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08화 (708/862)

8화. 지구 (4)

“세샤. 위험하니 일단 넌 물러나 있어.”

연우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칠흑이 번져 오면서 세샤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7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콰아앙!

연우는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제우스에게로 쇄도했다.

* * *

‘뭔 이런……!’

제우스는 갑자기 이상한 공간으로 ‘빨려들어’ 오게 되자 크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오효효! 칠흑을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게 좋으실 텐데요?

-그래 봤자 백 년도 묵지 못한 피조물 따위.

-그 발언, 아스가르드나 다른 초월자들이 들으면 기겁을 하겠는데요?

-하! 그런 머저리들과 나를 비교하는 건가? 나는 그래도 신왕을…….

-오효효효. 알고 있습니다. 제우스 님이 신왕을 꺾은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지, 그렇다고 해서 신왕의 칭호를 대신 쥐게 된 건 아니었을 텐데요?

-…….

-여하튼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비록 유전적 형질을 공유하지는 않아도, 어쨌거나 당신들은 형제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그는 칠흑입니다.

-……그래서, 뭐?

-칠흑이란 말입니다. 천마가 겨우 잠재울 수 있었던. 모든 우주의 꿈을 그리는 칠흑이요.

제우스도 칠흑왕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신 중 신. ‘황’이라는 단어로도 규정하기 힘들 원초적인 관념의 존재. 아니, 관념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을 존재.

하지만 그래도 제우스는 연우를 여태껏 내심 깔보고 있었다.

그가 칠흑왕의 힘을 거머쥐었고, 그중에서도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올포원-비바스바트가 죽고, 탑이 붕괴되는지도 지켜본 바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뿐.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제우스, 자신도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식령에 식령을 거듭하고, 주선석도 하나 우연찮게 탈취하여 습득할 수 있었다.

이미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은 오래전에 탑에서 천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루시엘에 못지않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루시엘이 14개의 찬란한 영혼석을 품에 안고 있었다지만, 자신은 그에 못지않은 창조신의 신위를 안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위대하기로 따진다면 자신이 가장 위대한 셈이었다.

그러니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막냇동생을, 감히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신을 운운하는 놈을 처치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크로노스를 다시 무저갱으로 빠뜨리고, 올림포스를 이 손에 넣어 진짜 ‘신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 그가 볼품없이 직접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자신을 대신해 움직일 장기 말을 찾고자 했고, 그 대상으로 김범승을 선택했다.

김범승은 시작의 날에 가족을 잃은 고아였다. 다만, 보통 실종 피해 가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시작의 날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이란 점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방주’가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었다. 그리고 그런 ‘방주’를 쫓아 달려온 여러 존재들로 인해 여태껏 얌전하기만 하던 지구에 커다란 격동이 일어난 것까지도.

당시 상황이 너무 급박했기에 여러 존재들은 김범승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표현이 옳겠지. 그들에게 한낱 피조물의 목격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으니까.

자신들로 인해 생긴 후폭풍에 도시 하나가 궤멸되었어도. 한 어린아이가 부모와 형제를 잃었었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김범승은 시작의 날을 일으킨 그 원흉들을 찾기 위해 떠돌아다녔다.

웃긴 점은 어려울 거란 생각과 다르게 원흉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단 점이었다.

차소영.

최연소 S급 플레이어로 소개되었던 아이가, 당시 현장에서 목격했던 존재와 똑같이 생겼었으니까.

그렇기에 복수 따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제우스가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충실한 제우스의 개가 되어 세샤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제우스 역시 세샤의 뒤를 밟다 보면 연우가 언젠가 발견될 거라고 예상했었기에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연우를 발견했을 때는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형으로서. 그리고 신으로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이 제 분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나섰건만.

정작 본때를 보여 주기는커녕, 오히려 본체가 녀석의 심상 세계로 끌려오고 말았으니.

더군다나 저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연우의 뒤편에 시립해 있는 것.

