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시나리오 퀘스트 (4)
『…….』
발데비히에게서는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연우를 노려보기만 할 뿐.
녀석은 아무래도 연우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 눈치였다.
‘일기장에서 보던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동생이 기억하는 발데비히는 항상 순박하고 착했다.
검야차라는 별칭도 있듯이, 이따금 전투가 벌어지면 광증에 젖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드는 맹수처럼 되기도 했지만. 원래 녀석은 타인에게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는 성격이었다.
늘 동료들의 짓궂은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일쑤였다. 끝내 베이럭에게 당한 것도 그런 면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우 앞에 있는 발데비히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눈빛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턱은 꽉 다물려 있었다. 거기다 전신은 온통 흉터로 가득해 그가 여태 얼마나 거친 전장을 누비고 다녔는지를 말해 주었다.
특히 검을 쥘 때면 항상 폭발해서 동료들의 속을 썩일 때가 많았던 광증도 많이 가라앉아, 살벌한 투기(鬪氣)로 변한 상태.
백전(百戰)의 용사라고 해도 될 듯한 모습이었다.
어눌한 발음은 여전히 어쩌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서 발데비히는 직접 육성을 내지 않고, 어기전성을 고집했다. 아마 이것이 의사를 더 확실하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으니 선택한 방법일 테지.
『넌…… ###, 맞지?』
여전히 이름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기 때문인지, 연우의 이름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나왔다.
하지만 발데비히는 직접 ‘차연우’라는 단어를 거론했다. 예상대로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정우 녀석이 내 이름도 말했었나?”
『지나가듯이.』
“술에 취한 채로 중얼댔겠군.”
『정확해.』
발데비히는 다시 말없이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주 잠깐 녀석의 눈가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옛 친구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속이 적잖게 울렁이고 있겠지.
하물며 튜토리얼 때부터 함께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였으니.
그러다 발데비히는 울렁이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설마 했지만……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나?』
그러다 발데비히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연우를 노려봤다.
『거기다 다짜고짜 사고부터 치는 건 동생과 똑같은 것 같고. 어떻게 형제가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 거지?』
“무슨 소리.”
연우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녀석보다는 훨씬 낫지. 얼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
발데비히는 이게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리인가 싶은 듯,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연우를 보다가 혀를 가볍게 찼다.
『자뻑이 심한 기질도 똑같군. 말투만 다를 뿐이지. 주변에 다른 동료들이 거기에 대해 뭐라고 투덜거리지는 않나?』
“사실을 이야기할 뿐인데, 뭘 투덜거린다는 거지?”
『……맞군. 형제.』
발데비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는 그냥 무시했지만.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여기, 분명히 탑 내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타계의 신이 많은 거지?”
발데비히는 뭐라고 대답을 하려 했지만.
꾸우우우-
타계의 신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 하늘을 따라 울렸다. 스테이지가 다시 격동했다. 하늘이 부서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러다 녀석들은 목표를 놓친 것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서로 저들끼리 부딪치기 시작했다.
발데비히는 그 광경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울 듯하군. 우선 자리부터 옮기지. 내 뒤를 따라와라.』
그러면서 연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계도 거기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한 투였다.
연우도 〈바람길〉을 밟으면서 발데비히의 뒤를 따랐다.
* * *
발데비히가 안내한 곳은 연우가 처음 있던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였다.
넓은 평지를 따라 몇 겹이나 되는 결계가 설치된 곳. 그 안쪽으로 들어가니,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묘비가 쭉 나열된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발데비히가 머무는 모옥은 묘지 공원 뒤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저 묘지는…….”
『알면서 왜 묻는 거지? 여기서 눈 감은 동족들의 것이다. 비록 묘비 아래에 제대로 된 유해 하나 묻어 주지 못했지만. 들어와라.』
발데비히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뾰족했다.
