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시나리오 퀘스트 (5)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어서일까. 발데비히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뭐……?』
“살아서 갚으라고. 협력해라. 비에라 듄의 목을 치고, 탑까지 부수는 데.”
발데비히의 눈이 더 커졌다. 이번에는 혼란만이 아니라 경악도 같이 섞였다.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을 잡아먹은 것을 알고서 하는 소리인가?』
“알다마다. 이미 몇 번씩이나 부딪치기까지 했었는데.”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자신이 발푸르기스의 밤을 몰락시키고, 타르타로스에서 티탄-기가스와도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티탄-기가스가 올림포스를 차지하게 된 계기와 자신이 하데스의 뒤를 이어 사왕좌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까지.
그리고 베이럭이 비에라 듄과 손을 잡고 엘로힘을 잡아먹고, 올림포스를 하계에 강림시키려 했다는 대목까지 오자, 발데비히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네가 아르티야를 부활시켜서 발푸르기스의 밤이나 엘로힘 등을 처치했다는 말은 우연찮게 듣긴 했었지만……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면서 발데비히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사왕좌라고? 정우가 용의 계승을 통해 탈각을 시도한 건 알고 있었지만, 형인 넌 아예 다른 방법을 선택한 건가……. 이제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겠어. 잠깐. 그럼.』
발데비히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연우를 보았다.
『타계의 신들과 싸우려 했던, 그딴 미친 짓을 벌이려 했던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닌 셈인가.』
초월자들과 겨루는 필멸자라니.
거인족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탈각과 초월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얻어 가고 있던 발데비히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필멸자는 초월자와 겨룰 수 있는 격이 아니었으니까.
그 두 가지를 겨우 이루고 나서야 겨우 비벼 볼 만한 수준인 것인데, 연우는 순서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셈이었다.
처음 발데비히가 연우를 발견했을 때, 도중에 뛰어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불행한 플레이어가 길을 잃고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다가 타계 신들의 관심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그대로 두면 잡아먹히거나, 장난감이 되어 이리저리 차이다가 그들이 지루해질 때 즈음 죽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엔 없었으니.
하지만 지금까지 연우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니, 괜한 헛고생을 한 셈이었다.
수십 마리나 되는 타계의 신을 홀로 감당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몸 하나 내빼기엔 충분했을 터였다.
“이놈을 말하는 건가?”
연우는 발데비히를 보며 피식 웃더니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공허가 활짝 열리더니, 그 내부에 갇혀 있는 것들을 훤히 보여 주었다.
쿠우우!
발데비히도 이미 낯이 익은 타계의 신이 검은 쇠사슬에 이리저리 결박된 채,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풍기는 격의 향연이 공허 너머인 여기까지 전해져 모옥을 위아래로 떨리게 할 정도였다.
발데비히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연우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여태 늠름한 모습만 보여 주려 하더니, 그래도 저런 어리벙벙한 면이 남아 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짓을 했었군. ‘눈먼 도시의 숨결’이 이런 곳에 갇힐 줄이야.』
발데비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계의 신을 직접 생포할 생각을 하다니. 과연 탑 내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사람이 있을까? 그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했다. 숱한 세월을 살았던 여름여왕도 이런 건 절대 생각지 못했을 테니.
연우가 도로 손을 덮으며 공허를 닫자, 발데비히는 다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네가 갖고 있는 것들을 전부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다면…… 대지모신의 멱을 따러 갈 수도 있겠어.』
“그렇지?”
『하지만 그 전에 올포원을 넘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하다마다. 그래서 나는 올포원을 그 자리에서 끄집어 내릴 생각이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쌓아야지. 그러기 위해서 권속들뿐만 아니라, 아르티야의 전력 증강에도 계속 집중하고 있는 거고.”
『……그래서 나더러 너의 검이 되라는 것인가?』
“그래. 올포원을 끄집어 내리고 난 뒤에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플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득실거릴 테니.”
발데비히는 올포원이 가로막고 있는 저 까마득한 상위 층계의 존재들을 떠올렸다.
천계.
그곳이 크게 신과 악마의 진영으로 나뉘고, 또다시 여러 개의 사회로 갈라져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사실들일 뿐, 천계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 하계에 알려진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천계가 열린 순간, 탑에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것.
그건 여태 거인족의 유산을 수습해 왔던 발데비히였기에 더 깊숙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하계의 존재들에게 있어, 신과 악마들이 여태 천계에 갇혀 있었던 건 축복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것참, 터무니없이 큰 것을 그리고 있군.』
발데비히는 연우가 올포원이라는 존재를, 그저 그가 가려는 목적지를 도중에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존재에겐, 또 어떤 종족에겐, 그들의 운명을 가로막던 장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실 타계의 신들이 이곳 히든 스테이지에까지 침범하고도, 그 이상으로 진출하지 못하던 건 올포원 때문이기도 했으니.
