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All for One (6)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
남들이 본다면 공허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곳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신경질 적으로 눈을 뜬 사내.
제우스(Zeus).
신왕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끄집어내리고, 새로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하늘’의 주인이자 올림포스의 왕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곳은 그가 창안한 꿈속의 세계.
즉, 심상이 잔뜩 투영된 또 하나의 성역이란 뜻이었다.
원한다면 이 공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마음껏 꾸밀 수 있었지만, 그는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창조’의 신위를 가지고 있었어도, 정작 뭔가를 만드는 것에는 그다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가 직접 이곳에 모습을 내비친 것은 그저 뭔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새로운 존재가 침입을 시도합니다.]
[오딘이 강림합니다!]
콰르르릉!
바로 그때, 제우스 앞으로 마치 그를 위협하듯이 벼락 하나가 뚝 떨어졌다. 충분히 그를 다치게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충격이었지만, 제우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타난 얼굴은 사나운 기질을 자랑했으니. 모든 걸 찍어 누르고 군림하려는 듯한 제우스의 기질과 다르게, 그는 모든 걸 부수고 망가뜨릴 것 같은 전장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오딘(Odin). 아스가르드의 주인이었다.
지금 이 광경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랐으리라. 대전쟁이 선포된 두 세력의 왕이 직접 한 자리에 맞닥뜨리게 된 셈이었으니.
그런데 두 사람은 사나운 기질을 서슴없이 드러낼지언정, 전쟁을 치르는 이들답지 않게 적의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만 자느라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같더니.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보군?”
제우스는 오딘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입술 끝을 비틀었다. 천마증을 크게 앓았던 것과 다르게, 오딘의 기세는 잠들기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력이 더 강해져 있었다.
“누가 그딴 말을 하지?”
“그럼 아닌가?”
“꿈과의 전쟁도 전쟁이다. 내게는.”
오딘이 관장하는 신위는 ‘폭풍우’ 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전쟁. 그리고 황홀.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삶은 오로지 전쟁으로만 가득했으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삶의 이유와 존재 가치를 느꼈다. 그러는 동안에는 황홀에 젖어 새로운 자아가 깨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렇기에 오딘은 항상 전쟁을 치러 왔다. 그것은 눈을 떴거나 감았거나 다르지 않았다. 설사 죽더라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 다가올 대예언 ‘신들의 황혼’에 맞서기 위해 그가 터득한 방식이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제우스는 오딘과 말싸움을 해 봤자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차갑게 눈을 떴다.
“그보다 이제 원하는 대로 판은 짜였고, 천마의 아들도 장기말로 올렸다. 이것으로 정말 천마를 끌어들일 수 있는 거 맞나?”
“그렇게 해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
오딘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제우스는 저 목석같은 작자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아무리 손을 써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 뭐, 어차피 천마의 아들놈이 탑에 찾아온다는 것도, 아스가르드에 들어설 거란 것도, 전부 네가 ‘봤던’ 것들이니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알아서 ‘보고’ 있을 테지.”
오딘이 내다보는 미래시(未來視)는 단순히 절대자들이 인과율을 통해 엿보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굴레’의 단면을 엿본다. 그리고 휘하에 둔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 세부 사항을 덧대기 때문에 여기에 혼선이란 있을 수 없었다.
천마의 아들이 아스가르드에 들어와 결국 두 주신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것도, 애당초 그가 미래시로 내다보았던 것이 아니던가?
육체를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천마증을 겨우 억누르면서 지금 눈을 뜬 것도, 우연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여간 이번에 걸린 게 아주 많으니…… 저 빌어먹을 천마 놈을 한번 낚아 보자고.”
자신을 이딴 시궁창에 처박은 천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곧 볼 수 있겠다는 사실에 제우스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설사 천마를 죽이는 데는 실패하더라도, 그 아들이 다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주 힘들어할 테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 전쟁이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서 다른 주신들도 참여하기로 하였고 말이지.’
겉으로만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대전쟁일 뿐, 이번 일에 개입된 주신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탑의 세계를 뒤흔들 수도 있는 커다란 행사.
절대 단합할 수 없을 것 같던 천계가 처음으로 손을 합쳐서 나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
오딘은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혹은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무표정하기만 할 뿐이었다.
* * *
“다른 건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도록 하지.”
우르드는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에 소속되어 있다면, 당연히 자신들을 알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우리가 공략할 곳은 16층이다.”
“……?”
“……?”
“그곳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대원 중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10층 이하의 저층 구간은 올림포스가, 11층부터는 30층이 넘는 많은 층계가 아스가르드의 영역이지 않던가.
특히 16층은 아스가르드 소속 신들의 신전이 상당수 모여 있는 곳. 그런 곳을 ‘공략’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대전쟁이 발발하면 그 즉시 그곳에 대농장 하나가 올림포스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첩보가 있었다. 이미 그 안에는 올림포스 놈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하고.”
‘대농장’은 신전 소유의 토지로, 신전에 봉사하는 일꾼들이 사는 마을을 의미했다. 신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할 뿐만 아니라, 꼬박꼬박 신앙도 바치는 곳이란 의미로 붙은 멸칭(蔑稱)이 원래의 이름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농장에 사는 인간들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노예, 혹은 가축.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곳에 투입된다는 건…… 짙은 피 냄새가 벌써부터 코끝을 찌르는 것 같아, 대원들은 모두 인상을 굳혀야만 했다.
“출발은 내일로 넘어가는 자. 놈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들이닥칠 예정이니, 다들 단단히 준비하고 넘어오도록.”
우르드는 할 말이 모두 끝났다는 듯, 다른 두 발키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세 발키리가 떠난 뒤에도, 비프로스트의 대원들은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허……!”
“제기랄.”
