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16화 (816/862)

16화. 외뿔 (1)

“……이상한데.”

“그러게요.”

『뭐가?』

천마가 책을 읽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차정우도 동의한 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논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렇다 할 얼굴이 없어서 제대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념이 마구 발산되었다.

문제는 녹턴마저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상당히 심각한 사항인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군. 확실히 이상해.”

『아니, 그러니까 뭐가 이상한지 말 좀 해 달라니까?』

샤논이 이번에는 녹턴을 보며 다시 한 번 말했지만, 녹턴은 진중한 얼굴로 천마와 차정우를 돌아볼 뿐이었다.

“이런 경우가 예전 ‘굴레’에도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다.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야.”

“그럼……!”

“혹시 제가 세계선을 분화시키면서 생긴 부작용일까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러한 여러 세계선 역시 ‘굴레’ 안에서 빚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이건 여기에만 특별하게 해당하는 이상 현상이란 뜻이야.”

“원인이 뭔지 짚이는 게 없는데…….”

“하아. 아무래도 나도 좀 더 자료를 뒤져봐야겠다.”

천마와 차정우, 녹턴은 저들끼리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기 바빴다. 이 외에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를 써 대는 게 보였는데, 이 중에서 샤논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저게 고작이었다.

한순간, 샤논은 마치 외딴 섬처럼 이 모임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말해 줘!』

세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샤논에게로 향했다.

『나한테도 말해 달라고! 궁금해 미치겠어!』

샤논의 목소리는 거의 구걸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도는 건 그의 성격에 있어서 정신적인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차정우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확실히 주어를 빼 버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뭘 모르는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천마와 그는 애당초 창공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이니 세계에 대한 이해가 창조신 급을 넘어서는 수준이었고, 녹턴은 올포원으로 살아오면서 여러 신격들과 대립하게 된 결과 많은 지식을 쌓아 대화에 무리가 없었다.

반면에 샤논은 그저 칠흑왕의 권속으로서 살아온 것이 전부였으니. 게다가 세계의 이해나 천지창조의 비밀과 같은 머리 아픈 사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태 나온 내용 중에 뭐가 이상한지 좀처럼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어디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차정우는 전달 내용을 고민하다가, 그냥 이해하기 쉽게 요점만 콕 집기로 마음먹었다.

“‘황’이 뭔지는 알지?”

『알지. 내가 만든 노래에도 있는데.』

샤논은 자랑스러워하는 투로 대답했다. 인성황, 인성황, 신나는 노래. 차정우는 노래 멜로디와 가사가 같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슬쩍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황’은 수없이 반복되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의 법칙과 이데아의 제약에서마저 자유로워진 존재야. 아무리 다시 ‘굴레’가 굴러서 다른 우주가 시작된다고 해도, ‘황’이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아. 그리고 그건 ‘굴레’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지고, 세계선의 분화만 남은 현재에도 마찬가지고.”

세계선(世界線)의 개념은 다중우주 혹은 평행우주로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쳤을 때, 그가 있는 우주는 A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a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중요한 선택지에 놓이게 되고, 이 선택에 따라서 아주 약간이지만 우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때, 다른 선택으로 변화하게 된 우주를 다시 A’라고 칭하자.

A’는 분명히 A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주 조금만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a가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 옆으로 A’’가 분화해서 나갈 것이고, 또 그 옆에는 A’’’가, 뒤이어서 A’’’’가 계속 생길 것이다.

이처럼 여러 경우의 수로 무수히 뻗어 나가는 것을 두고 ‘평행우주’라 명명할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문제.

A라는 우주에서 조금씩 변질되다 탄생하게 된 A’’’’’’’’’라는 평행우주가 있다면. 과연 이 A’’’’’’’’’라는 우 주는 A의 평행우주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답은 ‘아니다’였다.

이때, A’’’’’’’’’라는 우주는 이미 변이를 겪을 대로 겪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테니까. 그럼 이를 B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A와는 다른 ‘다중우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B 옆에는 C가, 또 그 옆에는 D, E, F…… 가 차례로 생겨나게 된다.

그렇다 보니 각 우주들은 지금 이 시점에도 계속 분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평행우주와 다중우주를 만들어 내고, 또 붕괴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한대(∞). 정말 그렇게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은 우주들이 결국 이 ‘굴레’ 속을, 그리고 ‘세계’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많은 우주들이 가진 제약은 신과 악마 같은 초월자들도 절대 피할 수 없었다. 애당초 신과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그들이 있는 우주에 각인된 ‘법칙’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저들이 말하는 신위(神位)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초월자’라고 부른다지만.

글쎄? 차정우의 눈에는 오히려 한 줌에 불과한 능력을 얻고자 자기네들의 몸에다 스스로 구속구를 채우는 멍청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A라는 세계에 ‘제우스’라는 신이 있다면, A’에도 그와 유사한 성격과 신위를 지닌 제우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의 법칙마저 벗어나 완전한 ‘초월’을 이루는 존재가 있었다. 평행우주와 다중우주의 제약을 벗어나 오롯이 독립(獨立)의 자격을 갖추게 된 존재. 모든 우주를 다 들여다봐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런 우주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 정확하게는 유일(唯一)해지는 존재.

그것이 바로 ‘황’이었다.

현재 ‘황’에 해당하는 존재는 억겁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굴레’의 역사와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들을 통틀어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전지와 전능.

모든 것을 갖추게 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럼 그 ‘황’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음?』

샤논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짐작이 가는 바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무왕이…….』

“‘황’이 되셨었지. 비록 격의 상승과 함께 같이 발전되고 만 가이아의 저주 때문에 금세 승화되고 마셨지만.”

