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끔찍한 장면을 두 번이나 봐야 한다니.’
레베카는 부들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붉은 드레스가 그녀의 손에 속절없이 구겨졌다.
결혼식은 빌어먹게도 아름다웠다.
알리시아와 제플린의 결혼식은 소박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낭만적으로 보였다.
이곳 발라리아 해안은 인기 좋은 휴양지였다.
요하네스 공작령에 속해 있어 이곳에서 휴양을 즐기려면 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데본셔 백작가에는 발라리아 해안가에 대대로 소유하고 있는 저택이 있었다.
덕분에 제플린과 알리시아는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은밀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레베카와 제플린의 신혼여행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레베카를 조롱하듯이 봄바람이 불어왔다.
알리시아의 면사포가 바람에 휘날리자 제플린이 은은하게 웃었다.
“이로써 데프리아 여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환호성은 터지지 않았다.
초대된 소수의 하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의 시선은 갓 탄생한 신혼부부가 아니라 백작의 첫째 부인인 레베카를 향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쏟아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플린을 노려봤다. 제플린이 조그맣게 입 모양으로 레베카에게 말했다.
‘웃어.’
제플린의 강압적인 입매를 본 순간 레베카는 정신을 차렸다.
정말 돌아왔다. 아이를 빼앗기기 전으로.
아니, 아이가 생기기 전으로. 그리고 아직 남편의 손에 완전히 망가지기 전으로.
레베카는 제플린의 말대로 빙긋 웃었다.
돌아왔다면 결과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레베카는 기꺼이 손을 들어 차가운 박수를 보냈다.
곧 부숴버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 * *
“참석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솔직히 레베카 님이 오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분홍색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알리시아가 수줍게 웃으며 레베카에게 다가왔다.
홀로 앉아 연신 와인만 들이켜던 레베카는 천천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모두가 숨죽이고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알리시아…….”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었다.
알리시아가 어떻게 경비가 삼엄한 백작저의 정원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레베카가 매일 다니던 산책로에 바싹 마른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레베카는 소녀를 안으로 들이고 정성스레 간호해주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소녀는 자신을 알리시아라 소개했다.
‘레베카 님! 당신은 제 은인이세요!’
레베카는 완전히 회복한 알리시아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보기 좋게 살이 차오른 그녀의 볼은 봄날의 꽃잎처럼 수줍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국적인 연보라색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굽이쳤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처연하게 반짝거렸다.
태곳적 미의 여신의 웃음소리로 태어났다던 요정처럼 그녀는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녀는 레베카가 그토록 원했으나 가지지 못했던 사랑스러움까지 가지고 있었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알리시아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무심코 베푼 친절이 독이 되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미 알리시아에게 마음을 뺏긴 뒤였다.
백작 부인이 되기 전까진 레베카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기점으로 그 많은 사람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녀와 연락을 점점 끊기 시작했다.
레베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작저에 홀로 남은 레베카는 항상 외로웠다.
그렇기에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좋았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알리시아의 해맑은 수다가 좋았다.
레베카는 활발한 알리시아에게 푹 빠졌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자신의 하녀로 들이기까지 했다.
그에 화답하듯 알리시아 또한 레베카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알리시아는 점점 레베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갔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알리시아의 생일날, 레베카는 알리시아에게 손수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그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욱……. 레베카 님, 저 못 먹겠어요.’
입덧이었다. 제플린의 아이라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원망할 수 없었다.
레베카는 제플린이 순진한 알리시아를 꼬드겼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짜내어 제플린에게 따지러 갔지만 제플린은 오히려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순진한 내 부인. 아름다운 남녀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이건 본능이고 자연의 섭리야. 그러니 나나 알리시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잘못은 당신이 했지. 아름다운 여인을 내 앞에 방치한 대가야.’
그는 집요하게 모든 걸 레베카의 잘못으로 몰아갔다.
오랜 시간 제플린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레베카는 그의 말에 서서히 설득되었다.
십 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에도 레베카와 제플린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백작가는 당연하다는 듯 후계자를 품은 알리시아를 제플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였다.
자책의 시간이 이어졌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 여겼다.
레베카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그렇게 살아왔다. 모든 게 부족한 자신 탓이라 여기면서.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문득 제플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레베카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완벽한 데본셔 백작 부인이어야만 했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인 걸요.”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하객들은 훈훈한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아름다운 두 명의 부인을 얻은 제플린에게 찬사를 보냈다.
