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All for One (7)
[이곳은 16층, ‘삶의 물레’의 관입니다.]
16층에는 총 세 개의 갈림길이 크게 나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마다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길을 따라 들어선 수많은 신전과 거기에 딸린 농장을 제외하면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스테이지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제시하는 곳이라던가? 하지만 비바스바트도, 비프로스트의 대원들도,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다른 전사들도 뭔가 점지를 받은 운명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는 충분히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순간이지.’
비바스바트는 이를 악물었다. 가름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미 작전은 시작된 상황.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의 결과에 따라서 16층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재난이 닥칠 수도 있었다.
『이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13분.』
산 중턱. 우르드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넓게 펼쳐진 마을을 굽어보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으니, 그녀는 텔레파시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넓게 펼쳐진 대농장 한쪽에는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마을의 모든 집에 불이 꺼져 있어 고요하기만 했다. 아마 내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기 위해 모두 깊은 잠에 든 것일 테지.
그래서 비바스바트는 아직도 저 안에 올림포스의 군병이 몰래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대전쟁이 발생하기로 했던 정시가 되는 즉시, 바로 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니…… 모두 준비.』
처처척!
우르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두 발키리는 물론, 비프로스트의 대원들도 모두 무기를 꺼내며 눈을 차갑게 빛냈다.
양민 학살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명령은 명령. 군기가 바짝 든 정예병답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속에는 비바스바트도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실은 전혀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데…… 대장.
-또, 뭐? 이상한 소리 해 대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일은 다시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충동적으로 그런 말이 나와서……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정말 그대로 놔둘 겁니까?
-…….
-대장도 그게 싫어서 발키리에게 항의한 거 아녔습니까? 그대로 정말 따를 생각입니까?
-명령 받는 입장에서 그럼 까라면 까야지. 왜? 항명이라도 하게?
-그건…….
비바스바트의 머릿속으로 지난날 가름과 나눴던 대화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를, 가름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정말 너를 믿어도 될까?
-그 말씀은……?
-헛소리나 늘어놓던 너를 정말 신뢰해도 되겠냐고.
그런 말을 꺼내던 가름의 눈빛은 평상시와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숙취에 찌들어 놀기만 좋아하던 사람의 눈이 아닌,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비바스바트는 어쩌면 그 눈빛이야말로 원래 가름의 ‘진짜’ 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키리로 활약하던 때 갖고 있었으나, 이상과 현실에 크나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꺾여 버리고 말았던 눈.
-대장.
-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신뢰를 왜 저버리겠습니까?
비바스바트는 또다시 헛소리를 해댄다고 가름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았지만, 결국엔 가름의 신뢰는 사는 데 성공할 수 있었으니.
그의 예상대로, 가름에게는 그녀만의 작전이 따로 있었다.
‘따로 양민들만 구출할 거라고 했었지. 올림포스 놈들이 분리해 억류하거나 인질을 잡아서 협박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억류된 사람들만 먼저 구출할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승산이 생긴다.’
올림포스 군을 이쪽에서 빠르게 해치운다면, 그만큼 대농장이 받게 되는 피해는 줄어들 테니까.
물론, 세 발키리가 반란군이라며 대농장의 학살을 지시할 수도 있었지만, 올림포스만 빠르게 거둬 낼 수 있다면 가름이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렇기에 비바스바트는 작전이 떨어지는 즉시, 재빠르게 인질의 위치부터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많은 행성을 전전하면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겪어 왔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그때, 우르드의 목소리에 비바스바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3분.』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1분.』
다른 발키리들과 비프로스트도 땅을 박찰 준비를 마친 그때.
『자정 정각. 쏴라!』
우르드가 거칠게 손을 흔들자, 대기 중이던 베르단디와 스쿨드가 일제히 움직였다. 두 사람이 아래쪽으로 겨누고 있던 활의 시위를 놓는 순간, 수많은 이펙트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빛의 화살들이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진 채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서둘러야 해!’
파아아앗-
비바스바트는 감각 영역을 최대로 확장시키면서 빠르게 절벽 아래로 내달렸다. 폭격(爆擊)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아랫마을이 입는 피해는 커지게 된다.
“어? 어어……?”
“쟤 왜 저렇게 서둘러?”
“뭐 해? 어서 안 가고!”
“젠장! 좀 뜸 들이다가 가려 했는데……!”
폭격이 끝난 뒤에나 움직일 예정이었던 비프로스트는 순간 적잖게 당혹해했지만, 곧 큰 동요 없이 비바스바트의 뒤를 따랐다.
콰릉! 콰릉! 콰르르릉!
쿠르르르- 콰콰콰!
쿠쿠쿠쿠……!
정신없이 포격이 연거푸 이어졌다. 저기에 휘말렸다간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 그런데도 비바스바트는 불타는 마을로 들어서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데.
‘……없어?’
비바스바트는 마을에 발을 들여놓다 말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분명히 이렇게 폭격이 이어진다면 놀라서 다급하게 뛰쳐나와야 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던 것이다. 우르드의 말대로라면, 이곳은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가둬 둔 상태로, 올림포스의 군들이 장악하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비바스바트는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버려진 유령 도시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이 감각을 속이 도록 마력장을 내뿜고 있는 게 전부.
그 순간 드는 생각은 하나.
‘함정!’
비바스바트는 뒤따라오던 비프로스트 대원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늘에 잔뜩 맺힌 먹구름에서부터 벼락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올림포스의 신벌(神罰)이 집행됩니다!]
우르르, 콰콰콰쾅!
콰르르릉-
하늘을 찢고 대지를 울리는 불벼락이 잇달아 지상을 강타했다.
“이게 뭐야……!”
