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43화 (743/862)

18화. 혼세팔신 (1)

『헤르메스.』

헤르메스는 대기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 연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지금부터 병사들을 풀어서 내가 일러 주는 곳들을 체크해 봐. 미후왕…… 제천대성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후보지들이다.』

그러면서 연우는 헤르메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몇 개의 장소들을 쭉 가르쳐 주었다.

헤르메스는 난데없는 명령에 당혹해 하면서도, 천계와 하계를 수도 없이 오고 갔던 전력 덕분에 빠르게 후보지들을 머릿속에 저장해 둘 수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휘하의 신들을 시켜서 즉시 각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테나가 연우의 대리라면 헤르메스는 복심(腹心), 즉 비서라는 말이 올림포스 내에서 돌아다닐 정도로 그와 밀접했기에, 그는 연우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곧장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조금 멀리.』

이에 연우는 아주 짤막하게 답변했다.

『네 할머니 모시러 간다.』

“……!”

『그러니까 내가 올 때까지, 전원 대기하고 제천대성 찾아 놓고 있어. 당분간 연락은 안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연우와의 채널링이 뚝 끊어졌다.

* * *

『칠흑으로 되돌아갈 거냐?』

크로노스는 당장 움직일 차비를 갖추는 연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장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도 여태 모른 척 발을 빼고 있던 현인을 족쳐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이었지만.

“아뇨. 지금은 아닙니다. 조금 돌아서 갈 생각입니다.”

『어째서?』

“현인은 분명히 아직까지 정우와 어머니가 계신 ‘꿈’의 조각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찾았더라도 동면은 깨우지 못했을 거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냐?』

“찾았다면 제가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하긴. 그도 그렇군.』

크로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왕의 자아들은 대개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저마다 다른 생각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들은 항상 붙어 다니며 하나의 의사를 도출해 내는 군집체의 일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크고,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아주 많았다.

물론, 차정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한 뉘앙스로 연우를 속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언젠가 들킬 수밖에 없는 속성의 거짓말이었다.

그런 면에서 만약 현인과 녀석을 따르는 마성이 차정우와 레아를 찾았다면, 연우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칠흑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기도 했었으니까. 있었는데도 찾지 못했다면 아들과 형으로서 실격이었다.

“그러니 우회해서 정우가 있는 공간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방법은 있고?』

“예. 마침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

“‘밤’…… 경계의 거주자를 찾을 생각입니다.”

『……!』

크로노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경계의 거주자는 수많은 ‘경계’ 위를 넘나들면서 살아가는 녀석입니다. 그것이 존재 의의이기도 하구요. 시공간, ‘꿈’의 단면이나 조각들, ‘낮’과 ‘밤’의 경계선…… 그중에 정우가 있을 허수 세계도 존재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건 뒤집어서 말하면 너에게도 아주 위험한 장소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버려진 ‘꿈’의 조각들. 그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상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정우는 거기다가 권능을 걸어 아예 외부에서 찾을 수조차 없게끔 막아 버렸다.

외부에서 들어갈 수도 없지만, 안에서 나올 수도 없는 곳.

칠흑왕의 일부이지만, 그렇기에 접근하기에 더딜 수밖에 없는 장소.

현인이 아직 정우 등을 회수하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예.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더구나 어차피 한 번은 결착을 내야 할 녀석들이었잖습니까? 우마왕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전력을 보강할 필요도 있고, 현인이 있는 한 칠흑도 완전히 제 것이 아니니 우선 ‘밤’부터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래. 네가 결정한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크로노스는 뿌듯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짙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다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한한 신뢰.

『그럼 가자꾸나. 네 동생과 엄마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 * *

[칠흑왕의 자아가 강림합니다!]

연우가 공간을 가르면서 건너간 장소는 차정우의 사념체 등이 있는 곳이었다.

탑이 무너진 이후,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충돌을 거듭하던 세계와 우주의 경계선.

혹은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만한 존재가 나타나자,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낮(에로스)’이 칠흑왕의 자아를 인식합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모두 칠흑왕의 자아가 강림한 장소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전부 칠흑왕의 자아가 있는 곳에 출현하고자 합니다.]

……

[‘밤(녹스)’가 칠흑왕의 자아를 주시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연우는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 정중앙에 난 실선을 따라 한쪽은 푸르른 대낮이, 다른 한쪽은 시커먼 한밤이 깔린 세상.

‘낮’의 진영 쪽에서는 수많은 강림들이 이뤄지는 반면에, ‘밤’의 진영 쪽에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모습을 비치지 않고 연우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대응하려는 것일 테지.

연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우선 ‘밤’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동생의 사념체를 먼저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미카엘이 강림합니다!]

[우리엘이 강림합니다!]

[라파엘이 강림합니다!]

……

[‘말라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장 먼저 메타트론을 대신해 말라흐를 이끌기 시작한 미카엘을 필두로, 대천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평원을 가득 채웠다.

“묵직한 것이 내려오는 느낌이 들더라니. 이거, 아주 대단한 인물이 납신 것이었군.”

미카엘은 첫 대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호승심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연우의 격을 느껴서 그런지 더더욱 강한 투기를 뿜어냈다.

반면에 안면을 익히는 정도가 전부였던 우리엘이나 라파엘 등은 경계심이나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연우는 저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일단 같은 편에 서긴 했다지만, 저들의 입장에서 연우란 존재는 이제 증오하고 대적할 수밖에 없는 칠흑왕의 ‘일부’였으니 경계심이 드는 게 당연했고.