제플린이 흡족하게 웃었다.
곧이어 신랑 신부의 춤이 이어졌다.
빙글빙글 도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레베카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 역겨운 자리를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레베카는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마차를 불렀다.
이전 생에서는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두 번이나 그 수모를 견딜 인내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먼저 돌아간 걸 제플린이 알면 잔소리를 퍼부을 게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부인들이 안쓰러운 얼굴로 레베카를 배웅했다.
“레베카 님,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다들 말은 하진 않았으나 이 결혼식이 역겨운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남편은 모두 제플린의 사람이었다. 그들이 쉽사리 자신에게 힘을 보탤 수 없다는 걸 레베카는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모인 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 속에 담았다. 그리고 짧게 인사를 건넨 후 마차 위에 올랐다.
마차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혼자 있고 싶어 앨리스는 다른 마차로 오게 했다.
“아악!”
레베카는 쿠션을 들어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분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해도 답답한 속은 풀리진 않았다.
립스틱이 제멋대로 번진 걸 깨달았지만 화장을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떤 게 꿈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알 수 없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레베카는 날씬한 배에 손을 올렸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작 몇 년 동안 키웠을 뿐이었지만 벌써부터 아이가 그리웠다.
부드러운 뺨과 그 달콤한 살냄새.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과 발.
동시에 소중한 아이를 안고 있던 알리시아가 떠올랐다.
레베카는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오히려 잘 됐어.’
이제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플린의 아이로 클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그녀를 위로했다.
레베카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마차의 흔들림이 심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레베카는 주먹을 앙다물고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푸른 눈을 부릅떴다.
“이제 네가 망가질 차례야. 제플린 데본셔.”
* * *
전장에서 이제 막 영지로 돌아온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한가로이 밤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다.
발라리아 해안가는 그가 좋아하는 산책로 중 하나였다.
오랜만의 고요함이었다. 율리안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해안가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던 그의 앞으로 마차가 돌진해왔다.
그를 발견한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기분이 좋았기에 율리안은 잠자코 마차에게 길을 터주었다.
마부가 고맙다며 모자를 들어 올렸다.
율리안은 자신에게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가는 마차의 창문을 흘깃 쳐다봤다.
어딘가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화장이 잔뜩 번진 여자의 눈은 붙박인 듯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드레스만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꽤 강렬한 인상이라 율리안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 마차의 인장을 바라봤다. 데본셔 백작가의 인장이었다.
율리안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마차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았다.
“레베카?”
“아아, 저분이 바로 그 유명하신 백작 부인이시군요.”
율리안의 빠른 걸음을 겨우 따라잡은 그의 집사 크로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유명하다니?”
“아! 공작님께선 전장에 나가 계셔서 모르시겠군요. 데본셔 백작이 두 번째 부인을 들였거든요. 한동안 사교계가 들썩거렸습니다.”
“첩을 들였다고? 백작 부인은 아직 젊지 않나.”
“그렇긴 하죠.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으셨으니. 하지만 부부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어쨌든 오늘 발라리아 해안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거요?”
“아니. 발라리아 해안, 그러니까 내 영지에서 첩을 들이는 결혼식을 열었단 말이야?”
“예에……. 데본셔 소유의 저택이 그곳에…….”
“크로아.”
크로아는 차가운 그의 음성에 침을 꿀꺽 삼켰다. 율리안의 검은 눈동자가 금안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떠나면서 분명히 너에게 영지를 잘 부탁한다고 했을 텐데. 그런데도 역겨운 짓거리를 허락했단 말이지. 그것도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장소에서?”
“아니, 자기 별장에서 결혼식을 하겠다는데 제가 어떻게 말립니까. 그것도 그 데본셔 백작을…….”
대답 대신 율리안은 크로아를 노려다봤다.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자 크로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인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드는 건 아주 위험한 신호였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쓸어버리든 쳐부숴 버리든 그 저택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해. 아니, 여기 해안에 영영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게 더 좋겠군. 기한은 내일까지다.”
크로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 지금 마차가 지나갈 게 뭐람. 운수 한번 더럽게 없는 날이다.
애옹.
율리안이 분노를 거두지 못하고 있자 검은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