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스퀴테 (13)
‘뭐?’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우라노스를 돌아보았다.
경계의 거주자와 우라노스가 면식이 있는 것이야 ‘밤’의 확장을 막다 보니 어떻게든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그 호칭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르지는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우주 창생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고대신(Elder Gods) 중 하나였으니까. 아니, 그저 단순히 ‘하나’라고 치부하긴 힘들었다.
야드-타타그는 엄연히 그들을 대표하는 수장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금은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신앙에서 멀어져 인식하고 있는 이들조차 아주 드물고, 그들 스스로도 이렇다 할 의지나 자아를 가지지 못해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만 존재들. 우주의 기원과 함께하는 태초신(太初神)이자 개념신(槪念神)들 중에서도 야드-타타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높은 편이었다.
타계의 신과 혼세팔신 중 경계의 거주자가 있다면, 고대신들 사이에는 야드-타타그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우라노스가 그런 야드-타타그라고?
‘하지만 야드-타타그는 분명히 내가 알기로……!’
그러다 연우는 계시록에서 봤던 것과 다른 내용에 황급히 우라노스를 돌아봤고.
“야드-타타그라.”
우라노스는 가만히 옛 이름을 읊조리더니 피식 웃고 있었다.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그리듯.
“확실히 그렇게 불리던 때도 있었지.”
그때, 경계의 거주자가 미간을 가늘게 좁히면서 우라노스를 위아래로 훑더니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군. 너는 야드-타타그가 아니야. 그렇다고 하기엔 갖고 있는 것이 너무 볼품이 없다. 영속을 초월하는 전지(全知)도, 삼라를 제어할 전능(全能)도 없나? 너, 찌꺼기로군.”
우라노스를 품평하는 내내, 경계 거주자의 말투에는 마치 쓰레기라도 본 것 같은 경멸이 가득 섞여 있었다.
그 정도라면 조소라도 느껴질 법하건만, 그런 것도 없었다. 마치 우라노스라는 존재를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보아서는 안 되는 쓰레기를 보았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시궁창을 본 것 같은 혐오 가득한 시선.
연우는 그런 경계의 거주자가 보이는 태도에 짜증이 났다. 특히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서 그런 태도를 비치니 역정까지 날 정도였다.
비록 자신을 극한의 환경까지 내몰긴 했다지만.
그래도 연우에게 우라노스는 소중한 조부였다.
따스한 눈빛을 주는 할아버지.
그러나.
우라노스는 그런 시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찌꺼기라…… 뭐,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보다시피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자아와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서 말이지. 그깟 전지와 전능이 있으면 하나.”
아니,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조소마저 맺혀 있었다.
“아무런 변화도 재미도 없는 혼탁한 우물에 머문 채, 그런 강맹한 권능과 힘을 지니고도 자유롭게 사용하지도 못하고서 남의 똥꼬나 빨아 대는 노예들이 뭘 알까?”
“네놈이 감히, ‘아버지’를 능멸하……!”
“아버지? 웃기는군. 제 권속들에게 뒤통수나 맞는 놈이? 그러다 천마한테 얻어터지고 공허 속에 처박혔었지, 아마? 그러니 아둔하단 소리나 듣지.”
“……!”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는 거, 지겹지도 않나? 어차피 그는 너희들 따윈 자식으로 취급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부들부들!
경계 거주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태도.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타계의 신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아득한 세월 동안 ‘그분’-그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를 찾고자 노력해 왔다.
우주 창생 전부터 존재했으나, 그를 두려워한 권속들의 배신으로 꺾이고 말았고.
마지막에는 천마에 의해 공허에 강제로 틀어박혀 깊은 잠에 들어야만 했던 이.
혼세팔신을 비롯한 타계의 신들에게 있어 그분은 추앙이나 숭배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엔 까마득한 존재였다.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을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해 준 근원.
뿌리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분을 일컬어 ‘아버지’라고 부른다지만, 실은 그런 호칭으로도 부족하다고, 불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단 몇 마디로 그런 그들의 신앙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시니컬하게 멍청한 짓이라며 비아냥대고 있었다.