연우는 거기에서 묻어나는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묘지기를 자처하고 있는 반거인이라. 아무래도 그가 직접 이곳에 남은 거인족의 유해를 거두고, 묘비를 하나하나씩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고독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타계의 신들이 족히 수십 마리 이상 들끓는 위험한 장소에서 그러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발데비히를 따라 들어간 모옥은 크기가 컸다. 아무래도 녀석의 덩치가 덩치다 보니, 연우의 기준으로는 널찍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도 녀석의 성격을 보여 주듯, 대부분 필요한 것들로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배치는.
‘똑같아.’
클랜 하우스에 여전히 남아 있는 녀석의 방 구조와 똑같았다.
역시 이 녀석도 여전히 옛날의 망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접할 건 이것밖에 없으니 불만 가지지 말고 마셔라.』
덜그럭,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연우 앞에 놓인 찻잔은.
‘세숫대야?’
순간 착각이 들 정도로 컸다.
그래도 제 딴에는 모양을 낸답시고 이리저리 공예를 한 흔적이 있어 찻잔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손재주는 여전히 없는 것 같지만.’
언제 우려낸 것인지, 세숫대야만 한 찻잔 안에는 커피처럼 보이는 검은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먹다가 배 터져 죽겠어.’
이렇게 많은 커피를 한꺼번에 대접받아 본 건 처음이라, 대체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마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손잡이라고 있는 부분도 연우가 쥐기엔 너무 커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양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갓 입대하고 첫 휴가를 받았을 때 친구들이 의리주라며 이런 식으로 술을 줬던 것 같은데.
그리고 몇 모금 마신 뒤 소감은.
“써.”
그냥 쓴 게 아니었다.
써도 너무 썼다.
발데비히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너희 고향 행성에서 나온 물건일 텐데?』
퉁명스럽게 커피를 내오긴 했지만, 발데비히는 연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그가 마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뒷마당에 재배한 커피콩도 그리 많지 않아, 그로서는 간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최대한 호의를 베푼 것인데. 그런데 실컷 마시고 내놓은 대답이 저따위니 짜증이 날 수밖에.
하지만 연우는 발데비히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너, 이거 정우 녀석이 가르쳐 준 레시피대로 한 거지?”
『……어떻게?』
발데비히의 일그러진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뻔하지. 하여간 그 새끼, 커피도 마실 줄 모르는 놈이. 쓰면 다 좋은 건 줄 알지. 너는 이렇게 쓴 걸 여태 좋다고 마셨던 건가?”
『……처, 처음에는 나도 힘들었다만, 먹다 보니 그 풍미를 알게 됐…….』
“지구에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사람은 이따금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천천히 즐기는 용도지, 이렇게 사발로 담아서 술 마시듯이 꿀떡꿀떡 먹는 사람은 없어.”
『…….』
“아무리 거인족의 미각 세포가 인간과 구조가 다르다고 해도, 반거인이니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은 있을 텐데.”
『…….』
“보나 마나 뻔하지. 이 고달픈 곳에서는 이렇게 쓴 커피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안 그래?”
『…….』
“어떻게 생각하는 것도 정우 녀석과 이렇게 똑같은지.”
『…….』
연우는 결국 답답했던지 더 이상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 있나?”
『저…… 쪽에 있다만. 그건 왜?』
“그 이상한 혀를 어떻게 좀 바꿔 주려고. 잠시 빌리지.”
『…….』
연우는 발데비히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커피 잔과 발데비히의 커피 잔을 같이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발데비히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은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다, 변명까지 했던 걸까. 분위기를 주도하고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모습은 또 정우와 다른 것 같았다.
정우와 닮은 듯하지만 닮지 않은, 정우의 얼굴을 한 방문객.
발데비히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마셔 봐.”
잠시 후, 연우는 부엌에서 찾은 다른 컵에다 새로 만들어 낸 커피를 가져와 발데비히 앞에 놓았다.
탁한 갈색이 감도는 우유.
