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41화 (741/862)

16화. 레아의 유산 (5)

배신자의 후예가 되어 이런 곳에 직접 올 줄이야.

보아하니 ‘낮’과 ‘밤’의 관계를 아는 것 같은데 말이지.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것이 너희네가 말하는 모성애라는 건가 보지?

활자들이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하지만 레아의 시선은 현인의 손에 붙잡혀 있는 차정우의 영혼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들이었다.

그토록 마음이 여리고, 책임감이 강한 나머지…… 아픈 엄마의 병을 고쳐 보겠답시고,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뛰어든 나의 아들.

오랫동안 주신으로서 살아왔기에, 레아는 아들의 영혼이 풍겨 대는 사념을 차례로 읽어 낼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 겪어야만 했던 온갖 사건과 사고들이 전부 그 속에 다 담겨 있었다.

동료들을 만나고, 승승장구하고, 탑을 오르며, 사랑을 나누고, 영웅이자 우상이 되었지만, 결국 벽을 넘지 못해 쓰러지고, 친구들에게 버려지고, 연인이 떠나고, 홀로 남아 버리게 된…… 어머니에게 건네줄 엘릭서를 드디어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로 넘어갈 힘이 없어 결국 일기장만 남겨야 했던…… 일들.

그 모든 것을 본 순간, 레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막내아들이 겪은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가 아플 때면 자신도 아팠고, 그가 눈물을 흘릴 때면 자신도 슬펐다. 그리고 끝내 죽음을 맞았다는 것을 봤을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레아를 더 괴롭게 만드는 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칠흑이 선택한 집행자가…… 정우가 아니었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레아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 대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정우가 칠흑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설마, 연우가?

그 순간, 레아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쯤 연우는 지구에 홀로 있을 테니까…….

문제는 연우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아무런 당부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으니.

쿵!

그때, 뒤쪽에서 ‘문’이 크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레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들어왔던 ‘문’은 꿈쩍도 않겠다는 듯 단단히 닫힌 채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여태 감지할 수 없었던 문지기의 존재도 느껴졌다.

어쩌면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던 생각이 현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던 거야!’

애당초 칠흑이 바랐던 건.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피를 이은 집행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건 부성애도 포함되는 것이겠지.

‘나’로서는 사실 이해가 잘 안 가긴 하는 감정이다. 예전에는 비슷한 것을 느낀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많이 희석되어 버린 것이라.

하지만 그 사사로운 감정 덕분에 프네우마와 퀴리날레, 시공(時空)의 재료를 다시 한자리에 모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

레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막내아들, 차정우를 미끼로 삼아 크로노스가 탑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레아마저 이곳 칠흑에 갇히게 만들었다.

이로써 칠흑으로서는 천마에게 빼앗겨야만 했던 프네우마와 퀴리날레를 되찾은 것이 되었고.

집행자로 점찍어 뒀던 연우를 혼자 남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한 수가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금부터 연우가 동생의 원수를 갚겠답시고 앞으로 겪게 될 우여곡절을 생각해 본다면…… 그 과정에서 비틀리는 심사와 품게 될 한을 고려해 본다면…… 이보다 칠흑의 집행자에 어울릴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집행자는 ‘꿈’을 닫고, ‘굴레’를 멈추게 만드는 자.

세상에 대한 짙은 원망만큼 이를 시행케 하는 크나큰 원동력은 또 없을 테니.

결국.

실상 레아가 칠흑의 의표를 찔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까지, 전부 칠흑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것에 불과했던 셈이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을……!’

레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든 것이 꼬여 버린 지금. 칠흑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버린 이상, 어떻게든 차정우라도 살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연우도 걱정 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바로 눈앞에 있는 아들부터 구해야 할 것 만 같았다.

“당신은…… 원하던 모든 것을 갖게 되었죠?”

그런 셈이지.

“그리고 당신의 손에 붙들린 내 아이는 그럼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일 테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현인이라 불린 마성은 섣불리 레아의 유도신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정도의 얄팍한 수는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레아는 그가 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목구비가 없어서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을 단순한 유희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그녀로서는 불쾌하기만 했다.