본체로 보이는 모습.

용?

아니.

까마득한 세월을 지배자로 살아왔지만, 용 중에 저런 모습을 갖춘 종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의 신력, 악마의 마기, 용의 마력, 거인의 투기까지…… 초월종이라 불리는 네 개 종족의 힘이란 힘을 전부 극단적으로 쑤셔넣은 것 같았다.

절대 융화될 수 없는 것들이 합쳐진 만큼, 그만큼 부자연스럽게나 언밸런스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런 것도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칠흑을 따라 퍼져 나오는 드래곤 피어는 제우스의 양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기까지 했으니.

그 순간.

제우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라고 해도, 자신이 기세 싸움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못내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칠흑을 무시하지 말라던 이블케의 경고가 떠올랐으니까.

『인간 따위……!』

제우스는 인상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뇌기를 발산시켰다. 녀석이 칠흑에다 자신을 가둬 두려 한다면, 그 칠흑을 찢어 버리면 될 일.

주선석, ‘자선(Caritas)’과 ‘근면(Industria)’이 각각 시린 빛을 토해 냈다.

영혼석의 마력이 섞이면서 몇 배로 증폭된 뇌기가 거미줄처럼 사방팔방 뻗쳐 나가면서 당장이라도 연우를 찢어 버릴 것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분노만큼이나 대단한 열기였다.

하지만 제우스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눈앞으로 휙 하고 지나간다 싶더니, 어느새 그의 입 앞으로 스퀴테의 칼끝이 달려들고 있었다.

“내가 언젠가 말한 적 없었나?”

그리고 스퀴테만큼이나 가까이 접근한 연우가 차갑게 웃고 있었다.

“넌 혓바닥이 너무 길어.”

[프레셔]

[스트림]

[브레스]

콰르르릉!

검뢰가 터졌다. 게이트를 폭발시켜 버리고, 여러 타계의 신들을 찢어 버리던 그 검뢰.

하지만 제우스의 눈에는 거대한 형체의 용이, 아가리를 크게 젖히면서 숨결을 내뱉는 것으로 보였다.

연우가 휘두르는 검뢰는 용종의 권능인 브레스처럼, 원소를 극한으로 압축시켜 터뜨리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제우스는 ‘흡!’하고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뒤로 빼면서 뇌기를 앞으로 끌어모았지만, 그보다 먼저 스퀴테가 그의 안면에 작렬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제우스는 우측 입꼬리 부근이 길게 찢어진 상태가 되어 아래로 추락했다.

그의 얼굴은 한순간에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칼자국이 귓가까지 길게 이어지면서 얼굴의 절반이 통째로 날아간 데다가, 검뢰의 화력 때문에 다른 부위도 온통 새카맣게 타 버린 탓이었다. 머리통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신력으로 인한 상처 회복이 전혀 이뤄지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두 개의 영혼석이 공명(共鳴)을 일으키면서 막대한 양의 마력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얼굴로 침투된 화상이 더 크게 번져 나가면서 삽시간에 신체(神體)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죽음: 독사(毒死)’가 이식되었습니다!]

[‘죽음: 아사(餓死)’가 이식되었습니다!]

[‘죽음: 병사(病死)’가 이식되었습니다!]

[‘죽음: 갈사(喝死)’가 이식되었습니다!]

……

죽음에는 수많은 종류가 따른다.

중독에 따른 독사, 굶어 죽는 아사, 병에 의한 병사나 더위로 인한 갈사, 노사(老死), 형사(刑死) 등등…….

그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루니. 그것은 스스로를 불멸자라고 부르는 신과 악마조차도 결코 완전히 피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연우는 바로 그런 죽음이란 개념을 대변하는 개념신이나 다를 게 없었고.

거기다 이식된 죽음에 일부 묻은 ‘투쟁’의 개념은 무언가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 거세게 저 항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선석의 반발은 오히려 죽음의 개념에다 기름을 끼얹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감히! 감히이이이……!』

“훨씬 더 잘생겨졌군.”

