 소모된 힘을 빠르게 보충하고, 전투에 계속 집중할 수 있는 반면에.

마성은 영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으니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먹잇감에게…… 이딴 수모…… 를 겪다니……!』

마성은 잔뜩 지친 얼굴로, 그러면서도 분노에 젖은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톱니 이빨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다음에는…… 기필코……!』

그 말을 끝으로.

츠츠츠-

노이즈가 낀 것처럼 마성의 영체가 흐트러지더니, 칠흑색으로 물든 비그리드가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촤르륵-

연우는 재빨리 쇠사슬을 잔뜩 풀어 비그리드를 더 세게 칭칭 감았다. 저 안에서 잠든 녀석이 다시 눈을 뜬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신진철로 속박시켜 뒀으니, 제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순순히 봉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그리드가 아깝긴 하지만…… 녀석을 제거할 방법이 생길 때까지는 당분간 어쩔 수 없겠지.’

연우는 아쉬움에 가볍게 혀를 찼다. 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했던 비그리드를 당분간 이렇게 봉인시켜 둬야 하는 게 안타까웠던 것이다. 아직 그 속에 담긴 모든 진명을 깨운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계속 들고 다니다가 마성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이렇게 해 두는 게 훨씬 나았다.

계시록의 원전을 전부 보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성을 제거하거나 흡수하는 방법까지는 아직 얻지 못한바. 방법이 생길 때까지는 공허에 처박아 둘 생각이었다.

쇠사슬이 팽팽하게 돌아가면서 비그리드가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공허가 닫힌 뒤에야, 연우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천계로부터 벗어나 하늘 날개를 재각성하고, 마성과 싸우기까지 했으니 심력 소모가 커 너무 피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만큼 강해졌다는 사실에 뿌듯함도 느끼면서.

52층을 장악하고 있던 성역 설정을 해제시켰다.

순간, 수많은 시선이 다시 쏟아지면서 메시지가 폭주했지만, 연우는 사용자 권한으로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전부 차단시켰다. 더 이상 놈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

대신에 아래로 향하는 채널링을 활짝 열어, 사도인 도일을 찾았다.

『……형?』

순간, 도일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도의 힘은 모시는 신에게서 나오는바. 그로서는 단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연우가 영 낯설기만 할 터였다.

혹시 자기가 잘못 느꼈나 싶기도 할 테지.

“어떻게 되었어?”

연우는 그런 도일을 보면서 가볍게 실소를 흘리고, 가장 먼저 질문을 던졌다. 저항군과의 전쟁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었다. 52층에 있어야 할 그들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도일도 금세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잘 싸우다가, 저쪽에서 갑자기 화이트 드래곤이 힘을 보태면서 싸움이 조금…… 아니, 꽤 많이 힘들어져서 50층까지 후퇴했었는데요.』

도일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갑자기 발라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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