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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화 (1/232)

[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

1.

사랑이었다. 아니, 사랑이라 착각했다.

그날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는 새하얀 정원에서 입김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주겠어?”

그의 손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해사한 그의 미소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어요.”

그날, 나는 스스로 새장에 걸어 들어갔다.

그가 내게 안겨주었던 백작 부인의 삶은 탐스러웠다.

값비싼 옷과 보석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찬사.

어느새 나는 오직 그만을 위해 지저귀는 한 마리의 카나리아가 되었다.

내 배 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을 즈음 나는 이곳이 새장이란 걸 깨달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랑하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백작저에서 도망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이란 걸 했다. 고운 손은 다 망가지고 그가 감탄해 마지않던 얼굴은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와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이와 오순도순 지낼 작은 저택도 마련했다.

산달을 기다리며 나는 평온한 미래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건 한순간에 깨어질 꿈에 불과했다.

* * *

서늘한 손길이 레베카의 뺨을 쓸었다.

몰아치는 잠에서 겨우 깨어난 레베카는 문득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설마 하는 심정에 그녀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레베카.”

손길의 주인이 입을 열었을 때 레베카는 깊게 절망했다.

들켰다. 결국 그의 손아귀로 다시 돌아왔다.

“깨어난 거 다 알고 있어.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

레베카는 눈을 떴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스라이 부서져 내리는 파도 같은 푸른 눈동자.

한 올의 잔머리도 없이 정돈된 금발 머리.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주인, 지옥에서 온 악마의 환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제플린…….”

감기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레베카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둘러보다 그녀는 아기의 요람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아이……. 제플린, 내 아이는 어딨어요?”

“오랜만에 보는 남편에게 참 따뜻한 인사군. 당신도 참 순진해. 내가 당신을 못 찾을 거라 생각한 거야?”

“제플린, 제발……. 내 아이를 돌려줘요.”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 설마 내 핏줄을 해치기라도 했을까 봐?”

제플린이 차갑게 웃었다.

그는 아이를 해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겠지.

하지만 레베카는 오히려 그가 아이를 죽였기를 바랐다.

영면에 들었다면 신의 곁에서 안식이라도 누릴 수 있었다.

그래,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아이로 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이 정도로 괴롭혔으면 됐잖아요. 제플린, 제발 나를 놓아주세요. 아이와 죽은 듯이 살게요. 데본셔의 이름도 버릴게요.”

레베카는 절박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플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건 곤란해. 당신은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야. 누구 마음대로 장인의 이름을 빼 버리겠다는 거야. 게다가 당신이 낳은 아이, 딸이잖아? 내가 그토록 바라던 우리를 닮은 금발의 푸른 눈! 아주 어여쁘게 자랄 여자아이.”

제플린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며 빛났다.

레베카는 그를 잘 알았다. 그가 저런 눈빛을 할 때는 아주 위험했다.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기어코 모든 것을 가질 남자였다.

그건 안 된다. 내 아이만큼은 나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됐다.

“프시케! 프시케!”

레베카는 제플린을 밀치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작은 저택이라 방이 몇 개 없었지만 휘청이는 그녀의 몸뚱이로 돌아다니기엔 대궐이나 다름없었다.

레베카는 거의 기다시피 하며 필사적으로 아이를 찾았다.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명쾌한 구두 소리였다.

“레, 레베카 님?”

“알리시아……?”

화려하게 치장한 알리시아가 하얗게 질린 채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곤히 잠든 프시케를 품에 안은 채 토닥거리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레베카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레베카는 자신이 손수 만든 옷이 아닌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제 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살기등등하게 눈을 치켜뜬 레베카가 알리시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알리시아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너구나. 역시 네가 배신한 거였어. 알리시아! 널 믿었는데! 너한테 모든 걸 다 줬잖아! 단 하나만, 단 하나만 지켜달라고 부탁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레베카 님,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닥쳐! 내 아이 내놔! 그 더러운 손으로 누굴 안고 있는 거야!”

레베카는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보였다.

하지만 아이의 분내를 맡기도 전에 제플린이 레베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딜.”

“아악! 이 개자식아, 이거 놔! 놓으라고!”

제플린은 그대로 레베카를 끌고 가서 방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아무래도 부인이 실성한 게 분명하군.”