타인의 인생을 멋대로 희롱하면서 저런 모습이라니. 비록 그 생각을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 내 아이는 풀어 주세요. 우리 부부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써 쓰임은 다했잖아요? 이미 영혼도 쇠…… 락할 대로 쇠락했으니 필요도 없을 테구요.”

‘쇠락’이란 단어를 꺼낼 때, 레아의 목소리는 유독 떨렸다. 막내 아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언젠가 자신을 찾아와 줄지도 모를 연우를 위해 회중시계에다 일기장과 자신의 기억을 심어 넣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쎄. 이것 역시 따지고 보면 너희들의 혈육이 아닌가? 지금 점 찍어 둔 후보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이 아이를 대체제로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보다시피 이 아이도 품고 있는 한이 적지 않아서 말이야. 그건 어떻게 생각하지?

레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나’는 종말을 원한다. 이 ‘꿈’이 끝나길 바란다. 그리고 너희들 전부 이 ‘꿈’이 끝나고 나면 기억도 사실도 잊은 채 사라질, 그런 조각에 불과하지. 그렇다면 뭔들 못 할까.

“돌려주세요.”

싫다만?

“그러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당신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을 망가뜨리겠어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요.”

화아악!

그 순간, 레아의 몸이 희뿌연 배광을 뿌려 댔다. 온통 어둠으로만 가득한 세상에 아주 자그마한 점에 불과하지만, 빛이 밝혀졌다.

겨우 그녀라는 존재를 유지하고 있던 신력이 급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보다시피 저는 이미 격도 잃고, 신앙도 잃은 몸이에요. 그리고 겨우 남은 이 신력을 전부 소진하고 나면…… 저는 소멸하겠죠. 당신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굴린 ‘굴레’ 끝에 겨우 얻은 퀴리날레를 잃어버리고 말 테고요.”

협박을 하겠다는 건가?

“협상을 하자는 겁니다. 온전한 저를 드릴 테니 제 막내아들은 풀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아는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으라면 그마저도 꿇을 태세였다.

그만큼 그녀는 간절했고, 차정우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키득.

레아는 그런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당장 여기서 너를 붙잡아 소멸을 막을 수도 있을 텐데.

“그보다 제 소멸이 빠를 테죠.”

음. 그래서야 곤란한데 말이지. 확실히 너의 말대로 이 아이의 쓰임새는 다 끝나기도 했고. 어쩐다……?

한순간, 레아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현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역시나 안 되겠어.

아무래도 이 아이가 이번 ‘꿈’의 대적자라서 말이야.

“……!”

* * *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란 말이냐! 연우야!』

현인이 내뱉은 말에 경악한 건 레아만이 아니었다.

말없이 둘을 지켜보던 크로노스도 마찬가지였다.

집행자와 대적자.

둘의 싸움은 매번 ‘굴레’가 굴러갈 때마다, ‘꿈’이 반복될 때마다 이어진다.

집행자는 칠흑왕의 대리자로서, 대적자는 천마의 대변자로서. 그러니 둘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애당초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고, 등에 지고 있는 배경이 상반된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꿈’의 집행자는 연우였다.

그런데 대적자는 여태 나타나질 않아 혹시 빠진 건가 싶었는데…… 설마 그게 차정우라니!

두 사람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로서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기에, 황급히 연우 쪽을 돌아보는데.

『……설마 너, 알고 있었던 거냐?』

연우는 그와 달리 표정이 고요했다. 현인을 노려보고는 있지만, 흐트러지는 기색은 없었다.

크로노스는 한순간 끊어올랐던 화가 싹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짐작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무슨……?』

‘정우는 탑이 무너질 때 ‘낮’의 후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고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택했고, 메타트론과 바알도 마찬가지였죠. 그만한 존재라면, 대적자로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

크로노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째서…… 이런……!』

크로노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깊게 잠긴 나머지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이런 빌어먹을 운명의 굴레를 물려줘야만 했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연우가 한창 칠흑왕의 자아들과 다투고 있을 무렵, 녀석들은 동생의 행방에 대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보지 못하였다.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었으나, 사라졌다.

원래 자신들이 갖고 있었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대답.

