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98화 (498/862)

23화. 공적(公敵) (4)

“으흑흑!”

“제기랄……!”

76층에 위치한 화이트 드래곤의 본단.

원래는 지난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탑을 지배하던 레드 드래곤이 머물던 거성(巨城)이 있던 곳이었지만.

오랜 전란과 내분은 거성의 그 화려함을 죽여 버렸고, 이제는 사람이 찾지 않는 쓸쓸한 폐허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나마 화이트 드래곤이 내분을 봉합하면서 다시 제 기능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옛 위명을 되찾기에 빛이 많이 바랜 상태였다.

레드 드래곤의 주축이었던 81개의 눈 중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잠적해 버렸고, 휘하 병력들도 대부분 아르티야가 두려운 나머지 이탈해 버린 까닭이었다.

그래도 왈츠는 어떻게든 잔존 세력을 이끌어 화이트 드래곤을 새로운 레드 드래곤으로서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본인 스스로도 여름여왕의 유산을 수습하면서 나날이 무위가 발전하는 중이었으니. 수하들도 그녀를 따라 종군을 마다하지 않아 다시 재기를 노려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전망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왈츠는 한 가지 수를 던졌다.

아르티야와 겨루고 있는 저항 세력들에 한 손을 보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76층에 최대한 눌어붙어 전열을 정비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었으나, 저항 세력이 망가지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 줄 만한 방패막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도박에 가까운 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적절히 저항 세력을 이용하다 보면 교착 상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리고 왈츠까지 직접 움직이면서, 다행히 52층에서의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심지어 야밤에 있었던 전격전으로, 전선을 50층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화이트 드래곤은 이대로 아르티야를 50층 아래에 묶어 둘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다른 거대 클랜인 다우드 형제단이나 시의 바다도 비슷하게 아르티야를 견제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된 덕분이었다.

그리고 저들의 발목을 묶기 위한 결전이 시작되었을 때.

왈츠는 다시 한 번 결사대와 함께 아르티야의 수뇌부를 급습했고, 저 증오스러운 부유성 라퓨타에까지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패퇴(敗退)하고 말았다.

“왈츠…… 님!”

죽은 결사대원들을 위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던 중, 왈츠가 모습을 드러내자 슬픔에 빠져 있던 클랜원들 모두가 일어서서 예를 갖췄다.

머리가 무겁게 푹 수그러들었다.

왈츠는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옷으로 덮었지만, 그 아래 드문드문 보이는 살갗은 상처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두 눈은 무리한 마력 남발로 인해 일시적인 블라인드 저주에 걸린 상태였다.

영왕을 대신해서 부유성을 지키고 있던 폭시 테일, 도일과 일전을 치르던 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병상에 누워 계속 치료를 받고 있어야 할 테지만.

“미안…… 하다.”

왈츠는 지면에 무릎을 꿇은 채 클랜원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장례식에 있던 이들이 모두 강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용은 언제나 고고하다.

왈츠는 언제나 여름여왕의 그런 유지를 잇고자 하였고, 그래서 어느 전장에서도,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고고함을 잊지 않으려 했다.

어떤 이들은 왈츠의 그런 모습에 주제를 모르고 헛바람만 들었다며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클랜원들은 그런 용의 위대함을 믿고 의지하며 따랐다.

그런 왈츠가 엎드린 것이다.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실책이다. 내가 못났기에 이렇게 된 것이니. 면목이 없을 뿐이다.”

뚝.

뚝.

왈츠의 떨리는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 * *

“왈츠 님.”

“당분간은 나 혼자 있고 싶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느냐?”

“그럴…… 알겠습니다.”

왈츠를 부축하고 다시 병상까지 모시고 왔던 트로이는 왈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그의 기척이 완전히 떠난 뒤에야, 왈츠는 병석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부유성 라퓨타를 침입했을 당시. 그녀는 분명히 도일의 머리를 날리기 직전이었다. 아르티야의 주축 멤버라 할 수 있는 판트와 에도라, 칸이 결사대에게 발목이 묶인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왕을 제거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전쟁은 다시 벌어질 테지만, 그래도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선을 교착시킬 수 있는 기회라 여겼었다.

무엇보다 여태 그녀가 파악한 도일의 전력은 하이 랭커는 될지언정, 절대 ‘왕’ 급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당한 쪽은 도일이 아닌 왈츠였다.

손날이 도일의 목을 날리기 직전, 갑자기 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붉은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그녀를 단번에 날려 버린 것이다.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작 그런 기적을 일으킨 도일도 전혀 영문을 모르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기회라 여겼는지, 도일은 반격을 시도했고, 결국 결사대는 팔 할의 희생자를 내며 패퇴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확실해. 영왕…… 그놈의 신변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해.’

왈츠는 도일을 감싸 안은 검붉은 빛이 영왕의 것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여름여왕과 자식들 사이를 잇던 사도 계약의 기운이, 도일에게서도 똑같이 풍겼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의 힘은 보통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한순간 그렇게 갑자기 무력이 급상승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원주인의 격이 그만큼 급상승한 경우.

‘탈각.’

혹은 그에 준하는 뭔가를 이뤘을 게 분명했다.

쾅!

왈츠는 주먹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분통이 터졌다.

