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42화 (742/862)

17화. 레아의 유산 (6)

“정…… 우야!”

레아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얼핏 보이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자신이 혹시 환영이라도 보나 싶었다.

하지만.

「꺼지라고, 쫌! 이 엄마 없는 새끼들아!」

차정우가 외치는 소리가.

손끝에서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손길이.

그리고 어떤 직감이 레아의 눈을 번뜩 뜨이게 만들었다.

파앗!

레아는 이를 악물며 마지막 남은 진력을 쥐어짰다.

배광이 다시 화려하게 터졌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촛불이 꺼지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 남은 불씨를 화려하게 태우고, 해가 지기 전에 직전이 가장 밝듯이.

레아가 내뿜는 배광도 여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가장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아는 정우의 손을 완전히 붙잡아 힘껏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에게 들러붙었던 마성들이 줄지어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키키키키킥.

말도 안 되는.

과연. 퀴리날레. 이대로 놓치긴 아까워. 아주.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도 재미난지 웃어대는 놈들을 뒤로하고, 레아는 정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비록 영혼밖에 없기에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레아는 정우를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 그동안 겪었을 고통과 힘들었던 여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직접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엄마’라면 누구나 다 알 수밖에 없는 초능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엄…… 마!」

정우는 떨리는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봤다.

그로서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대체 어떻게 그녀가 여기에 있는지. 여태껏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기억 속에는 항상 야위어있기만 하던 어머니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러 온다면, 그건 아마도 형일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형에게는 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도와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으니까.

그가 아니라면, 아버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보았던 아버지는 항상 신비로웠던 분이었으니까.

형은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자신은 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탑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도, 전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과 형이 지켜 드려야 하고, 옆에서 챙겨 드려야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런 곳에 계실 줄이야.

어머니에게 하고픈 말은 ‘엄마’라는 단어에 모두 담겨 있었다. 이 품, 이 체온, 이 손길…… 전부 느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겠다며 탑으로 들어온 만큼, 그가 가장 바랐던 것들이 바로 이것이었다. 건강한 어머니를 한번이라도 더 안아 드리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탑에 뛰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반절만 이뤄진 모양이었다. 다시 어머니를 안을 수는 있었지만, 정작 그런 어머니는 다시 빠른 속도로 야위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러지 마시라고, 안타까운 맘으로 바라보는데.

짜아악!

갑자기 등짝에서 불이 났다.

「아아악! 왜 때려요!」

정우는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쌍심지를 켜신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상황도 잊은 채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그딴 말 쓰라고 했어? 욕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엄마가 누누이 말했었지? 대체 누구야? 누구한테 그런 말 배운 거니?”

한순간, 정우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야…….」

“누구?”

「형…….」

“연우도 그랬다고?”

레아의 두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끄덕끄덕…….

“대체 어디서?”

「게임…….」

“이것들이!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컴퓨터를 아예 끼고 살았구나! 공부해야 되니까 엄마가 하루 1시간씩만 하라고 그랬었지?”

「어, 엄마 …….」

정우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혼란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분명 감격스러운 재회의 순간일 텐데, 왜 혼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고3이란 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정우는 차마 자신이 탑에 온 게 족히 몇 년은 되었으니까, 군대만 안 갔으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았을 거란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하여간 돌아가기만 해 봐! 둘 다 혼날 줄 알아! 알았어?”

「……네.」

그렇게 정우가 완전히 자라목이 되는데.

와락!

레아가 정우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쁜 것들. 이 엄마를 두고 그렇게 가 버리면 대체 어쩌자고……! 너희들이 그런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줄 알았니?”

정우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라는 의미도 알 것 같았다.

형이 왔었구나.

어쩌면 아버지까지도.

「죄송…… 해요.」

자신 한 사람으로 인해 온 가족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은 건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태 크게 보이던 어머니가 다시 왜소해진 것 같았다.

내가 그만큼 큰 걸까, 아니면 어머니가 작아지신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모자가 상봉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그러던 그때.

활자들이 다시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내는 건 ‘나’ 쪽도 안 되어서 말이지.