“올림포스 놈들, 설마 덫을 친 거야? 젠장!”
“발할라 놈들 대체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대원들은 일제히 마력을 있는 힘껏 개방하면서 연이어 떨어지는 불벼락을 옆으로 쳐 냈다. 함정에 빠진 것에 짜증 섞인 기색을 드러냈지만, 당혹해하는 모습은 없었다.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다 보니 이런 경우가 잦지는 않아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발키리 놈들이 어떻게든 마력핵을 찾아 줄…… 뭐야, 저것들 왜 이쪽으로 달려오는 거야?”
그래도 이쪽에는 오딘이 아끼는 발키리가 셋이나 있는 만큼, 올림포스의 기습도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우르드 등이 숨어 있을 올림포스의 본영을 찾는 게 아니라, 잔혹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저마다 다른 무기를 쥐고서 질주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적을 상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저년들 설마……?”
“사르스! 데반! 피해, 어서!”
세 발키리 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르스와 데반은 동료들의 다급한 외침에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콰아아앙!
후두둑-
선두에 있던 우르드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가차 없이 휘두르는 게 먼저였다.
큼지막한 칼자루가 스친 뒤, 두 대원은 피떡이 된 채로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붉은 핏자국과 우수수 떨어지는 살점들뿐.
“우르드으으으!”
가름은 괴성을 지르며 단박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비바스바트가 지난 1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신력이 개방되면서…… 그녀가 맹렬하게 휘두른 도끼 칼과 창날이 부딪쳐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쿠르르릉!
도끼 칼과 창날은 서로 한 치도 밀려나지 않은 채, 팽팽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다만, 잔뜩 성이 난 가름과 다르게 우르드는 한껏 한쪽 입술을 비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서둘러서 원래 네가 가졌어야 할 자리를 가져가는 게 어떻겠냐고. 그렇게 질질 끄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죽여 버리겠어!”
“예전이라면 그럴 수 있었겠지.”
우르드의 비웃음이 커졌다.
“하지만 신력의 사용법도 거의 잊어 먹은 것 같은 지금으로선 그러기가 힘들 것 같은데?”
콰릉, 콰릉, 콰르르르-
가름과 우르드가 맹렬하게 부딪치는 동안.
‘이게 대체……!’
비바스바트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가 손을 잡은 것도 손을 잡은 것이지만, 왜 비프로스트를 같이 제거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림포스야 비프로스트에 원한을 갖고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아스가르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설마 나 때문에?’
순간, 비바스바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 것이라면. 최대한 숨기려 했던 것이 들키고 말았고, 외부 세계에서 저질렀던 사건들이 발할라에 들어간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스가르드가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비프로스트까지 이렇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두 발키리, 베르단디와 스쿨드가 이쪽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타깃, 천마의 아들.”
“내가 보았던 너의 미래는 ‘죽음’. 그 자리는 바로 이곳일 테지!”
‘아버지 때문이었나?’
미래를 내다본다는 스쿨드가 내뱉은 ‘예언’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비바스바트는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막내야! 어서 피할……!”
대원들은 비바스바트를 구해 주려다 말고, 갑자기 그를 중심으로 감돌기 시작하는 빛무리에 말을 잇지 못했다. 화려한 배광(背光)이었다.
화아아아!
성스럽다.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대원들의 머릿속을 똑같이 스쳐 지나갔다.
거룩하다. 혹은 고결하다. 그런 느낌도 받았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비바스바트가 보이는 모습은 아주 찬란하고 위대하게만 보였으니.
아스가르드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수많은 신들을 보아 왔던 그들로서도, 이만큼 순결한 배광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대원들은 비바스바트가 선보이는 저런 모습이야말로, ‘진짜’ 신이 강림하는 광경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은.
콰르르릉!
진짜 신이 신벌을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합장했던 손을 떼어 거칠게 허공에다 뿌리는 순간, 배광이 더 찬란하게 번쩍였다. 길쭉하게 일어난 빛무리가 두 발키리를 뒤덮었다.
그리고.
“……어?”
스쿨드는 비바스바트 쪽으로 달리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분명히 달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내 미래는 봤으면서 네 미래는 못 봤었나 보지?”
그제야 스쿨드는 비바스바트가 그녀 쪽으로 냉소를 던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아, 아악! 아아아악! 내 다리이이이!”
뒤늦게 자신의 상반신이 하반신과 분리된 채, 뒤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털썩.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자리로 피가 미친 듯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아아악. 스쿨드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신력을 돌려서 육체 회복을 시도해도,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비바스바트가 남긴 마력이 신력의 움직임에 훼방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앗!
비바스바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베르단디에게 달려들었다.
베르단디는 스쿨드가 너무나 허망하게 당했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혹해하면서 방어를 취하려 했지만, 이미 비바스바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축지(縮地)〉
〈대수인(大手印)〉
“……어디로?”
“너는 현재를 본다면서? 그럼 네가 겪게 될 현재는 어떻지?”
“……!”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그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비바스바트가 휘두른 손에서 번쩍인 장풍이 그녀의 등에 거칠게 작렬했다.
콰직! 콰르릉-
“커헉!”
베르단디는 척추가 분질러진 채로 크게 튕겨 나면서 저만치 먼 곳을 데구루루 굴러야만 했으니. 삽시간에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피를 토하는 그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했다.
“……!”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프로스트의 대원들이며, 심지어 하늘에 달린 ‘올림포스의 눈’까지. 모두 충격에 젖고 말았다.
발할라가 자랑하는 발키리를, 그것도 이렇게 둘이나 단박에 꺾을 자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늘과 대지를 잇는 빛의 기둥을 연 채로, 비바스바트가 사방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숨어 있는 새끼들 다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