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흔적 (5)
그 순간.
연우는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에도라.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는 이름. 한 평생 자신을 기다리게만 한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간절히 바랐던 이름이었다. 그는 항상 에도라의 옆에 있었고, 에도라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기를, 더 이상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를 기다리지 말고 다른 행복을 찾아 떠나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설사 그녀가 그를 잊는다고 해도, 연우는 이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응원했을 터였다. 그러다 나중에 만나게 되었을 때. 그동안 고마웠다고, 너무나 감사했다고 말을 건넬 생각이었다.
에도라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홀로 있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외롭지 않게 버틸 수 있었으니까. 에도라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꿋꿋이 버텨 내고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도라는 마지막까지 다른 행복을 찾아 떠나지 않았다. 연우를 기다려 주었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저곳에 있는 에도라에게 너 무나 감사했다. 비록 당시의 일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감사했다. 당시의 기다림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큰 상처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툭!
갑자기 에도라가 이쪽으로 달려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연우와 마주친 시선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연우는 왜 그러는가 싶다가,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혜안(慧眼)!’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사물이 갖고 있는 모종의 망집과 아집을 벗겨 내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눈. 혜안은 지금 연우의 존재, 그 안쪽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연우는 뒤늦게 마력을 끌어올려 스킬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꿰뚫고 들어온 시선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읽어 들였고, 그중에서 단편적으로나마 에도라에게 필요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 ‘단편’이 일개 필멸자인 에도라가 감당하기에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다.
주르륵…….
“오라, 버니…… 대체…….”
에도라의 양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미처 그것을 닦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초점이 풀린 두 눈은 현실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들을 빠른 속도로 훑어 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에도라 위로 ‘굴레’를 감기 이전의 에도라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연우가 겪었던 외로움이 지나간 자리로, 그녀가 겪었던 아픔과 슬픔이 자리 잡았다.
뚜벅.
뚜벅…….
잠시 후, 에도라는 다시 연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위로 손을 뻗으면서 연우를 끌어안았다. 말없이.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듯이.
연우는 어쩌다가 그녀의 품에 매달리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두 연인 사이에 별다른 대화는 필요 없었다. 짧은 침묵으로도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아주 많았으니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다.
연우가 천천히 에도라의 품에서 얼굴을 뗐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피식. 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그 사실이 너무나 재미있으면서도 우습기도 해, 눈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것마저 똑같았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연우와 에도라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다시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천천히 서로의 얼굴로 다가갔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에도라의 체향은…… 박하향 같았다. 상쾌하면서도 산뜻한, 그런 박하향.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점차 에도라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하지만 둘의 입술이 닿기도 전에.
콰아아앙!
갑자기 폭발 소리가 울리면서 거친 열풍이 불어닥쳤다. 판트와 무왕, 두 사람이 벌써 충돌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모래와 자갈이 잔뜩 쏟아지는 통에 키스는커녕 여기 서 있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제기랄.
연우는 간만에 겨우 이뤄진 연인과의 해후를 방해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판트와 무왕은 연우와 에도라가 뭘 하든지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에만 급급할 뿐.
으랏차차! 판트는 그렇게 기합을 터뜨리면서 권풍을 날렸고, 무왕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발을 굴렀다. 땅거죽이 수십 미터도 넘게 융기하면서 우산이 되어 만뢰를 잇달아 막아 냈다. 쿠르르. 산이 박살 나면서 낙석이 무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판트, 이 새끼 두고 보자. 연우는 이따가 판트의 남은 한쪽 눈덩이에 다 더 큰 멍 자국을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주변 대기가 뒤틀리면서 결계가 세워졌다. 판트와 무왕이 있는 공간을 분리시키면서, 이 자리에는 연우와 에도라, 단둘만 남은 것이다.
“다시 하자.”
연우는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에도라를 보면서 말했다. 에도라는 살짝 부끄러웠던지 콧잔등을 붉히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꿀꺽.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에도라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두근두근두근. 아니, 오히려 처음이었던 그때보다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혈류도 훨씬 더 빨라져서 몸에서 열이 났다. 숨을 내뱉으면 뜨거운 입김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 본체는 분명히 용일 텐데…… 그것도 은하계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용. 그것의 심장도 이렇게 빨리 뛰고 있는 걸까, 그런다면 이런 식으로 몸이 달아오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가 빨리 돌아야 하는 걸까. 별 쓸데없는 잡념이 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건 아마도.
칼라투스를 구하러 가던 길. 서로의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더 긴장한 탓일 것이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면서 입을 가져가려는데.
콰르르릉!
우르르르, 콰콰쾅!
과르르, 콰콰콰콰!
쿠쿠쿠쿠……!
“…….”
“…….”
쉬지 않고 이어지는 주변의 폭음은 도저히 분위기를 낼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두꺼운 결계를 뚫고 굉음이 들릴 정도의 싸움이라니…… 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싸우고 있는 걸까. 이젠 슬슬 짜증이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그러다.
쾅!