경계의 거주자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니. 이렇게 분노라는 감정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우주 창생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대치를 가만히 살펴보던 연우의 귓가로, 보조 설명을 해 주려는 듯 우라노스의 메시지가 파고들었다.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대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 말이다. 생각보다 ‘밤’에 있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네가 있던 시간대에는 저놈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졌나 보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입니다. 관측되고 있는 정도가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허허! 그래도 다행히 우리들의 노고가 그렇게 영 쓸모 없어진 건 아닌가 보군. 다행이야.』
우리들.
연우는 그 말에서 강한 무게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건 단순히 이 자리에 있는 올림포스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고차원적인 존재들. 우라노스를 비롯한 동료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혼돈과 무질서만이 가득한 세계에 처음으로 빛이 태어나고, 태초의 우주가 점점 확장되면서 수많은 존재들이 여러 법칙과 함께 태어났다가 스러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간혹 살아남으면서 영속성(永續性)을 얻고, 신성(神聖)을 터득하여 눈을 뜬 존재들이 있지.』
첫 우주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빛. 그것이 바로 천마일지니. 그가 처음으로 ‘빛이 있으라’라고 말한 순간, 우주 창생이 시작되었다.
혼탁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법칙과 개념이 구현되며 질서가 서서히 잡혔다. 그런 것들은 자아는 없을지언정, 현상이자 신으로서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개념신이다. 대표적으로 대지모신이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우주 창생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들도 있다.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혼탁한 세상을 거닐었으나, 점차 거기에 깊은 공포와 위기감을 느끼고 천마와 함께 뒤통수를 거세게 때렸지.』
순간, 연우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칠흑왕의 형틀을 소개하던 정보창. 그 속에 ‘???’로 표시되던 배반자들이 있지 않던가.
-〈위대한 아버지〉는 ???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자신에게 이런 비루한 꼴을 선사한 천마에게 원한을 품었다.
-절망과 비탄, 격노로 이어지는 감정들은 이제 〈위대한 아버지〉를 새롭게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는 이제 기지개를 결 준비를 하고 있다.
깊은 공허에 빠져 잠만 자던 칠흑왕에게 절망과 비탄, 격노의 감정을 겪게 했던 존재들!
그럼 그 존재가……?
『그 말씀은?』
연우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판 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느낌.
『그들은 그 대가로 천마로부터 ‘세례’를 받고, 완전히 이쪽으로 전향하게 되었지. 그리고 바라던 대로 새로운 우주를 개척할 수 있었단다.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겪지 않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하단 말이냐! 해서 그들은 대부분 평화와 안식을 얻어, 그 속에 섭리니 법칙이니 하는 것으로 점차 동화되었지. 어차피 남은 힘도 얼마 없었지만.』
하지만 우라노스의 말에는 웃음기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그리하여 너희들 시간대는 물론, 지금 이 할애비가 머무는 시간대에서도, 심지어 신들 사이에서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극히 드물게 되어 버렸다.』
『……!』
『하지만 그네들 중에는 ‘아버지’를 시궁창에 처박고도, 다시 그가 돌아와서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편집증 환자들이 있었어. 참으로 사서 걱정을 하는, 멍청한 이들이 아니냐.』
연우는 여태 가려졌던 장막이 걷히면서 아른거리기만 했던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드-타타그를 비롯한 고대신들은 칠흑왕과의 싸움으로, 우주 창생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대부분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해서 그들은 새로운 우주의 인과율과 삼라만상 따위에 동화되었고.
그래도 여전히 칠흑왕의 등장을 우려한 몇몇은 겨우 영속을 이어 갔을 것이다. 태곳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영락한 채로. ‘찌꺼기’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버티고 또 버텼다.
‘그것이 우라노스를 비롯해 프네우마나 퀴리날레인 걸까……? 하지만 그들마저도 대개 사라지거나 했을 테고, 그 마지막 결과물 중 하나로 올림포스를 남긴 거고?’
어쩌면.
