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탈각(脫殼) (4)
“푸하핫!”
연우가 떠난 자리에서.
비마질다라는 세상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은 온통 모든 것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멀쩡한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간도 일부 균열이 간 데다가, 그 주변으로 번진 시커먼 그을음 위로 신력이 스파크처럼 마구 튀었다.
에러 메시지도 계속 중첩되어서 떠오르는 중이었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알 수 없는 충격으로 일대 시스템이 전원 마비되었습니다!]
[원본 데이터의 훼손 정도가 심각합니다!]
[복구에 필요한 데이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중앙 관리국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저 에러 메시지를 모두 수정하고 복구하려면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할 테지.
어쩌면 손상이 너무 심각한 나머지 원상 복구는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이게 전부 단 일 합 만에 빚어진 결과들.
연우와 비마질다라는 단 한 번의 충돌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만약 하계 구경을 즐겨 하는 신이나 악마들이 있었다면 다들 큰 충격에 젖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들 전부 77층에 시선이 고정된 나머지 이쪽으로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지만.
하지만 연우나 비마질다라는 그런 주변의 시선 따윈 애당초 신경 쓰지도 않는 부류들이었고.
시간만 좀 더 여유로웠다면 밤새도록 칼을 실컷 나누었을 게 분명했다.
-……천마군림보? 신화 속에서도 하지 않았던 짓인데, 여기서?
-영감한테는 미안하지만 겨루기는 차후로 미뤄야겠어. 서둘러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연우는 포탈 밖으로 나온 순간 다짜고짜 날아든 비마질다라의 공격을 여유롭게 튕겨 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비마질다라는 그런 연우를 호락호락하게 보내 줄 호인이 아니었다.
애당초 세상사에 대해 관심도 끊고 살던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게 연우가 아니던가.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에 대한 호승심이었다.
그렇다면 이 호승심을 완전히 떨쳐 내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 줄 수가 없었다.
연우가 자신과 대등하게 일 합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준 것만 해도, 그로서는 여태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초인적인 인내심을 내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리 연우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해도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끝까지 따라붙어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만약 그래도 승부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면, 걸리적대는 것들을 먼저 치워 버릴 용의도 있었다.
이를 테면.
‘올포원과 손을 잡아 혹을 잘라 버릴 수도 있던 것이었지.’
혹.
여태껏 연우가 투쟁의 신위를 얻어 가면서까지 계속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약점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동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주변에 있는 곁가지들까지, 전부.
‘무릇 칼을 든 무부(武夫)에게는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진즉에 끊을 줄 아는 냉철함도 필요한 법일지니.’
냉철(冷徹).
냉정함과 철혈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비마질다라가 보았던 연우는 냉철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약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문제는 스스로가 그것이 문제라는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
그래서 비마질다라는 자신이 대신해서 칼이 되어 줄 요량이었다. 직접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제거해 주고, 그 모든 분노와 원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진짜 제대로 된 승부를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층계 한두 개쯤 날아가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천계가 열린 이후, 그런 싸움을 벌인지가 언제였는지 이제 생각도 나지 않던 터라 더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웅, 우우웅!
비마질다라를 상징하는 신물, ‘세주품(世住品)’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무수히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육계(六界)의 왕으로 오르는 동안 함께했던 분신과도 같은 검.
감면은 그런 오랜 세월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크고 작은 여러 상처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일부 날은 이가 다 빠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비마질다라는 세주품을 수리하거나 복구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이것에 남은 흔적들이 모두 자신이 걸어온 길의 발자취이며, 신화의 증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비마질다라가 신경 쓰는 흔적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데바의 주신격인 인드라가 자신의 딸을 납치하면서 겨룰 적에 남았던, 검면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뇌흔(雷痕)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마가 한창 절교와 겨룰 적에 여의봉이 부수고 지나간, 손잡이 부근에 남은 광흔(光良)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우측 검날 한쪽, 큰 균열과 함께 남은 그을음. 화흔(火痕).