와장장창-
갑자기 결계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로 인해 결계가 마치 유리처럼 박살 나 흩어지고, 덩치 큰 무언가가 연우와 에도라 사이를 갈랐다.
“니미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어떻게 옷깃 하나 못 스치는 건지……! 대체 저 나이 되도록 뭘 처 드시고 다닌 거야?”
먼지투성이가 된 판트는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두 눈은 저 높은 상공에 서서 이쪽을 오만하게 굽어다보는 무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판트가 지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뛰어넘고자 했던 아버지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지어 자신은 신격마저 각성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밀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그동안 부족의 어른들이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면 괴물 운운을 했는지, 스승이셨던 대장로가 마지막에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봤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결국 대장로는. 어른들은. 무왕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판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영원토록 무왕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만큼 무왕은 대단한 존재였다.
사실 별칭만 봐도 알 수 있긴 했다. 무왕이 무슨 뜻인가. 무(武)의 왕(王)이란 뜻이었다. 뭣도 모르는 일반 플레이어들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외뿔부족의 족장이라면 충분히 대단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점은 무왕이라는 별칭을, 부족원들도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토록 오만한 부족원들이.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 함부로 이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조차 멀리하는 이들이 말이다.
하지만.
파지지지직!
“그러니 더 재밌지.”
판트는 더 크게 열의를 끌어 올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지막까지 남겨 둔 힘마저 개방한 순간, 그는 이제 핏빛 뇌기로 뒤덮이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사방이 온통 천둥소리로 가득 찼다.
뇌신(雷神).
혹은 혈신(血神).
지금 판트가 보이는 위용은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았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신. 세상에 오롯이 홀로 선 신이었다.
무왕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 손을 까닥거렸다.
오너라.
무왕은. 무의 왕은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도전자의 도전을 받아 주고 있었다.
“그런다고 겁이라도 먹을 것 같습니까? 오히려 더 땡큐지!”
판트가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흉악하게 웃으면서 지면을 강하게 박차려는데.
“판트.”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흥을 내려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연우가 에도라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에도라의 표정도 뭔가 짜증으로 단단히 얼룩져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간 게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왜 그러나 물어보려 했지만.
“이 꽉 깨물어.”
“……?!”
판트가 무슨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창선의 주먹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아까 맞은 곳과는 반대 위치의 눈두덩이였다.
빠아아아악!
소리도 훨씬 찰졌다.
* * *
“호오.”
무왕은 지상에서 말 그대로 지근지근 밟히는 중인 판트를 보면서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판트 딴에는 어떻게든 저항해 본답시고 뇌기를 이리저리 터뜨려 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우가 발길질을 할 때마다 죄다 픽픽 꺼져서는 고스란히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상성 좋은 무공을 펼치거나, 뛰어난 깨달음을 적용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압도적인 격의 차이로 ‘찍어 누르는’ 중이었다.
‘이미 판트는 초월을 진행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도 말이지.’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세계에는 올포원이 없고, 연우와 판트가 엄청나게 고생을 했어야 할 정도로 모든 게 엉망이었을 게 분명했다. 판트가 초월이라도 시도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올포원의 부재를 의미했으니.
‘아니. 이미 여기서도 없어진 것 같지.’
언제나 무왕에게 있어 커다란 벽으로 존재하던 올포원의 실종. 그것은 무왕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엔 나도 없었다.’
무왕은 확신할 수 있었다. 미래에. 연우와 판트가 활약하던 세계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두 사람이 직접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은퇴 따위를 한 건 아닐 것이다. 본인이 잘 아는 ‘무왕’이라는 자는. ‘나유’라는 자는 아무리 기력이 쇠한다고 해도 마지막 날까지 전장에 서고, 부족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식들과 같이 호탕하게 웃고, 제자와 술잔을 기울일. 그런 자였으니까.
아마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자신이 죽는다는 뜻일 테지.
필(必).
멸(滅).
언젠가 아내인 영매가 보았던 점괘가 떠올랐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불출처럼 들릴지 몰라도, 아내의 솜씨는 항상 기가 막혔으니.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문제.
미래의 연우와 판트가 ‘굴레’를 되감고 찾아온 현재 이 시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급격하게 틀어졌을 이 세계가 구르고 굴러서 다다를 곳은 어디인 것인가. 운명은. 빌어먹을 점괘는. 바뀌었을까?
“마누라.”
『……안 그래도 지금 해 보고 있어.』
오랫동안 살을 맞대며 살아온 부부는 확실히 뭔가 연결되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무왕이 부르기 무섭게 영매가 투덜거리면서 대답을 내뱉었다. 그녀도 똑같은 판단에 다다라 새롭게 점을 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그 말에서. 무왕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확신에 차 있던 아내의 말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그렇다는 건.
“점괘가 여전한 모양이네?”
『…….』
대답은 없었다.
피식!
무왕은 가볍게 실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쩐지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 앞에 놓여 있을 점괘의 결과조차도.
운명은.
빌어먹게도 아직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