크로노스가 칠흑왕의 사도로 점지되었던 것부터, 연우가 후예로 낙인찍혔던 것까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시스템의 랜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면서 자신에게로 다다른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을 칠흑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칠흑왕의 입장에서는 그럼 내가 자신을 배신한 무리들의 후손인 셈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날 선택한 거지?’
연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뭔가가 있어. 뭔가가.’
분명히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그리고.
『한데, 너에게서는 그런 우리의 옛 주인의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구나.』
우라노스는 연우에게서 그런 칠흑왕의 흔적을 금세 찾아냈다.
왼쪽 날개를 마저 복구하면서 그 속에서 묻어난 ‘죽음’을 읽은 것이다.
『너에게 우리의 업을 이으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둔한 미치광이가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 ‘잠’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 시대의 일은 너희들의 것이니. 늙은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되지 못한다. 우라노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은 내가…… 아니, 우리가 해야 할 일 이지. 죽기 전까지 해 내야만 하는 사명(使命)인 것이니라.』
순간, 우라노스의 눈동자가 시푸른 광망을 토해 냈다.
그리고.
츠츠츠!
그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공간이 굴절되면서 다른 신격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으어, 이게 뭐야? 저놈이 왜 여기 있어?”
“젠장! 어떻게든 ‘밤’이 열리지 않게 겨우겨우 막고 있었는데. 대장!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겁니까, 네?”
“내가 이러니까 크로노스, 저 천둥벌거숭이를 ‘밤’에 던져 놓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거잖수! 결국 사고만 치고……! 으아악! 내가 못 살아!”
“이거 잘못하면 저놈들이 아둔한 새끼 흔적 찾으려고 난리 치는 거 아냐? 위험한데, 이거.”
“안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삭신이 쑤시는구만. 아구구.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시끄러, 이것들아! 하여간 나이들 처먹고 늘어난 건 주둥이밖에 없지! 후딱 안 움직여?”
대놓고 불만 섞인 투로 툴툴거리는 이들에게 우라노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격들은 ‘네이, 눼이’ 이기죽거리면서도 눈빛만큼은 살벌하게 빛내며 경계의 거주자를 경계했다.
당대 우라노스를 따라서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올림포스를 탄생시킨 공신들.
그 정체는 태곳적부터 우라노스와 함께 칠흑왕의 발호를 막고자 노력했던 동지들이었다.
비록 영락을 거듭하여 옛 영광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기에 세상 그 어느 별보다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존재들.
『‘밤’이란, 옛 영광을 잊지 못해 여전히 아둔한 미치광이를 찾아 헤매는 저들의 활동 영역을 가리킨다. 아주 어리석고, 불쌍하지. 그렇기에 더더욱 찢어 죽여야만 하고.』
우주 창생에서 비껴 나가 그저 떠도는 것만이 전부인 것들.
『그리고 저들에 대항해 어떻게든 이 창생된 우주를 지키는 우리를 가리켜 스스로.』
우라노스는 호흡을 고르며 한 박자 쉬었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낮’이라 부른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경계의 거주자가 그사이 분노를 겨우 삭이면서 살의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벌레 같은 것들. 전부 짓밟아 주마.”
경계의 거주자가 신력을 잔뜩 뿌려 댔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자리 잡고 있던 웜홀이 한순간 확 커졌다. ‘밤’이 단숨에 웜홀 바깥으로 쏟아지면서 거대한 어둠이 세상을 잠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는 혼세팔신과 타계의 신들이 불길하게 다가왔다.
“못 본 사이에 참으로 많이도 만들어 두었군. 그래도 외로움이라는 건 느끼나 보지?”
우라노스는 그들을 보면서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낮(에로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라노스와 공신들 사이로 빛무리가 번져 나면서 ‘밤’의 확장을 처음으로 멈춰 세웠다.
그리고.
[메타트론이 강림합니다!]
[바알이 강림합니다!]
“……!”
연우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메시지와 함께.
‘낮’의 한쪽 하늘에서는 대천사의 무리가.
반대쪽에서는 마왕의 무리가 나타나 ‘밤’에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