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별의 조각 (3)
‘어떻게 하지?’
세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쪽 화살과 티그리스, 그리고 해시계.
이들 모두 한 세계를 종말에 이르게 만들 정도로 강한 존재였다.
사실상 ‘짐승’에 가까운 존재들.
아니, 따지자면 그들보다 더한 괴물들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집어삼켰다는 것은 그만큼 방대한 신화를 품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수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니까.
신화가 사실상 신적인 존재들의 ‘잠재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떠을려 본다면, 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또한 그만큼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이란 뜻이었다.
라플라스가 세계 ‘밖’에서 넘어온 존재이니만큼 그들과 견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겠지만, 세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실제로 티그리스와 충돌하고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 역시 나름대로 곤경에 처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생각이 많은 얼굴이로군. 아무래도 우리가 그걸 슬슬 덜어 줘야겠는데?”
남쪽 화살이 차갑게 웃으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쿵!
암흑의 구가 우르르 떨렸다.
세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마어마한 영압(靈壓)에 당장이라도 육체와 영혼이 모두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차라라랑!
그래도 세샤는 어떻게든 민채영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남쪽 화살의 입가에 냉소는 더욱더 짙어져 갔다.
궁지에 몰린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야. 그만 좀 장난치고 이제 가자. 갈 길 바쁘다고. 이러다 다른 조가 이기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래?”
해시계는 그런 남쪽 화살을 보면서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여기에 이렇게 계속 있는 것부터가 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속한 연맹체는 현재 갖가지 세계선을 빠르게 넘나들면서 별의 조각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세계선을 넘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데다가, 인과의 조율자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해서 움직이다 보니 일은 그다지 수월한 편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만 한 존재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한 세계에 있는 것만으로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관측’되기가 쉬운 상황이기에 최대한 빨리 자리를 떠야만 하는 제약이 있었다.
그런데 남쪽 화살은 그런 갑갑한 제약을 알면서도, 계속 장난칠 생각만 하니 해시계로서는 짜증이 났던 것이다.
“흐흐흐. 알겠다, 알겠어. 빨리 끝내면 될 것 아냐?”
남쪽 화살은 음침하게 웃으면서 하얀 건치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좀 더 너희들의 발악을 구경하고 싶었다만, 아무래도 할망구 때문에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이만 죽어 줘야겠다. 아주 잠깐이라도 이 몸을 즐겁게 해 주었으니, 아프지 않게 보내 주마.”
남쪽 화살이 세샤와 민채영 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세샤에게는 그런 손짓이 너무 느리게 보였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한껏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남쪽 화살의 손과 영압의 움직임, 얼굴의 표정까지 모든 게 너무나 자세하게 보였지만…… 문제는 느려진 세계만큼이나 세샤의 움직임도 느려져 도저히 꿈쩍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네피림의 불꽃을 피우는 것뿐.
그 광채가 아주 대단해서, 남쪽 화살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제 그녀를 아예 제거하고자 했다.
바로 그때.
콰아아앙!
갑자기 심상 세계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하는 엄청난 충격파가 암흑의 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남쪽 화살의 시선이 저절로 위쪽으로 향했다.
해시계도 두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만한 충격이 주어졌다면 분명히 만만찮은 실력자가 나타났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곳에,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할아버지!”
세샤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암흑의 구는 분명히 공간을 단절시킨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지는 이곳을 발견하신 걸까?
크로노스가 잔뜩 알그러진 업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력장이 안 잡힌다 싶더니…… 감히 쓰레기 새끼들이 내 손녀를 건드려?”
세샤는 그제야 크로노스가 자신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선물해 주었던 태블릿 피시.
그 속에다 자신도 모르게 추적 마법을 걸어 뒀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근처에 있을 때에는 마법 장치의 전원이 꺼져 있다가, 그녀가 탐지되지 않을 때에만 자동적으로 켜지게 해 뒀을 테지.
크로노스는 이를 바탕으로 세샤가 지구라는 공간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아낸 것일 테고.
“신왕……?”
“이 세계선의 크로노스인 것 같은데? 어딜 가더라도 항상 귀찮은 놈이던데…… 여기서도 만날 줄은 몰랐는걸?”
“부탁하지.”
“빨리 회수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귀찮아진다고.”
파아앗!
해시계가 히죽 웃으면서 크로노스 쪽으로 몸을 날렸다.
크로노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들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감히 자신을 앞에다 두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팔다리 한 짝씩 전부 잘라 놓고 이야기하자.”
크로노스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공간이 뒤틀리며 신력이 잔뜩 응축되면서 거대한 크기의 대낫이 나타났다.
스퀴테.
원래는 크로노스가 부활하면서 본체로 삼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영혼과 분리하여 그의 권능만을 따로 집약한 대신물(大神物).
프네우마의 하늘이 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특징도 있었다.
연우는 항상 스퀴테를 검으로 형상화해서 다뤘지만, 크로노스에게는 이러한 형태가 다루기 가장 편했다.
시간을 감아 생명을 죽음에 닿게 하는 힘.
‘생명의 죽음을 수확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의 대표적인 상징인 그림 리퍼(Grim Reaper)는 애당초 그에게서 비롯된 거였다.
촤아아악!