『……뭔가 이상하잖아!』

샤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황’이 되면 독립을 한다며! 유일해진다며!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세계의 관측에서 벗어나 잊혀지는 존재가 되는 거 아니었어?』

샤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연우가 현인-이블케마저 처치하고, 모든 신화를 수습하면서 완전한 칠흑왕이 되고 말았을 때. 당시에 닥쳤던 여러 불상사들을.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던 딜레마(Dilemma).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의 가족을 아꼈기에 연우는 자신이 잊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기희생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차정우는 천마에 이어 창공 도서관을 관리하는 대사서가 되어야 했고, 어느새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웃지 못할 신명(神名)까지 얻은 후에야 연우를 겨우 심연의 늪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즉, ‘황’이라는 것은 말이 독립이나 유일일 뿐이지, 오히려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최소한 샤논의 기준에서는.

그리고…… 무왕은 분명히 그런 ‘황’이 되었었다.

바로 그 순간, 승화(昇華)를 겪고 말았지만.

『유일해졌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는 건 완전한 소멸을 의미할 텐데. 하지만. 무왕은…….』

“계셨지. 그것도 당시 모습 그대로.”

『…….』

“원래대로라면 형과 판트가 ‘굴레’를 되감았어도, 무왕을 만나지 못했어야 옳아. 그리고 외뿔부족에서는 무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어야 하고…… 혹은 무왕이 조상신 같은 하나의 신앙으로 남아 있던가.”

천마의 숭배는 여러 우주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를 부르는 명칭이나 구성하는 신화는 각자 다 달랐다.

명왕, 지고한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문명의 전달자, 천마, ‘낮’의 아버지…… 빛과 마(魔)라는 단어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도 않지 않는가.

칠흑왕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남아 있었고, 그중에서 ‘차연우’와 같은 형태를 찾아내느라 차정우가 그 많은 고생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황’이 된 무왕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무왕은 있었다.

그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그런데 또 여기서 문제는…… 형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이야.”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그 많은 고생을 한 만큼 ‘황’에 대해서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왕에 대해서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는 뜻.

『……이 빌어먹을 주인이.』

으드득.

샤논은 분명히 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또 무슨 꿍꿍이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지?』

차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생각하는 게 맞을 거라는 듯.

“형은 모든 걸 다 제자리로 되돌리고 싶어 했어. 엇나간 것들도 다 되찾아오고 싶어 했고, 나아가서는 소소한 행복도 누리고 싶어 했지.”

갑작스러운 연우의 실종.

그것은 아무래도 실종이 아닌 부재인 모양이었다.

자의적인 부재.

“무왕의 일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싶어.”

문제가 있다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좀처럼 생각나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무왕이 어떻게 해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지. 어째서 무왕이 다시 저 ‘굴레’ 속에 있을 수 있는지.

다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방식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매의 점괘가 ‘필멸’로 나왔을 거란 점이었다.

어쨌거나 무왕은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여간 미리 무슨 언질이라도 주고 저 지랄 떨면 어디가 덧나나.’

차정우는 끝까지 제멋대로인 형을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저 진절머리 나는 성격은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 * *

다시 책자 속으로 돌아와서.

시간대는 조금 더 빨리 감기 되어 무왕과의 해후가 끝난 뒤로 고정된다.

“……에잉!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 제자라는 놈이 이렇게 스승의 마음을 못 알아주누.”

무왕은 이리저리 투덜거리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은 판트와의 대련이 아닌 연우와의 결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봤을 때, 연우는 이제 자신도 좀처럼 깊이를 측정하기가 어려울 만큼 아주 깊어져 있었다. 단순히 격만 높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도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까마득한 세월 동안 오롯이 참오만 거듭해 온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경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이미 자신만의 길도 오롯이 성립해 둔 것 같았다. 검뢰라고 했었나? 하여간 칠흑과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기술이 제법 그럴싸해 보여서 관심이 갔다.

하지만 무왕은 원하던 바를 결국 이루지 못했다. 연우에게 덤비는 족족, 연우가 모든 공격을 ‘무효’로 돌려 버린 탓이었다.

-이놈이? 제대로 안 하냐?

-싸우기 싫습니다.

-왜?

-모르셨습니까? 제가 원래 평화주의였다는 거?

-지랄……!

-정말입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럽던지.

-제자가 되어서 어떻게 감히, 존경…… 큭. 스러운…… 흐흐. 스승님의 존체에…… 쿡. 아, 죄송합니다. 하여간 어떻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웃든지 말든지 하나만 하지?

-그럼 웃겠습니다. 후후후.

-이 새끼가?

-절 따라오려면 아직 백만 년은 이르십니다.

무왕은 언젠가 자신이 연우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받은 것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재수 없다.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고 말았다.

문제는 자신이 느끼는 이 기분을 앞서서 다른 제자들과 자식들, 그리고 부족원들도 바로 자신에게서 느꼈을 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남들에게 느끼게 할 기분이지, 자신이 느낀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 내로남불이라고 알아?』

“알아. 내가 잘하는 거.”

『……알고 있다니 그건 다행이네.』

영매는 무왕의 뻔뻔한 답변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기야 이런 점이 자신의 남편답다 싶었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 이건 원래 무왕이 항상 하던 말이었으니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점괘 결과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에 남편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여도, 이따금 옹졸하게 보이긴 해도, 그릇은 한없이 넓은 사람. 그래서 더더욱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

사실 영매는 젊은 시절에 무왕의 그런 모습에 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좀 얽매여 보였으면 좋겠는데…….』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 * *

“안으로 들어오세요.”

“어, 어어…….”

연우는 수줍게 안내하는 에도라를 따라 바짝 긴장한 얼굴로 에도라의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도중에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쏴아아!

문을 타고 넘어오는 박하향을 맡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하얘진 탓이었다.

꿀꺽.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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