『뒈져 버렷!』

제우스는 으르렁거리면서 뭉쳐 뒀던 벼락을 크게 터뜨렸다.

우르르, 콰쾅!

이대로 칠흑을 모두 불사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뇌격이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쿠르르르-

연우는 제우스를 빠르게 뒤쫓으면서 검뢰를 잇달아 터뜨렸다. 이극에서 삼극, 사극에서 오극까지. 칼끝에서 터진 검고 붉은 섬광은 너무나 손쉽게 제우스의 뇌격을 튕겨 내고, 막아 내고, 찢어 버렸다.

하지만 여기저기로 번져 나가는 폭발과 매연, 그리고 마력장이 너무 거센 탓에 제우스는 미처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푸하하! 그래.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

덕분에 자신의 뒤편에서 공허를 열어젖히면서 나타나는 연우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 그 재수 없는.”

연우의 조소 섞인 목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릴 정도였다.

“눈깔부터 압수.”

촤아악!

연우는 스퀴테를 횡으로 휘둘렀다.

〈천공의 벽〉. 제우스가 자랑한다는 권능은 제대로 형성되기도 전에 박살이 나 버렸다.

아니,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는 족족 스퀴테가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쉽게 갈라 버렸으니까. 그리고 칼끝은 끝내 영혼석이 박혀 있던 제우스의 눈두덩이 위를 빠르게 갈라 버렸다.

촤아아악!

『……!』

제우스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이미 체내로 파고든 죽음 중 ‘갈사(渴死, 목이 말라 죽음)’가 목젖과 식도 부근을 바짝 오그라들게 만들어 영혼의 목소리까지 가로막아 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제우스는 더욱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던 영혼석의 마력 공급이 도중에 차단되니, 그나마 고통을 덜어 주었던 통각 제어권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죽음: 소사(燒死)’가 이식되었습니다!]

화르르륵!

화상 자국에서 튀어 오른 불씨가 한순간 몸 전체로 완전히 번지면서, 마른 장작을 태우는 불길처럼 활활 불타올랐다.

연우는 잇달아 스퀴테를 추가로 휘두르면서 제우스의 손발을 잘라 내고, 나중에는 가슴팍에까지 칼끝을 박아 넣었다.

퍽. 그런 소리와 함께, 스퀴테가 박힌 자리로 검은 그림자가 먹물처럼 번져 나오면서 불길을 완전히 뒤덮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령을 시도합니다!]

찰칵찰칵!

톱니 이빨이 거세게 부딪치면서 제우스의 영혼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제우스의 신화 속에 담겨 있던 ‘옥황상제’를 식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우스의 신화 속에 담겨 있던 ‘아툼’을 식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제우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이를 거부하려 아득바득거렸다. 그동안 힘겹게 식령했던 창조신의 신화들이 모조리 연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영혼석은 물론 두 눈까지 잃어버린 상황에서 저항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츠츠츠츠-

결국 그를 게걸스럽게 탐하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쭉정이처럼 깡마르게 변해 버린 몰골이었다.

마치 뼈다귀 위에 피부 거죽을 씌운 것 같은 모습. 생기를 모두 빼앗긴 모습이었다.

여기서 그냥 칼만 휘두르면 제우스의 목숨도 너무 쉽게 사라질 테지만.

『……연우야.』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크로노스가 내뱉은 한 마디에 연우는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 거두지는 못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대신에 제우스를 절대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촤르륵, 촤륵!

칠흑 곳곳에서 피어난 공허에서 쇠사슬이 튀어나와 녀석의 몸뚱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꽁꽁 묶어 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연우는 그런 녀석을 한쪽 어깨에 가볍게 이면서 자리를 벗어났

그래도 제법 강해졌기에 저항이 거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워도 너무 쉬웠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졌는가.’

피식.

연우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실소가 무너지는 칠흑에 묻혀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