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08화 (808/862)

8화. All for One (8)

비바스바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림포스의 군단이 출현합니다!]

차차차!

쐐애애액-

풀숲이 흔들린다 싶더니 곳곳에서 병사들이 나타났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비바스바트의 예민한 감각은 그들의 기질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자신을!

하급 신격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비바스바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더 볼 것도 없지.’

비바스바트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대수인을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면서 손바닥 모양의 장풍이 벼락처럼 적의 진영을 휩쓸어 나갔다.

결국 녀석들의 접근도 더뎌질 때 즈음, 비바스바트는 감각을 전부 가름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우르드와 한창 승부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채채채!

퍼퍼퍼펑-

서로 간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다툼.

가름은 지난 일 년 동안 비바스바트로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도끼 칼이 빛을 번쩍일 때마다 공간이 연거푸 폭발 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기 충분했으니.

우르드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다투는 모습이, 그녀가 어째서 발키리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다만, 우르드는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믿었던 두 자매가 단박에 나가떨어진 마당에 비바스바트가 이쪽으로 합류를 한다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비바스바트도 그런 기색을 읽고 가름을 도와주려 했지만.

『오지 마.』

별안간 가름의 전음이 비바스바트의 귓가에 꽂혔다.

비바스바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 되었지만 가름은 단호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마을 사람들을 구해 줘. 분명히 이 근방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을 게 분명해. 이대로 계속 대치가 길어지면, 이놈들 성깔에 관리하기 귀찮다고 모두 죽이려 들 거야. 그러니까 먼저 움직여!』

비바스바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잠시간 고민에 잠겨야만 했다.

가름의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서!』

하지만 가름의 계속된 추궁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발걸음은 반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뭘?』

『저 때문에 이렇게……!』

비바스바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현재 비프로스트가 겪는 피해가 전부 자신으로 인해 벌어졌다는 생각에 심장이 무거운 무언가로 꽉 누르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뭐라는 거야. 자뻑은. 이게 왜 다 너 때문이야?』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희미한 웃음이었으니.

비바스바트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크게 뜨는데, 별안간 가름이 마력을 가득 담아 사자후를 내질렀다.

“비프로스트!”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가름을 상대하던 우르드는 물론, 전장에 있던 다른 이들 모두가 놀라 그쪽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하지만 비프로스트의 멤버들만이 큰 흔들림 없는 반응을 보였으니.

“막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모두 길을 연다!”

“명!”

“명!”

“언제 명령이 떨어지나 싶었지! 크으!”

대원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막는 방파제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바깥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으니.

차차차창!

그러면서도 비바스바트가 쉽게 달릴 수 있도록 일정한 진형을 갖추면서 움직이는 광경은 보는 이로서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 때문에 대원들이 입는 피해가 커졌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가!”

“서둘러라, 막내야! 이 형님들이 그렇게 튼튼한 게 아니에요!”

“그래! 뭐 빠지게 뛰라고!”

비바스바트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가름의 명령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아스가르드를 거역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Z19 구역으로 움직여. 그곳으로 가면 응원군이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하지만 제시간에 도착 못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테니 주의하고.』

『이게 대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가름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웃음기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설마 신들의 행패에 분개하는 게 너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우리도 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네가 바로 천마의 아들이지? 너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도 꽤 유명해. 밖에서 깽판을 많이 치고 다녔다면서.』

『……!』

『그래도 소문만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일단 이래저래 시험을 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이런 꼴이 되고 말았네.』

가름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속이 편해 보였다. 그동안 감추고 있어야만 했던 비밀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뛰어.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상황이 좀 거지 같긴 하지만.』

비바스바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충분합니다.』

인사는 그걸로 충분했다.

파아아앗!

〈축지〉

비바스바트는 대원들이 만들어 준 길을 따라 스킬을 잇달아 발동했다. 어서 그를 붙잡으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지만, 비바스바트를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콰콰콰콰……!

지면을 밟을 때마다 일어나는 돌풍은 어느새 거친 태풍이 되어 산자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그 속에 섞인 빛무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마치 잘 벼린 칼이라도 된 것처럼 매서워서, 그를 향해 덤비는 적들은 모조리 피를 토하면서 줄줄이 쓰러져야만 했다.

거기다 그를 보조하기 위한 비프로스트의 움직임도 그야말로 악착같았으니. 이미 기세에서부터 적들은 한참 밀리고 있었다.

일기당천(一騎當千).

만부부당(萬夫不當).

모두 그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만 같았다.

[매복 중이던 아스가르드 군이 출몰합니다!]

결국 올림포스의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비바스바트를 막을 수 없다 싶자, 보조군으로 빠져 있던 아스가르드의 군병들까지 마을 쪽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마저 마치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가운데.

별안간 비바스바트는 달리다 말고 고개를 위로 들어야만 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검은 먹구름이…… 잔뜩 모여들고 있었다.

‘대신격!’

아니. 이건 단순히 그런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신격. 혹은 사회에 있는 신들을 모두 모아도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하늘. 그 자체가 의지와 자아를 갖고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오딘’이 강림합니다!]

[‘제우스’가 강림합니다!]

차분한 눈빛을 가졌지만 살벌한 기세를 폭풍처럼 흘리는 오딘과.

벼락처럼 강렬한 느낌을 풍겨 대는 제우스.

두 사람의 등장은 비바스바트로서도 잔뜩 긴장될 수밖에 없음이니.