바로 연우와 충돌한 자리였으니.
이것을 본 순간, 비마질다라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더 큰 과실을 딸 수 있겠구나. 이 화흔을 남긴 불길은 이제 막 지펴지기 시작하였으니, 곧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때, 맞닥뜨린다면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을 테지.
그래서 비마질다라는 올포원을 잡기 위해 움직인 연우의 뒤를 굳이 잡지 않았다. 오히려 올포원이라는 좋은 장작이 연우라는 불길을 더 크게 피워 줄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는 바로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비마질다라는 언젠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유언처럼 남겼다가, 이제는 자신의 말버릇처럼 되어 버린 반야심경의 뒤 구결을 가만히 읊조리면서 하늘을 응시했다.
빛의 세계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모두 함께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오, 깨달음이여. 축복이어라.
* * *
‘이…… 건?’
차정우는 너무 경황이 없는 나머지 한동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냉철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올포원이 천마군림보를 밟은 것까지는 기억이 선명했다. 곧바로 77층을 가득 물들이고 있던 빛의 세계가 이상한 불길로 전환되는 것까지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천마군림보는 고대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는 차정우도 어떻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도 너무 강한 것이었고.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이 이어졌을 때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재앙이 되어 있었다.
마치 어느 신화 속에서 우주가 파멸에 접어들 때 일어난다는 겁화(劫火)가 생각날 정도였으니. 거기다 그 뒤에 이어진 겁풍(劫風)이 그나마 남아 있던 것을 헤집어 놓았고, 어디서 치솟았는지 모를 겁수(劫水)가 엉망이 된 모든 것들을 말끔하게 치워 버렸다.
하늘에 무수히 박혀 있던 신들이 줄줄이 추락하거나 소멸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차정우는 고대신의 가호를 깡그리 끌어모아 어떻게든 버티고 버텼다.
물론, 수많은 신들을 집어삼킨 불길 앞에서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차정우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영혼도 없는 상태에서 또 한 번 더 죽어서야 이제는 사자 소환도 더 이상 먹히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내심 올포원을 열 받게 했다는 사실이 통쾌하기도 했다. 그렇게 올포원이 흔들리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본 것이었으니까.
‘남은 뒷일이야 형과 아버지에게 맡겨도 되는 거였고……. 뒤를 더 못 보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차정우는 자신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마법과 신력의 증폭제 역할을 했던 드래곤 슬레이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잔뜩 균열이 퍼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앞에는 라플라스와 흡혈군주, 그리고 페렌츠 백작이 그보다 더 처참한 몰골로 서 있었다.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로, 거친 단내를 풀풀 날리면서 다 부서진 결계를 겨우 떠받치고 있었다.
「괜찮니, 아가?」
그리고 라나가 애타는 시선으로 차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겐 갈리어드나 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스승이었으며.
한때 어머니의 정을 느끼게 해 주기도 했던 사람.
그를 보는 눈길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차정우는 뒤늦게 라나의 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올포원이 쏟아 냈던 군림보의 압박이며 겁화의 소용돌이까지,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라나가 전부 대미지를 감당해서였단 것을.
『스……!』
「다행이구나. 무사해서.」
그래서 이러면 어쩌냐고 따지려 했지만, 그는 도중에 말을 끊어야만 했다.
라나의 시선이 따스해도 너무 따스했으니까.
그 눈빛은.
병석에 계시면서도 ‘아침은 먹었니?’하고 걱정스레 물어보시던 어머니의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전에는 내가 널 지켜 주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지켜 줄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너와 잠시라도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게 참 즐거웠……!」
라나가 흐릿한 미소를 흘리면서 사라지려 했다.
차정우가 반사적으로 재빨리 손을 뻗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손은 허망하게 라나를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고, 라나는 웃는 낯 그대로 잘게 부서졌다. 소멸이었다.
안 된다고.
이렇게 또 가시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네 번째 ‘천마군림보’가 이어집니다!]
두- 웅!