76층의 통일을 이뤄 냈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아직 7차 각성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마땅한 각성이 계속 불발되었다. 정체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영왕이 그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은 그만큼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는 뜻. 실제로 한낱 사도에 불과한 도일에게도 당하지 않았는가. 이제 왈츠, 그녀는 영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 셈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은 패배했고, 저항 세력은 모조리 분쇄되었다. 그녀마저 부상을 입어 전선에 나설 수 없는 이때, 아르티야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상위 층계로 돌파하는 중이었다.

이미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트로이에게 물었을 때에도, 저들이 벌써 60층까지 다다랐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으니.

이제는 그녀와 화이트 드래곤도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대세는…… 이제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것일까.

‘어머니, 대체 어째서 답을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왈츠는 자신이 각성에 계속 실패하는 것이, 그들의 유전 인자 속에 깊이 남아 있는 여름여왕의 유지가 호응하지 않아서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여름여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질 테지만.

왈츠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름여왕은 분명히 죽었을지언정, 그녀의 의지는 분명히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을.

그녀의 드래곤 하트 속에 ‘적룡의 불씨’가 아직까지 아주 자그마한 형태로나마 존재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대체 여름여왕의 의지는 어디에 있는 것이며, 또한, 있다면 어째서 자식인 자신을 돌봐 주지 않으시는 걸까. 왜 당신의 충성스러운 수하들인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기만 했다.

아니면.

혹시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은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왈츠의 머릿속에 스쳤지만, 곧 억지로 머리를 털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처럼 부모에게 버림 받은 고아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한편에 남은 일말의 의심은 조금씩 그녀를 좀먹어 갔다.

그러던 그때.

왈츠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재빨리 병석에서 멀찍이 떨어지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강렬한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런, 이런. 어머니들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은 공주님은 여전히 가시가 뾰족하시군그래.”

그런 대기 사이로 공간이 갈라지면서 한 사람이 등장했다.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사내. 검무신이 그녀를 보면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 * *

[이곳은 60층, ‘거대 검묘(劍墓)’의 관입니다.]

연우는 푸른 포탈을 활짝 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발아래, 듬성듬성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구릉을 따라, 작게는 수 미터에서부터 크게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다양한 종류의 검들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큰 전투가 있었던 건지, 연우의 코끝으로 짙은 탄내와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60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지금은 잊힌 옛 시절, 아주 머나먼 고대에 오로지 검 한 자루로 자신의 용맹과 의기를 증명하려는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자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싸움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많은 종족들이 그들과 갈등을 겪다가 끝내 몰락을 거듭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만이 오로지 하늘 아래에 위대한 종족이며, 자신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자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 종족은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승리를 거두어 왔고, 발아래 많은 영토를 두게 되었습니다. 패배한 종족들뿐만 아니라, 공포에 질린 여러 종족들도 앞다투어 그들에게 신속(臣屬)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이상 병탄할 땅이 남아 있지 않게 되자, 그들 종족은 여러 패로 나뉜 채로 자신들끼리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용맹과 의기를 증명할 새로운 방법으로, 동족 살생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들 종족은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였고, 결국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가, 역시나 스스로의 힘으로 스러진 유일한 종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은 그들 종족이 최후의 일인을 가리기 위해 부딪쳤던 마지막 전장입니다. 크고 작은 검들은 죽은 원주인들의 사체 위에 남아 묘지가 되었고, 황량함만 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몰락한 그들 종족의 염원만큼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들 종족이 남긴 염원으로부터, 당신의 용맹과 의기를 증명하세요.

저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위대한 전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연우는 황량하기만 한 들판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스테이지로 돌아왔을 때부터 곧 장 60층으로 향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야가 벌써 여기까지 진출해 있을 줄은.’

도일은 연우가 각성함에 따라 그도 같이 각성을 하면서 왈츠와 화이트 드래곤을 격퇴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방해물이 없게 되자, 파죽지세로 이곳까지 밀어붙였다고 하던가.

덕분에 연우는 라퓨타로 되돌아가기 위해 52층에서부터 60층까지 단번에 주파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그의 실력으로 50층 대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는 난이도였지만, 그래도 스테이지 랭킹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물론, 그것도 단 하루면 충분했지만.

“형!”

때마침 연우의 등장을 느낀 도일이 성 밖으로 나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연우는 가볍게 날개를 접으면서 도일 앞에 착지했다.

도일의 옆에는 하이디를 비롯한 숲의 아이들이 반쯤 황홀에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은연중에 풍기는 상격(上格)의 기품(氣品)을 느낀 것이다. 지금의 연우에게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들에게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도일에게 곧장 물었다.

“부탁한 건?”

“여기 준비해 두긴 했는데…… 정말 바로 가시려고요? 다들 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일은 숲의 아이들이 챙겨 온 것들을 가리키면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연우가 이곳에 오기 전에 그에게 따로 준비해 달라고 지시한 물건들. 무엇에 쓰일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연우가 라퓨타에 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곧바로 움직일 생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판트와 에도라는 물론, 칸이며 여러 수하들까지 전부 전장에 나가 있는 상태. 그들은 단체 파티를 이룬 채, 층계 공략과 세력 확장을 동시에 병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우가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돌아올 테지만, 연우는 그들에게 따로 알리지 말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괜히 말해 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을 테니.

더구나 천계와도 돌아선 이때, 저들에게서 어떤 방해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로서는 전선을 아르티야는 아르티야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가볍게 실소를 흘리며 도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숲의 아이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전부 아공간 속에 밀어 넣으며 다시 라퓨타를 나섰다.

이제 발데비히의 흔적을 찾으러 나설 때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