『후후후. 대체 어느 놈이 이토록 시끄럽게 구는 건가 싶었건만. 역시 천마의 아들은 천마의 아들이라는 건가?』

『…….』

제우스가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세상이, 아니, 스테이지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탑이 그냥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대체 아버지는 이런 놈들을 어떻게 여기다 가둬 두신 거지?’

비바스바트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주신이라는 자들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탑의 세계에 들어와 하루가 멀다고 많은 전투를 치렀고 여러 신격들을 보면서 새롭게 기량도 갈고닦았기에, 크게 뒤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비바스바트는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호기롭게 웃는 제우스가 아닌, 오딘이 마음에 걸렸으니.

저토록 살벌한 기세를 흘리면서도,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녀석의 모습이 더욱더 두렵게 다가왔던 것이다.

숙적(宿敵).

비바스바트는 어쩐지 오딘에게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고 말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직감이 강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그가 가진 ‘감’은 미래 예지를 뛰어넘을 정도로 아주 정확했으니까.

‘사람들을 구하는 게 어쩌면…… 쉽지 않겠어.’

그런 생각이 든 비바스바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여야만 했다.

그리고.

파아아앗!

지체하지 않고 다시 몸을 날렸다.

* * *

탁!

“여기까지는. 기억이 나느냐?”

“…….”

천마가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툭 던진 질문에 녹턴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이미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었지만, 그래도 마치 TV 브라운관 속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것들이건만.

천마가 직접 이렇게 술회를 해 주니 정말 당시로 되돌아간 것처럼 모든 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직접’ 그 일을 겪었고, 그 살벌하기 짝이 없던 자리에 실제로 있었던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감정.

그렇기에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진짜’라는 사실을.

“당시에 너는 정말 개고생을 했었다. 아무리 천마증을 앓고 있어서 그나마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제우스와 오딘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천마는 스스로 ‘천마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적잖게 낯간지러웠던 모양인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특히 오딘이 끈질겼지. 녀석은 어떻게든 널 잡고 싶어 했거든.”

녹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 오딘과의 충돌 이후. 비바스바트는 그야말로 끈질긴 추격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 두 신을 상대하는 한편,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까지 무사히 구출해서 탈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비프로스트가 도와준다고 해도,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때문에 적잖은 희생과 피해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비바스바트를 괴롭혀 댔던 것이 바로 오딘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폭풍우를 휘몰아치며 달려오는 녀석은 그야말로 공포(恐怖), 그 자체였다.

도저히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는 잔혹한 손속과 함께 당시 비바스바트로서는 도저히 짐작하기 힘든 갖가지 마술과 주술이 한가득했다.

“그럴 만하지. 오딘은 사실 제우스와 목적이 조금 달랐거든.”

“……?”

녹턴도 이건 처음 듣는 내용이었기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너를 잡아다가 날 끌어낼 미끼로 쓰려던 반면에, 오딘은 네가 자신들의 대예언에 나오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경계했었다.”

“대예언……?”

“그래. 오딘이 창조신에 오르기 전에 거신(巨神) 베스틀라를 거꾸러뜨리고 난 뒤에 받았던 저주…… 같은 거지.”

-언젠가 거칠게 타오르는 별이 떠오를 때, 해와 달은 잡아먹히고 늑대의 시대가 도래하매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젖어들게 될 테니. 너희 신들은 그 저무는 황혼 속으로 같이 말려들고 말 것이다.

천마는 한때 아스가르드에서 유행하던 대예언을 읊조리면서 히죽 웃었다.

“황혼…… 저주…….”

녹턴은 뭔가 알겠다는 듯이 두 단어를 중얼거렸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운명’ 혹은 ‘신들의 황혼’이라는 뜻을 지닌 대예언은 확실히 그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여러 사회에서는 아스가르드와 그들의 대적지인 니플헤임 간에 커다란 전쟁이 벌어진다는 뜻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결국 아스가르드는 라그나로크라고 할 만한 게 터지기도 전에 스승님에 의해 저물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결국 대예언이라는 것도 보잘것없는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오딘에게는 그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오딘은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온갖 종류의 예언이란 예언은 죄다 수집하고 다녔었다. 심지어 천마증에 잠겨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러다 네가 보인 거다. 거칠게 떠오르는 별. 그러니 그게 너로 여겨졌던 거지.”

비바스바트는 태양신의 이름. 말 그대로 ‘별’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항상 휘황찬란한 배광을 몸에 휘감고 있었으니, 더더욱 화려한 별로 보였을 테지.

그런 마당에 신과 대적한다?

그런 쪽으로 생각이 미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그 대예언은 빗나간 겁니까?”

“글쎄.”

녹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저 의뭉스러운 표정은 속을 답답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

“아무튼.”

천마는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듯, 다음 장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너는 그 둘의 끈질긴 추격 뒤에도 사람들을 데리고 16층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이름은 탑에 아주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탑 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레지스탕스에 몸을 담게 되었지. 그곳의 이름이 바로…….”

천마는 말꼬리를 슬쩍 흘렸고, 녹턴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침음성을 억지로 삭여야 했다. 떠올릴 때면 항상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이름.

신이 아닌 사람을 위해. 사회가 아닌 개인을 위해. 압제가 아닌 자유를 위해. 불멸이 아닌 필멸을 위해 만들어진 이름.

“올포원(All for One).”

그것은 원래 비바스바트-녹턴의 이름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