크로노스가 스퀴테를 힘차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이쪽으로 달려드는 해시계의 시간을 잘라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해시계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살던 세계선에도 크로노스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별의 조각을 회수하기 위해서 각 세계선을 넘나들 때마다 저와 비슷하거나 다른 외양을 한 무수히 많은 크로노스를 만나기도 했다.
그들 대부분이 한때 신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로 강하긴 했었다지만.
‘결국 거기서 거기일 뿐이지.’
애당초 ‘별’이라는 존재는 최소 하나 이상의 세계선은 삭제하고 그 힘을 흡수하였을 정도의 지고한 격을 갖춘 존재들.
유일성을 획득했다는 ‘황’에 가까운 존재란 뜻이었다.
그런데 세계선이 주는 제약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우주는 관찰조차 못 하는 놈들이 별을 막겠다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 채로 자신이 잘났다면서 떠들어 대는 꼴이 아닌가.
우습기만 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해시계는 감히 자신들을 막아서려는 크로노스에게 격의 차이라는 것을 보여 줄……!
‘이게 무슨……?’
해시계는 크로노스에게 접근하면서 자신만만하게 권능을 드러내려다 말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권능이…… 빚어지질 않고 있었다.
마치 모든 기능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긴.”
크로노스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해시계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네가 뭘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까짓 권능이야 발현 전에 시간을 끊어 버리면 그만이지 않나?”
"……!"
해시계는 그제야 크로노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권능이 발현하는 시간 그 자체를 강제로 끊어 발현이라는 사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크로노스가 두렵게 느껴졌다.
[프네우마의 하늘 - 권능 절단]
‘이 세계선의…… 이곳의 크로노스가 다른 크로노스와는 다른 거야!’
하지만 해시계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의 왼쪽 목덜미에서부터 우측 허리까지, 스퀴테가 빠르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해시계 자리라는 별자리의 생명은.
대단한 업적을 세운 셈이었지만, 크로노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세샤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 * *
남쪽화살도 해시계와 마찬가지로 목표인 세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얼음장처럼 굳어 버린 그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이.
레아는 이제 괜찮다며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할머니……!”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끄덕끄덕!
세샤는 레아의 품에 안겨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녀는 엉엉 울어 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타나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탁 풀리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 탓이었다.
“우리 똥강아지, 많이 놀랐나 보구나? 대체 누가 그랬어? 누가 우리 똥강아지를 이렇게 못살게 괴롭힌 거야?”
세샤는 손으로 반대편에 있는 남쪽 화살을 가리켰다.
“저 새끼요!”
“그래. 저놈이구나. 아무래도 이 할머니가 때찌를 해 줘야겠는걸?”
레아는 자상하게 웃으면서 세샤와 민채영을 뒤로 물렸다.
그 순간, 민채영은 여러 복잡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을 계부에게 맡겨 두고 도망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저벅!
레아가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남쪽 화살을 정지시켰던 힘이 더더욱 가증되고 있었으니까.
[퀴리날레의 땅 - 절대 영역]
“이건……!”
남쪽 화살의 두 눈에 핏대가 잔뜩 섰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아니 암혹의 구가 통째로 바싹 얼어붙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성역의 통제권을 빼앗기다니!
성역은 시전자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렇다 보니 절대 타인이 함부로 점거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성역에 있는 주인을 죽이거나 신화를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레아는 그런 것 없이 그걸 해내고 있었다.
아주 손쉽게.
마치 자신의 집을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쉽게 암흑의 구 내부에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가볍게 손을 뻗기만 했을 뿐이었다.
레아 역시 유일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다른 세계선에 똑같이 존재한다.
그녀가 퀴리날레의 마지막 후손이며 공간을 다룬다는 점도 똑같았다.
하지만 단연코 이렇게까지 ‘공간’이라는 개념을 제 뜻대로 다루는 레아는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크로노스뿐만 아니라 레아까지.
대체 이 세계선의 두 사람은 다른 세계선의 그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우리 부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한가 보지?”
'……!'
“어쩌지? 너희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할 텐데.”
뚜벅.
뚜벅.
레아가 남쪽 화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쪽 화살의 안색은 계속 창백해졌다.
단순히 성역의 소유권을 강탈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성역의 내부를 구성하는 그의 사고까지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저것은 레아가 암흑의 구를 완전히 통제하다 못해, 아예 자신의 절대적인 권역으로 삼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 어떻게든 그들에게 알려야……!’
남쪽 화살은 난생처음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 세계선은 위험하다는 말을 어떻게든 연합체에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야 공훈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이 자신의 부활을 이뤄 줄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쪽 화살의 그러한 다급함도 여지없이 레아에게 전달되었고.
“옛날에야 저 철없는 남편 때문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지, 이제 우리 부부는 다른 곳에는 관심도 없어.”
레아가 어느새 남쪽 화살 앞에 걸음을 범춰 서서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 괜히 우리를 건드릴 생각 따윈 하지 마. 만약 경고했는데도 끝까지 이러겠다면.”
레아의 손이 점차 남쪽 화살의 얼굴을 덮어 왔다.
“가만히 안 놔둬.”
툭!
레아의 검지가 아주 가볍게 남쪽 화살의 미간을 두들겼다.
너무나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우르르!
암흑의 구가 통째로 주저앉으면서 남쪽 화살을 이루던 격도 모조리 붕괴해, 자그마한 모래가 되어 바닥에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