정우는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현인이 이쪽으로 손을 크게 뻗치고 있었다. 칠흑이 거대한 와류를 그리면서 이쪽으로 떨어졌다.

뇌벽세였던가? 언젠가 마군에서 우연찮게 볼 수 있었던 제천류 오행공의 비기와 얼핏 비슷해 보이는 기예 앞에서 정우는 하늘 날개를 펼치려 했다.

그 역시 영혼이 금세 무너질 듯 위태로웠지만, 어머니를 더 이상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데.

찌걱

촤아아악!

별안간 두 모자 앞으로 균열이 생기더니 크게 벌어지면서 틈새가 생겨났다.

그건?

현인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정우야, 지금!”

정우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레아의 다급한 외침을 듣자마자 재빠르게 균열 쪽으로 몸을 던졌다.

〈하늘 날개〉

언젠가 넘버링 002까지 터득했던 헤븐윙의 시그니처 스킬이 개방되면서, 거대한 날갯짓과 함께 두 사람은 균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인이 던진 칠흑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철컥, 쿵!

그리고 균열은 도로 닫히고 말았다.

이런!

그 모습을 본 현인의 활자에는 낭패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새 칠흑의 한편에다가 ‘꿈’의 조각을 찾아 자신의 신력을 묻혀 놓았었나?

그렇게 해서 작지만 단단한 심상 결계를 구축하고…….

역시 퀴리날레라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저 여아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는지.

레아는 이미 처음 칠흑의 문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그리고 정우의 영혼을 찾았을 때부터, 칠흑 속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던 아무 ‘꿈’의 조각에 힘을 심어 두었던 것 같았다.

언제든지 여차하면 칠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비록 그녀가 원래 있던 ‘꿈’이 아닌, 이미 사라져 버린 옛 ‘꿈’의 파편이니만큼 활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호랑이굴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가장 중요했겠지.

현인이 여태 미처 그걸 파악하지 못했던 건 어디까지나 퀴리날레가 가진 특징 때문이었고.

아니면 방심을 한 것이거나.

어쨌거나 레아는 여태 현인이 보았던 무수히 많은 퀴리날레 중에서도 가장 선조의 권능을 잘 이해하고, 잘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퀴리날레부터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인데. 거기다 대적자까지 놓치고 말았고. 이래서는 일이 꼬일 텐데. 흠!

하지만 활자의 내용과 다르게, 정작 현인은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는 투였다.

레아가 벌인 한 수가 깜찍하긴 했지만, 결국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일단은 손댄 ‘꿈’의 조각이 어느 짐승의 것인지부터 알아봐야겠어.

* * *

모든 것이 온통 공허로만 가득 찬 세계 속.

이곳은 칠흑이라고 하기에도, ‘낮’과 ‘밤’의 경계 선상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면 우주 창생에 합류하지 못한 찌꺼기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공간이었다.

어느 누군가는 옛 허신(虛神)들만이 떠돌아다니는 허수 세계(虛數世界)라 부르는 공간에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현실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 엄마! 제 말 들려요?」

정우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레아를 계속 흔들어 깨웠다.

깜빡.

깜빡.

레아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노이즈가 잔뜩 꼈다. 정우는 조금씩 부서지거나 옅어지는 육체를 어떻게든 이어붙이고자 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정…… 우야.”

레아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그런 막내아들을 바라봤다.

정우는 화들짝 놀라 엄마를 바라봤다.

「예.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어떻게…… 든…… 너만은…… 여길 벗……!”

「……!」

정우는 한순간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광경.

이전과 똑같았다.

병원에서 매번 위기를 넘길 때마다, 고통에 허덕이시면서도 언제나 자신과 형을 먼저 걱정하시던 모습.

지금도 어머니는 당신의 걱정보다,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너…… 만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눈이 감기는 게 보였다. 이대로는 정말 위험할 것 같았다.

「안 돼요! 안 된다구요! 형도, 아버지도 아직 못 왔는데 대체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정우는 다급하게 레아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의 영력이라도 나눠 드릴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역시 다 꺼져 가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어서 어머니를 되살릴 수 있다면 모를까, 이미 신력을 불태운 어머니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생각만이 정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머니도 도저히 자신을 구할 수 없을 것 같던 상황 속에서 자신을 구하셨다.