그는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손을 탈탈 털었다.

레베카는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지독한 통증에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던졌을 때 발목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처참한 몰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아아, 안타까워. 당신도 한때 아주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이었는데. 인간은 세월 앞에서 너무 무력하군. 그래도 다행히 옥타비오가 당신의 대체품을 찾았어. 게다가 내 딸도 생겼으니 왕국이 곧 완성되겠군.”

제플린은 비릿하게 웃어 보이고는 손목시계를 흘깃 확인했다.

“그나저나 이만 가야겠어. 공작의 장례식에 늦으면 곤란하니.”

“어딜 가려고! 지옥에나 떨어져, 제플린 데본셔!”

레베카는 떠나려는 그의 발을 잡고 세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생채기가 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곧이어 세찬 발길질이 쏟아졌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레베카는 기어이 그의 발목에서 붉은 선혈이 솟구치는 걸 보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제플린의 붉은 피가 바지에 번졌다.

레베카는 항상 그의 몸에 차가운 푸른색 피가 흐를 거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그도 자신처럼 따뜻한 피를 가진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레베카는 퉤- 하고 입 안에 물고 있던 살점을 바닥에 내뱉었다.

그가 고함을 질렀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는데. 레베카, 이건 다 당신이 자초한 거야! 모두 당신 잘못이라고!”

그는 레베카를 한 번 더 발로 걷어차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레베카는 기어서라도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눈앞에서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레베카는 열리지 않는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열어! 당장 열라고! 제플린! 제플린!”

잠시간 침묵이 흐르더니 제플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 당신은 최고의 인형이었어. 하지만, 이제 그만 폐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당신에게 원하는 건 모두 얻었으니.”

레베카의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매캐한 연기가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누군가가 불이라고 외쳤다.

뜨거운 화마가 서서히 레베카의 몸을 덮쳐왔다.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은 마음이 겪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레베카는 다가오는 사신에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빌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번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레베카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 * *

“마님! 일어나셔요!”

경쾌한 목소리에 레베카의 눈꺼풀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생생하고 끔찍한 악몽을.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약간의 짠내를 머금은 공기가 레베카의 코를 간질였다.

천천히 눈을 뜬 레베카는 푸른색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날씨가 더럽게도 맑네요. 비라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앨리스가 세숫대야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콧잔등에 흩뿌려진 주근깨를 찬찬히 보던 레베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앨리스?”

“아이, 깜짝이야. 왜 그러세요, 마님?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보다도 네가 어떻게…….”

“예? 당연히 마님의 시중을 들어야 하니까 여기 있죠. 얼른 일어나셔요. 해야 할 일이 많다고요.”

앨리스는 깨끗한 수건에 물을 묻혀 레베카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레베카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앨리스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너는 죽었잖아!’

앨리스는 레베카가 가장 신뢰하던 하녀였다.

다른 하녀와 달리 그녀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앨리스는 레베카의 남편 제플린의 손에 죽은 지 오래였다.

‘내가 죽은 건가? 그렇다면 여긴 천국……? 아니, 지옥일지도.’

레베카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자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레베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님, 많이 심란한 건 잘 알겠지만요, 어쩌겠어요. 오늘만 꾹 참으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

“아휴. 하긴 어느 누가 자기 남편 결혼식에 가고 싶겠어요. 백작님도 너무하시지.”

“결혼식이라고? 제플린이 또 결혼을 해?”

“오늘 정말 이상하시네. 예, 오늘이 결혼식 날이잖아요. 그 망할 알리시아랑 백작님이 결혼하는 날이요!”

레베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순간 무수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레베카는 활짝 열린 창문가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절벽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 같은 정원에선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레베카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바라봤다.

“그 장식은 저쪽에 두는 게 낫겠어. 아, 그건 백작님이 싫어하시는 색이야. 버리도록.”

“네, 로버트 님.”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던 로버트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레베카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로버트라고?

꽤 익숙한 이름을 곱씹어보던 레베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버트!’

그도 제플린의 손에 죽었던 수많은 고용인 중 한 명이었다.

사고사로 위장하긴 했지만 레베카는 제플린이 로버트를 죽인 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레베카를 마음에 품었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맙소사…….”

다리의 힘이 풀렸다.

레베카는 창문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돌아왔다. 그것도 내 남편의 결혼식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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