발데비히는 괴이쩍은 물건을 만난 사람처럼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컵과 연우를 번갈아 봤다.
『커피를 우유에 탄 건가?』
쓰디쓴 에스프레소만 사발째로 들이켰던 발데비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조합이었다.
“캐러멜 마키아토라는 거다.”
『카, 카라…… 뭐?』
발음을 따라 하지 못해 적잖게 당황하는 발데비히를 보면서, 연우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캐러멜 마키아토. 너 같은 미각 상실자에게 딱 제격인 거니까 마셔 봐. 우유나 캐러멜 시럽 같은 건 지구에서 쓰던 것이 없어서 다른 걸로 대체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다.”
이미 대장로나 브라함에게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니 걱정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외뿔부족원들을 피해 다니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재료는 아공간에 한가득 쌓여 있으니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데비히는 여전히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보다, 끝내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입 들이켰다. 그리고.
“맛있다. 이거!”
발데비히는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을 터뜨릴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냐?』
연우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영업 비밀.”
발데비히의 낯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런 모습은 또 정우와 똑같구나.』
“그렇게만 먹지 말고, 얼음 있으면 적당히 넣어서 차갑게도 먹어 봐. 더 잘 맞을지 모르니.”
발데비히는 연우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커피를 이리저리 마셔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에스프레소 말고도, 이렇게 단 커피를 마시니 입이 즐거웠던 것이다.
연우는 여태 험상궂은 표정만 짓다가 다시 밝아진 녀석을 보면서 똑같이 따라서 웃었다.
『……배불러.』
“미련하게 그리 큰 그릇을 열 개나 넘게 비웠으니 배가 안 차는 게 이상하지.”
연우는 발데비히의 자리 옆에 수북하게 쌓인 찻잔 아닌 찻잔을 보면서 혀를 찼다. 맛있다고 저렇게 먹어 대다니. 죽은 식탐황제도 저걸 보면 울고 갈 것 같았다.
『미련하다고 하지 마라.』
“그럼 식탐 참 많다고 해 두지.”
『…….』
“그보다. 이제 배 좀 찼으면 이야기나 좀 나눴으면 하는데.”
발데비히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연우의 면상이 꼴 보기 싫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더 짜증 나는 건 무표정한 얼굴로 저런다는 것이다. 차라리 정우는 쾌활하게 웃기라도 했었지.
하지만 연우의 등장은 그에게도 이례적인 것.
혹시 편지를 받은 정우의 가족 중 누군가가 탑으로 넘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막연히 했었지만, 현실로 벌어지니 기분이 묘했다. 특히 연우는 정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다시 심장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여태 너를 찾아다녔다. 이유는 알고 있겠지?”
발데비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우연찮게 정우가 다시 탑에 등장했고, 아르티야가 부활했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어. 그때 짐작했지. 가족 중 누군가가 정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나 역시 그때부터 준비하고 있었어.』
발데비히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날 죽이려고 하겠다면 얼마든지 목을 내어놓겠다. 어차피 나에게는 입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조금만…… 내게 조금만 시간을 다오. 아직 못 다한 일이 있다. 그것만 끝낸다면 알아서 내어놓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연우는 가만히 발데비히를 보면서 용신안을 살짝 열었다. 녀석을 따라 수많은 결이 뭉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진실.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연우는 혀를 차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완전히 버림을 받은 건 아니었나.’
연우는 동생을 떠올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에 이어서 발데비히까지. 여전히 겉으로 용서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뭉쳤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이들은 동생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니.
“네 목 따윈 관심 없어.”
『……뭐?』
“어차피 복수도 거의 끝났고. 직접적으로 남은 건, 비에라 듄, 그년 하나뿐이니. 거기에 네 목이 더해져도, 더해지지 않아도 별 차이 없어.”
『…….』
“그래도 정우에게 정말 사죄를 하고 싶거든.”
『……?』
“살아서 갚아. 나의 칼이 되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