사사로이는 자신들의 오랜 지도자이자 서기장이었던 메타트론을 잃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으니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해되는 것과 그걸 포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

『이것들, 하는 짓거리가 좀 마음에 안 드는데?』

크로노스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아들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말라흐의 짓거리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따지고 보면 무너지는 탑에서 녀석들을 살려 주었던 건 연우의 ‘자비’가 아니었던가.

『원래대로라면 탑에 깔려서 다 뒈지고도 남았을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까불어?』

하물며 크로노스는 본래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놈들을 가장 싫어했다.

현역 시절보다 성격이 많이 죽었다지만, 패왕으로서의 기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고오오-

그가 신왕의 격을 고스란히 드러내자, 우리엘과 라파엘 등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전성기 시절보다도 더 격이 상승한 크로노스는 메타트론이 돌아온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아래에 있던 존재들이 크로노스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일.

말라흐의 일원들은 10여 년 동안 ‘밤’과 전쟁을 치르면서 자신들도 그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었지만, 크로노스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야만 했다.

목이 서늘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어느새 그들의 목젖에 닿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런 크로노스의 뒤에 서서 무심한 눈을 한 연우를 보면서 재차 떠올릴 수 있었다.

‘밤’과 한창 전쟁을 치를 무렵에 자신들을 ‘굽어다’ 보던 연우의 시선을.

그것은 감히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 같은 피조물들에게 저 하늘에 박힌 별이 까마득하듯, 사실 따지고 보면 연우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그런 위치가 아니던가!

『눈 깔아라. 죄다 모가지 돌아가기 전에.』

결국 기세 싸움에서 몇 수 밀린 말라흐의 대천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뒤로 주춤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후후.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그런 그들을 더 압박하고자 하던 크로노스 앞으로, 미카엘이 나서서 발로 지면을 세게 찍었다.

파앙!

말라흐를 뒤덮던 격의 회오리가 거짓말처럼 꺼졌다.

순간, 크로노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너, 제법 하는구나?』

“싸움은 좀 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메타트론 밑에 싸움밖에 모르는 미친개가 한 마리 있다더니. 목줄을 쥐지 않고 있었다면 진즉에 제 주인을 물었을 거라고 소문났던 게, 바로 너였나 보군.』

본인을 두고 독설도 그런 독설이 없었지만.

정작 미카엘은 태연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저는 그저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할 뿐인 것을요.”

『미친개가 목줄을 끊고 스스로 주인이 되었으니, 말라흐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군.』

“좋은 말씀이시라 생각하겠습니다.”

크로노스는 능글맞게 대답하는 미카엘이 영 못마땅한 눈치로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러던 그때.

[아가레스가 강림합니다!]

[바싸고가 강림합니다!]

……

[‘르 인페르날’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펜리르가 강림합니다!]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르 인페르날을 지휘하기 시작한 아가레스를 필두로 악마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마지막에는 그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도 있었지만.

멍! 멍멍!

[펜리르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반갑다면서 꼬리를 마구 흔듭니다!]

『저것은 나의 것이니 함부로 눈독 들이지 말라고 누차 말했던 것을 그새 잊은 것이냐!』

여전히 꼬마 모습을 한 아가레스는 강아지인 펜리르의 위에 올라탄 채로 떽떽거리고 있었다.

멍멍!

『뭐? 침 바르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고? 이놈!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거늘, 나이도 지극히 어린 개새끼가!』

멍!

『꼬, 꼰대 같은 소리 그만하라고? 감히 르 인페르날의 수장이자 동부의 지배자인 이 아가레스 님에게 못할 소리가 없……!』

멍멍, 멍!

『틀니 압수? 이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그래도 자꾸!』

그리고 두 사람도 미카엘처럼 크게 달라진 구석이 없어 보였다. 저렇게 아옹다옹하면서도 아가레스는 펜리르에게서 내려올 생각을 않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의 격이 이전보다 훨씬 흉포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지난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처절하게 사투를 벌여 왔다는 뜻일 테지.

그리고.

[아테나가 강림합니다!]

[람이 강림합니다!]

……

[올림포스의 친위군(親衛軍), ‘디스 플루토’가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친위군이 일제히 오랜만에 뵙는 주군에게 예를 갖춥니다!]

처처척!

아테나를 필두로 한 디스 플루토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모습을 드러내고.

[권속들이 돌아옵니다!]

[데스 로드(샤논)가 재귀속되었습니다.]

[데스 로드(한령)가 재귀속되었습니다.]

……

[아크 리치(부)가 재귀속되었습니다.]

연우의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면서 마침 곳곳에서 쏟아지던 그림자를 속속들이 모두 삼켰다.

「요시! 분위기 메이커, 샤논 님 등장! 우리 주인, 그동안 나 없어서 많이 심심했쥬?」

시끄러운 녀석도 그대로였다.

역시나 이전보다 훨씬 격이 달라진 부도 충성스럽게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낮(에로스)의 후계자’가 강림합니다!]

차정우의 사념체도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우야.”

『……뭐야? 징그럽게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봐?』

녀석은 오랜만에 만난 형에게 반갑다는 말을 꺼내기가 뭣했던지 툴툴대면서 그렇게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연우도 여기에 장난을 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진지한 투로 말했다.

“어머니 찾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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