마치 범종을 크게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시 몇 배로 증폭된 새로운 중압감이 스테이지 전체를 짓눌렀다. 이대로 있다가 스테이지뿐만 아니라, 층계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차정우는 몸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분노가 그의 심기를 잡아당겼다. 차정우의 시선이 저절로 위쪽으로 향했다.
올포원. 그가 어느새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78층으로 오르고자 합니다!]
막아야만 한다.
차정우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비록 ‘낮’이니 뭐니 하는 존재들과의 채널링이 모두 단절되었다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스승님의 복수를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하늘로 오르려는 올포원을 어떻게든 이 땅으로 끄집어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망가진 몰골로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지?
천마군림보로 인해 손발이 모두 꽁꽁 묶인 이때, 반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게 남아 있을까?
‘만통(萬通)!’
바로 그런 순간에 떠오른 것이 자신이 가진 특성이었고.
차정우는 모든 감각을 활짝 열었다.
비록 영혼과 육체는 군림보에 의해 묶여 있을지언정, 인식 체계까지 구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
[특성 ‘만통’이 활성화됩니다!]
[인지 영역이 대폭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층계를 넘어선 구획에 대한 탐색이 가능해졌습니다.]
[감각이 무언가를 찾습니다.]
[감각이 무언가를 찾습니다.]
……
[단절된 여러 채널링 중에서 비교적 형태가 멀쩡한 단선을 찾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단선에 접촉을 시도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단선에 접촉을 시도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특성 ‘만통’에 의해 강제로 단선에 접촉이 되었습니다. 끊어진 남은 단선들을 복구하고자 합니다.]
[현재 복구율: 1, 2, 3…… 67…… 89%.]
[소실된 채널링이 일부 복구되었습니다.]
[단말이 회복되었습니다.]
[주체인 고대신들과의 통신이 일부 복구되었습니다.]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
[특성 ‘만통’에 의해 불안정한 영역을 인지 정보로 대체합니다. 기존에 획득한 정보들의 등급이 두 단계 이상 상승합니다.]
[아카샤의 기록을 일부 엿볼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낮(에로스)의 적통’이 제 기능을 드러냅니다!]
완전한 복구는 이룰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올포원의 발을 묶을 생각이었으니까.
[천마가 당신에게 흥미를 보입니다.]
‘미안.’
그래서 차정우는 부서질 듯이 위태롭게 구는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사과를 하면서, 다시 한번 더 칼을 위로 쳐올렸다. 아니, 묶여 있으니 쳐올리‘고자’ 했다.
차차창!
드래곤 슬레이어가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졌다. 산산조각 난 조각들이 비산하며 아름답게 반짝이고, 그 사이로 있을 턱이 없는 궤적이 한 줄 그어졌다.
빛살도, 소리도 없는 궤적. 그제 마음속으로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 공간이 떠밀렸다. 대기가 갈라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에 닿았다. 차정우가 베고자 한 것은 올포원의 발끝.
스걱-
그리고 마치 종이가 잘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올포원을 이루고 있던 배광 중 일부가 베여 나갔다.
심검(心劍).
마음으로 검을 일으켜 적을 베는 경지를 선보인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해 올포원을 둘러싸던 빛무리 중 아주 사소한 일부를 벤 것에 불과했지만.
『대체, 무엇을……?』
그 덕분에 차정우는 그 너머에 있던 올포원의 진짜 얼굴이 충격에 젖는 것을 엿볼 수 있었고.
[네 번째 ‘천마군림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해로 실패하였습니다!]
등정을 시도하려던 올포원의 걸음을 붙들 수 있었으며.
[시간의 태엽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연우가 도착할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수고했다.』
무뚝뚝하지만 따스한 형의 그런 칭찬 한마디와 함께.
세상이 역전(逆轉)했다.
[백 서버가 이뤄집니다!]
쿠쿠쿵!
마치 세상을 구성하고 있던 톱니바퀴가 역회전을 하는 듯한 괴기한 소리.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공간이 뒤집혔다.