『탑을 부순다는 것도 그런 의미인가?』
“꼭대기에 뭐가 있든, 올라서 거기에 있는 것을 차지하고, 탑을 부숴야만 이 복수도 끝날 테니까.”
결국 연우에게 있어 복수의 최종 목표는 탑인 셈이었다.
“그러니 다시 제안하지.”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르티야로 되돌아와라, 발데비히. 거인족의 힘을 계승한 너라면 앞으로의 계획에 아주 큰 도움이 될 테니.”
『동정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가 있어서라고 말해 주니 차라리 훨씬 마음 편하군. 하하하!』
발데비히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껏 얼굴에 가득하던 슬픔이 조금씩 희석되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연우는 녀석의 마음이 이미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굳이 칠흑을 쫓아 동생의 영혼을 찾는 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앞선 것은 탑의 정복이라는 명확한 목표점이 있는 것과 다르게, 이건 아직 그도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답이니까.
칠흑왕에 대한 것은 어쩐지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확실히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이군. 마음 같아서는 곧장 너를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발데비히는 연우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안 돼. 이미 기어 다니는 혼돈의 종이거든.』
* * *
종?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우는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과 처음 마주쳤을 때. 녀석은 분명히 발데비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여태 네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군.』
발데비히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자신의 지난 사정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타계의 신이 어떻게 탑 내에 들어와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리 히든 스테이지라고 해도 어떻게 그 많은 존재들이 탑 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였으니.
“네가 하던 것과 관련이 있나?”
『있다마다. 우선 이곳은 너도 들어와서 보았듯이, 여러 거인족들의 무덤이다. 마지막 거인족들이 쓰러졌던 곳이지.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을 비롯한 여러 타계의 신이 겨우 구축한 심상 세계이기도 하다. 일종의 성역이랄까?』
“뭐?”
『아주 오래전, 거인족은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사멸한 것이 아니야. 오히려 부림을 당한 것이었지.』
별안간, 연우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꽂혀 오는 게 있었다.
그동안 가졌던 의문들.
60층 스테이지의 시련 내용과는 뭔가 맞지 않았던 마지막 거인왕, 발데비히의 넋두리와 시나리오 퀘스트의 내용들.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관계를 추측해 본다면…….
『대충 눈치챘나 보군. 맞다. 거인족은 기어 다니는 혼돈이 부리는 노예였다.』
“……!”
『정확하게는 목줄이 채워져 어쩔 수 없이 사냥개 노릇을 해야만 했던 비운의 종족이었지.』
거인족은 오로지 용맹과 의기만을 앞세운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들에겐 그보다 더 앞서서 내세우는 중요 가치가 따로 있었다.
가족애(家族愛).
『어떻게 손을 쓴 건지는 몰라도, 기어 다니는 혼돈은 거인족의 아이와 노인들을 볼모로 삼아 전사들을 사냥개로 부리고자 하였다. 여태 정복과 병탄만을 일삼던 그들이, 처음으로 역으로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지.』
이걸 두고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발데비히는 그렇게 쓰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문제는 거인족의 전사들로서는 가족들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이 시키는 대로 탑으로 진출했던 거겠군?”
『맞다. 첨병 역할을 맡게 된 것이지.』
연우는 그제야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던 퍼즐들이 알맞게 맞춰지는 것 같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아주 오래 전부터 탑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포원과 천계의 존재들로 인해, 그리고 존재의 특성 때문에 진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거인족을 부리고자 했던 것이다.
거인족은 천계의 초월자들과도 견줄 만한 존재들이고, 전투에도 능하다. 무엇보다 탑이 거부하지도 않으니 사용하기에 딱 알맞았겠지.
『거인족이 층계를 통과하면서 닦은 길을 따라, 기어 다니는 혼돈이 천천히 스며들어 탑을 끝내 자신의 신력으로 ‘감염’시킨다는 계획이었지.』
“그럼 이 히든 스테이지는 일종의 전초 기지였던 셈인가?”
『맞아.』
발데비히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내려앉았다.
『거인족의 전사들로서는 이곳에 가족들이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
“……올포원.”
『그래. 위대했던 거인족들도 끝내 그를 넘어서지 못했지. 그러다 이러다간 정말 가족들을 구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거인족들은 최후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60층인 이곳에서 그들끼리 최후의 일인, ‘대전사’를 가리려 했던 거야. 종족이 단 한 명에게 힘을 몰아주면 올포원을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지. 도박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수가 없었던 거고. 그렇지?”
발데비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수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기어 다니는 혼돈은 끝내 쓸모가 없어진 거인족을 버렸다.』
연우는 그 뒤를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보았던 거인족의 시체들. 공포에 잔뜩 질린 채 나무나 바위 따위에 얽혀 있던 그들은…… 아마 쓰임새가 다해 버림받은 거인족 전사들의 가족들이 아니었을까.