“초장부터 우리를 길들이기 하겠다는 건가. 개 같네.”
그들은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을 짓거나, 욕지거리를 내뱉기 바빴다.
아무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일반 양민들을 상대하라니. 말이 전쟁이지, 학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스스로를 전사라고 여기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작전이었다.
그래도 명령은 이미 떨어졌다. 상명하복의 체계가 확실한 아스가르드에서 이를 거부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비바스바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대원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에도 말없이 무뚝뚝한 편이던 막내의 얼굴이 눈에 띌 만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야, 너……!”
비바스바트가 눈이 돌아가면 진짜 미친놈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들 그를 말리려 했지만, 누군가 가로막기도 전에 이미 그는 대원들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고 있었다.
가름은 발키리 세 자매를 배웅하기 위해 같이 밖으로 나간 상태. 그들을 따라잡아서 무슨 이야기라도 나눠 봐야겠다는 게 비바스바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아! 정말이지 이딴 식으로 치사하게 굴 거야, 너희들?”
……어째서인지 가름과 발키리 세 자매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 걸까. 비바스바트의 걸음이 나무 그늘에서 뚝 멈췄다.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보다 일개 전투 부대의 대장이 위대한 발할라의 발키리에게 이렇게 말 놓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우르드는 비프로스트 앞에서와 다르게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가름의 속을 긁어 대고 있었다. 베르단디와 스쿨드도 마찬가지로 가름을 비웃는 듯한 눈치였다. 그들은 원래 아는 사이였던 걸까?
“계급장으로 찍어 누를 거면 집어치워. 발키리의 훈장이라면 아직 나도 갖고 있으니까.”
“어머! 그렇게 말해서 서운하기라도 했니? 왜 그렇게 흥분해? 동기끼리.”
가름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억지로 화를 삭이면서 말했다.
“16층으로 올림포스 놈들이 흘러 들어간 거, 너희들이 모른 척 내버려 둔 거지?”
“흠?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대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대농장 하나를 본보기로 지워서 내부에 아무도 반발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려는 거 아냐. 원래 너희 발할라가 뒤통수 안 맞으려고 잘 써먹던 수법이잖아.”
“흐흥. 너는 그 때문에 약속되었던 많은 영광된 자리와 권능을 박차고 나와서는 지금은 일개 부대장으로만 있고 말이지.”
“…….”
우르드는 입술을 꾹 다문 가름의 턱을 검지와 엄지로 붙잡으면서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귀엽고 귀여운 자매 가름이여. 너는 언제가 되어야 철들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 네 것이었잖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찾을 수 있을 테고.”
탁!
가름은 우르드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깟 자리 필요 없으니까 너나 가져가.”
“준다는 것도 싫다면, 뭐, 어쩔 수 없고.”
우르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네가 뭘 어떻게 꼬아 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이라면 괜히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최대한 빨리 말해 주라. 그래야 내가 반란죄를 먹여서 우리 사랑하는 동기 자매님의 머리를 친. 히. 잘. 라. 주. 지. 않겠어? 오호호.”
우르드는 그렇게 까랑까랑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가름의 어깨를 일부러 세게 툭 치고는 옆을 지나쳤다. 뒤따르는 베르단디와 스쿨드도 한껏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꽉!
가름은 세 발키리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잔뜩 분개했다.
비바스바트는 가름과 세 발키리 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쉽게 여기지 못할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고민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달래 줘야 하나?’
저렇게 화를 삭이는 걸 봐서는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가름으로서는 부대장으로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여 주었다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결국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할 때.
“……후우! 나와.”
가름은 숨을 크게 고르더니, 갑자기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바스바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안 나와?”
“…….”
“도끼 칼이라도 그쪽에다 던져 줄까?”
“……제가 있는 거 아셨습니까?”
비바스바트는 계면쩍은 얼굴로 모습을 비쳐야만 했다. 가름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렇게 대놓고 살기를 줄줄 흘려 대는데 모르는 게 병신 아니냐?”
“그렇…… 습니까?”
비바스바트는 볼을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퉁명스럽게 투덜대는 가름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보군.’
전쟁터의 미친개라고도 불리는 저 대장을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아무 래도 아스가르드에 1년 넘게 몸을 담고 있다 보니 사고 회로도 엉망이 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가름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조금 전까지 펄펄 끓어오르던 분기가 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조금 이상했다.
“오늘 본 거 모른 척해. 딴 놈들에게는 비밀이니까. 그럼 용서해 준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생각 정리할 게 있으니까 이만 가 봐.”
가름은 더 이상 말할 기력도 없다는 듯 손을 가볍게 저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비바스바트는 어쩐지 그런 가름의 뒷모습이 다른 어느 때보다 작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자신이 평상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가름도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일지 몰랐다.
일반 양민들이 다칠 수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발할라의 더러운 술수에 항의하는 모습은 원래 그가 ‘밖’에서 보이던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어째서인지. 비바스바트는 가름을 응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혼자만의 생각과 슬픔을 안은 그녀의 마음을 응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대장.”
“……또 뭐?”
그래서 비바스바트는 가름을 불렀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돌아봤다.
“대장의 신념이 있는 곳이 바로 길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거기엔.”
“……?”
“제가 함께 있을 거고요.”
“……!”
가름은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하다가, 곧 말뜻을 알아채고 놀란 눈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발할라를 떠난 이후.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녀의 생각을 훤히 읽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너……!”
“그러니까 뽀뽀해도 됩니까? 반했습니다.”
순간, 감동으로 가득 찼던 가름의 얼굴이 싹 굳어지고.
저벅저벅.
그 쪽으로 조용히 다가오더니.
빠아악!
비바스바트의 정강이를 거세게 걷어찼다.
“그거 성희롱이거든, 자식아!”
“아아악!”
비바스바트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