여태껏 펼쳐졌던 모든 현상들이 되감기되었다. 천마군림보가 없던 것이 되면서 올포원이 그대로 차정우가 있던 곳으로 떨어지고, 스테이지를 휘몰아쳤던 시원의 불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부서진 신격들이 수복되었고, 층계가 원 상태를 갖추었다.
다쳤던 망자 거인들이며 라플라스 등도 온전해진 모습으로 차정우의 옆에 섰고.
소멸되었던 라나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
그 말도 안 되는 기적 앞에서.
차정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형이.
연우가 넓은 등을 보이면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괜찮냐?”
[삭제된 데이터가 모두 복원되었습니다!]
“그래 보이니 됐다.”
연우는 차정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올포원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팟!
차정우는 흐릿하게 남은 잔상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라나.』
「……그래.」
『우리가 이겼네요. 그쵸?』
결과를 단정 짓는 차정우의 목소리에는 묘한 확신이 들어 있었다.
* * *
[천마가 침묵합니다.]
[천마가 말없이 당신을 살핍니다.]
* * *
『너, 대체 무슨 짓을……?』
올포원은 한순간 자신에게로 닥쳐 온 연우의 공격을 밀어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소리쳤다.
방금 전에 천마군림보를 뚫고 배광을 가른 차정우의 심상 훼절(心想毁折)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보다 자신이 남긴 ‘현상’들을 무위로 돌려 버린 연우의 굴레 조작(覊絆操作)은 더 큰 문제였다.
천리안을 통해 연우가 신왕의 격을 갖추고, 시간의 태엽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남긴 흔적을 ‘무시’해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올포원. 그는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의 화신이자, 자아였으며.
그 속에 구속된 모든 존재들이 보내는 신앙을 갈취하여 현상과 결과를 확정 짓는 사용자(User)였다.
근데 그의 의도를 무시하고, 시스템이 결정지은 사안을 뒤집어 버린다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바이러스.
시스템을 배제하고, 오히려 좀먹는 존재.
하지만.
“무슨 짓이긴.”
그때까지도 올포원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네 밥그릇 뺏는 소리지.”
연우는 단순한 바이러스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관리 영역까지 전부 넘보고 있다는 것을.
[어뷰저 ###이 비공개 설정해 두었던 자신의 이름을 공개 설정으로 바꾸었습니다!]
[각 층계의 ‘명예의 전당’에 비공개로 기록되었던 이름들이 전부 공개 처리되었습니다!]
[1층 1위 ### → 차연우]
[2층 1위 ### → 차연우]
[3층 1위 ### → 차연우]
……
[76층 1위 ### → 차연우]
『……!』
그제야 올포원은 연우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시스템의 화신으로서, 탑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들의 신앙을 갈취하기 때문에 올포원(All for One)이라는 신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대신과 개념신을 포함한 모든 초월자들이며 플레이어들이 덤벼들어도 그를 꺾지 못했던 건, 그들이 달성한 힘의 총합만큼을 그가 소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게로 쏟아지는 신앙 중 일부를 도중에 갈취할 수 있다면?
[모든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어뷰저 차연우에 대한 점수가 합산됩니다!]
[축하합니다! 그동안 깨지지 않았던 신기록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랭킹 1위가 등극하였습니다!]
[1위: 비바스바트 → 차연우]
그동안 부동의 1위로 기록된 자리를 빼앗는 것만큼, 신앙을 갈취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도 없으리라.
화아악!
그렇게.
올포원으로 향하던 신앙선들이 꼬이면서 다수가 연우에게로 맞닿았고.
그것들은 일제히 배광(背光)으로 드러나 연우를 빛무리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만큼 올포원을 둘러싸고 있던 빛무리는 힘을 잃어 갔으니…….
[알 수 없는 힘이 어뷰저 차연우에게로 깃듭니다!]
[음령이 활성화됩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뤄 두었던.
연우의 탈각(脫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