처음에는 이것을 동생의 행방이 홀연히 사라진 것으로 여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애당초 그 말들에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다면 절대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연우는 당장 칠흑으로 되돌아가 현인과 생사결단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꾹 참고 있었다.

자아들이 했던 말 중에는 그런 말도 있었으니까.

-칠흑 속에 있는 ‘꿈’의 어딘가로 흘러 들어간 것일지도.

그 말뜻은 곧…….

연우의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현인이 다시 활자를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 돌려주지 못한다.

대적자를 풀어주어 다시 천마가 날뛰기 시작하면 ‘나’만 골치가 아파지니까.

그러니.

현인을 둘러싸고 있던 칠흑이 크게 출렁였다.

네가 네 아들의 곁으로 오려무나.

화아아악!

레아의 발밑에서부터 칠흑으로 이뤄진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여태 물러나 있던 마성들도 똑같이 그녀 쪽으로 달려들었다.

“당신, 실수했어.”

하지만 레아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더 화려하게 신력을 불태웠다.

“아들을 구하려는 엄마만큼 센 건 없거든?”

칠흑의 손이 레아를 잡아채려다 말고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결계에 튕겨 났다. 마성들도 똑같이 투명 막에 가로막혀서 아등바등했다.

칠흑이 어떻게든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 했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공간의 퀴리날레.

일정 권역에서만큼은 창조주나 다름없는 권능을 발휘하는 그 능력이 발동되고 있었다. 비록 이곳에서 그녀가 설정하고 있는 공간이야 육체와 그 주변의 한 뼘에 불과하고, 그만큼 신력도 송두리째 타오르는 중이었지만, 결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려한 빛줄기가 치솟았다.

막내아들에게로 달리는 레아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려드는 마성들. 부딪치고, 막히고, 엉키는 등, 칠흑은 단숨에 난장판이 되었다.

키키키키킥.

재밌어. 재밌다고!

엄마, 엄마, 엄마! 나도 엄마가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현인은 고요한 시선으로 레아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레아가 달리다 말고 도중에 방향을 확 바꾸었다. 마성들도 똑같이 그쪽으로 따라붙으려는데, 그 순간 레아 앞쪽의 공간이 뒤틀렸다. 그리고 깨졌다. 레아는 공간에 난 균열 사이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것은 퀴리날레의 또 다른 권능이기도 했다.

현인 앞으로 레아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차정우의 영혼을 낚아채려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손끝이 영혼에 닿으려는 찰나, 현인은 몸을 한 걸음 뒤로 뺐다.

레아는 어떻게든 균열로 손을 더 깊숙하게 밀어 넣으려 했지만,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녀를 휘감던 배광이 뚝 그치고 말았다. 신력이 바닥 났단 신호였다.

“아, 안……!”

레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배광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레아는 마성들로 이뤄진 늪 사이로 빠지고 말았다.

정우야.

아주 미약하지만 그런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수많은 마성들이 내뱉는 괴성에 완전히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힘 빼지 말고, 따로 자리를 내어 줄 테니 아들과 지낼…….

현인은 어느새 마성에 완전히 잠긴 레아의 영혼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퀴리날레를 완전히 포박하려는데.

「엄…… 마?」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렸다.

설마?

현인은 크게 놀라 황급히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고.

「엄마!」

어느새 인간의 형체를 되찾은 차정우를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현인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쇠락할 대로 쇠락한 영혼이었다. 언제 망령으로 떨어져도, 아니, 소멸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영혼. 백(魄)도 사라졌기 때문에도 자아도 잃어 버렸다. 분명 아무 기억이 없을 텐데, 어떻게 정체성을 되찾은 거지?

「비켜! 엄마한테서 떨어져!」

하지만 현인이 놀란 틈을 타, 차정우의 영혼은 어느새 녀석에게서 벗어나 레아가 만들어 놓은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고.

「왜 내 엄마한테 달라붙어서 지랄들이야! 너네들 엄마한테나 가라고! 아, 너네들 엄마 없었지? 꺼져! 이 엄마 없는 새끼들아!」

어느새 마성들 위로 나타나면서 레아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마성들의 틈바구니에 아직 잠기지 않았던 레아의 손끝이, 그렇게 막내아들의 손끝과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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