그렇다면 자신도 어떻게든 어머니를 구할 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아!’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애당초 그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가.

‘형.’

눈이 번뜩 뜨였다.

‘형이랑 아버지가 계셨잖아?’

두 사람이 이미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은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화아아아!

〈하늘 날개 - 최대 출력〉

그의 두 날개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마치 레아가 배광을 뿌리듯이, 시린 빛무리가 날개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한순간 주춤했던 영력이 한껏 증폭되어 체내를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감각이 확장되고, 인지 영역이 한껏 넓어졌다.

‘최대한.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정우는 이렇게 힘을 쥐어짤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모든 영력을 두 눈에다 집중시켰다.

〈용마안〉

두 눈에 맺힌 용의 동공이 한껏 커졌다. 그 시야에 오롯이 레아만이 담겼을 때,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정보가 한순간 대량으로 뇌리에 쏟아졌다.

‘큭……!’

정우는 이를 악물었다.

용종은 진리를 추구한다. 용마안은 그런 진리를 ‘관측’하게 하는 눈이었으니. 그중에서도 진리를 품고 있다는 신에 대한 정보만큼 좋은 연구 대상은 없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락(Lock)이 걸려 있을 신의 정보는 현재 몸이 약화되면서 다량으로 정우에게로 쏟아지고 있었으니.

‘퀴리날레인지 뭔지…… 어머니가 가진 권능은 저 이상한 새카만 놈들도 물리칠 정도였어. 거기에 어떤 해답이 있을 게 분명해. 어머니의 자식인 나에게도 분명히 거기에 재능이 있을 거고.’

정우는 바로 이곳에서 어머니의 모든 권능을 ‘복사’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로.

물론, 자신은 어디까지나 필멸자에 불과하고, 초월자의 격을 보이는 어머니를 모방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영혼도 쇠락해 가는 마당에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로서는 당장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우는 자신의 재능을 믿었다.

〈만통(萬通)〉

속성 구분 없이 모든 기운을 원활하게 수용하고,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응용까지 해내는 자신의 재능이라면.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천성까지 생각해 본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투둑.

투두둑.

어디선가, 영혼 한편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늘 날개가 잔뜩 과열되었다. 영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뜯기기만 했다. 정신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찔거렸지만, 정우는 어떻게든 참고 또 참았다.

이 기회를 잘만 넘기면 그동안 높게만 생각하던 탈각과 초월을 이룰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소리는 분명 영혼의 한계를 벗어던지는 소리일 테니까. 그에 맞춰서 하늘 날개도 희뿌연 배광을 뿌려 대면서 자꾸 커져 갔다.

하지만 정우는 거기에 집중할 겨를 따윈 없었다.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가진 ‘퀴리날레’의 힘이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분석해 낸 순간.

‘됐 …… 다!’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신력을 바탕으로 퀴리날레의 첫 번째 권능을 전개했다.

〈폐쇄 공간(閉鎖空間)〉

기존의 크기보다 수십 배로 커진 하늘 날개가 정우와 레아를 감쌌다.

정우는 그 속에서 절대 어머니를 놓치지 않겠다며 품으로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주변을 온통 두꺼운 결계로 둘러치면서 모든 시간적 흐름을 강제로 정지시켰다.

이 공간 속에서만큼은 그가 창조주였고, 지배자였다. 시간을 조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해 두면 부서지려는 어머니의 존재를 어떻게든 붙들어 둘 수 있으리라. 일종의 봉신(封神)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전자인 자신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 만큼, 같이 봉신이 되어야겠지만.

어떠랴.

언젠가 형과 아버지가 자신들을 구해 주러 올 것인데.

「그래도 좀 빨리 찾아와 주라, 형. 아버지.」

그리고.

스르륵!

동면(冬眠)에 들었다.

* * *

[모든 재생이 완료되었습니다.]

[이후의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념이 끝난 뒤.

“아버지.”

『그래. 가자꾸나. 네 엄마와 동생이 모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우와 크로노스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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