그 공포와 두려움은 아마도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 인해 느낀 것일 테고.
[거인족의 사멸에 가려진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알아내지 못한 비밀들이 더 있는 듯합니다. 추가로 비밀을 수집하세요.]
연우는 메시지를 옆으로 치워 두고 물었다.
“네가 그동안 찾아 헤맸던 것이 바로 이거였군.”
『그래.』
“그럼 기어 다니는 혼돈의 종이 된 이유는?”
『당시 사멸했던 거인족 중에 생존자 집단이 있었다면, 믿겠나?』
“뭐?”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어 다니는 혼돈과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 순간.
끼익!
“아저씨. 엄마가 이제 밥 먹을 시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밥 갖고 왔…….”
갑자기 모옥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이것저것이 가득 담긴 커다란 소쿠리를 품에 안은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하지만 앳되어 보이는 얼굴 생김새와 다르게 키는 연우와 비슷하거나 더 클 것 같은 아이.
아이는 집 안에 발데비히 말고도 다른 존재, 그것도 인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품에 안고 있던 소쿠리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 아……!”
팟!
그때, 발데비히가 즉각 움직였다. 아이가 어떻게 소리를 지르기 전에 곧장 뒤쪽에 나타나 뒷덜미를 가격한 것이다. 아이는 곧 힘을 잃고 쓰러졌다.
발데비히는 아이를 조심스레 안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지 몰랐어.』
“그 아이는……?”
『생존자 집단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외부와 일절 단절된 채, 이곳에만 갇혀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래서 선조들과는 다르게 영락할 대로 영락해 버린…… 너희들이 반거인이라 부르는 존재지.』
“……!”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여태껏 거인족과 인간의 혼혈로만 알려진 반거인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 영락해 버린 거인족의 후예라는 사실이 가슴에 무겁게 와 닿았다.
“이런 이들이 이곳에 얼마나 더 있는 거지?”
『처음에는 꽤 있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개체 수가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백 명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발데비히의 손길은 무겁기만 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도 굳이 이들까지는 건드리지 않았지.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녀석이 보기엔 이제 더 이상 사냥개도 되지 못하는 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발데비히의 눈가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문제는 이곳이 세월이 흐르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으로 가득 차 녀석의 성역이 되다시피 했다는 점이야.』
“……그나마 남아 있는 종족들도 살기 힘든 사지가 되었을 테고. 그래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기어 다니는 혼돈과 계약을 맺은 거냐?”
『그래. 다행히 녀석은 내게 관심이 아주 많더군. 탑에 대해 꽤나 정통하다며, 부려 먹기에 좋다고. 내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긴 하지만, 선조들과도 가장 가까운 것 같다고 말이지.』
연우는 처음 발데비히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타계의 신들을 물리치던 격의 개방. 발데비히는 아르티야를 떠나기 전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장기말로써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그래서 보다시피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상태다. 너도 무엇을 하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언제 너의 존재를 읽어 낼지 모르니.』
발데비히는 연우가 원한다면 곧장 외부로 나가는 포탈까지 열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우는 발데비히의 눈가에 자리 잡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포기.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 가지는 눈빛.
일기장 속에서…… 모든 동료들을 잃고 난 뒤에 동생이 보였던 것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보기 싫었다.
바득-
연우는 주먹을 꽉 쥐면서 이를 악물었다.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하나만 묻자.”
『뭐…… 지?』
“네가 퀘스트를 깨고 난 뒤에 얻었다는 티켓. 원하는 시간대의 행성으로 연결시켜 준다던 그 티켓을, 왜 네가 쓰지 않고, 정우를 위해 쓴 거지?”
『…….』
“말해.”
『……그것이 정우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으니까.』
“네가 썼다면 이들을 전부 데리고, 네 고향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이미 늦었…….』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던 건 아니고?”
『……!』
발데비히는 연우의 강렬한 눈빛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여태껏 죽은 사람처럼 가라앉았던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나?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구원 요청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냔 말이다.”
연우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소리쳤다. 그를 따라 은연중에 흘러나온 격의 기세가 모옥을 거세게 흔들어 댔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 길게 하지 말고 진심을 말해, 발데비히. 넌 뭘 원하는 거지? 뭘 부탁하고 싶은 거냐?”
『난, 난…… 아니, 우린…….』
발데비히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주르륵, 그의 눈가를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를…… 구해다오.』
그 말이 끝난 순간.
“그 소원, 받아 주마.”
연우의 등 뒤를 따라, 하늘 날개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마치 신이 직접 이 땅에 강림한 듯, 검붉은 후광(後光)이 찬란하게 번져 나갔다.
발데비히는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홀리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연우가 선언했다.
“너희를 이끌 새로운 왕이자, 신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