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화 (3/232)

3.

고양이는 율리안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레오.”

레오의 등장에 율리안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율리안이 몸을 낮추자 레오가 그의 어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율리안의 부드러워진 표정을 본 크로아는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그마한 그의 숨소리를 들은 율리안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뭐해?”

“네?”

“못 들었어? 내일까지라고 했잖아. 지금 시작해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레오가 크로아를 향해 하악질을 했다.

두 쌍의 금안이 형형하게 크로아를 응시했다.

크로아는 굶주린 사자를 만난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울고 싶었다.

“다, 당장 가겠습니다!”

오늘도 일찍 퇴근하긴 글러먹었다.

크로아는 조금 울먹이며 자리를 얼른 떴다.

“꼭 몇 마디를 더 해야 움직이지.”

율리안은 크로아가 사라진 빈자리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레오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사뿐하게 내려왔다.

율리안의 머릿속으로 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가 누군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신경 쓰는 거 아니야. 그냥 그 사람을 보면 누군가가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질 뿐.”

율리안은 새하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적막한 해안가에는 고요하게 파도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누구? 요하네스 공작 부인?’

“귀신같이 알아채는군.”

율리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사교 행사를 꺼려하는 그가 레베카를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몇 번 만나지 않았더라도 레베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율리안처럼 큰 연회에서나 얼굴을 잠시 비췄다.

듣자하니 제플린이 지독하게 싸고도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레베카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했지만 그녀에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귀부인들과 재잘거릴 때도 레베카는 기계 같은 대답만 반복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제국 최고의 미녀라 떠들어댔지만 율리안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체 같았다. 그래서 레베카를 보면 어머니가 항상 떠올랐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영혼까지 말라버린 사람.

‘하지만 방금 그 눈빛은 뭐였을까.’

그러나 마차에 앉아 있는 레베카는 딴 사람 같았다.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게다가 그녀의 불같은 눈빛. 그 눈빛이 잔상처럼 율리안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잠시간이지만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한 거 아니야?’

레오가 흥미롭다는 듯 율리안을 올려다봤다.

“무슨……. 너! 내가 멋대로 내 머릿속 훔쳐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도 안 듣고 싶었거든? 네가 흘린 거야.’

그의 말에 율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턱을 괴고 있는 레오를 쓰다듬었다.

레오가 기분 좋게 갸르릉- 울었다.

사랑스러운 존재이자 동시에 지독하게 증오스러운 존재.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

그에게 레오는 그러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지만 혼자였다.

* * *

또다시 날이 밝았다.

제플린과 알리시아가 신혼여행으로 저택을 비운 탓에 드넓은 데본셔 저택은 오로지 레베카의 몫이었다.

오랜만의 평화였지만 레베카는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다.

제플린의 사냥개라 불리는 수행원들이 사방에서 은밀하게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백작님도 안 계시는데 조금 더 드시지 그러세요?”

앨리스가 디저트 한 접시를 더 내오며 말했다.

레베카는 산딸기가 앙증맞게 올라간 케이크를 잠시 쳐다봤다.

식욕이 돌았지만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먹었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일단은 평소와 같아야 했다.

레베카는 이맘때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더듬어봤다.

“괜찮아. 그냥 산책이나 하자.”

레베카는 식당을 나섰다.

주인 없는 저택은 주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레베카가 안주인의 일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능한 하녀장과 집사가 제플린이 돌아왔을 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작 부인이었지만 그건 그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레베카는 집안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마땅히 안주인이 해야 할 예산관리도 제플린은 레베카에게 맡기지 않았다.

‘당신은 그냥 한 떨기 장미꽃처럼 앉아 있으면 돼. 복잡한 일은 내가 다 할 테니.’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다. 레베카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저택 안에서 자수를 놓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싫증 나는 날이면 하릴없이 정원을 서성거리곤 했다.

가끔 가까운 영애나 부인들을 티파티에 초대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누구도 그녀의 초대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종종 레베카에게도 사교 행사 초대장이 날아오곤 했다.

하지만 제플린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파티 참석을 금했다.

순수한 레베카가 속물에게 오염이라도 될까 염려된다는 핑계였다.

“인형이라…….”

레베카는 죽기 전 제플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완벽한 인형.

그의 말이 맞았다. 백작저는 커다란 인형의 집이었고, 자신은 그곳에 앉은 아름다운 인형일 뿐이다.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가여운 인형.

상념에 잠겨 정원을 거닐던 레베카는 천장이 유리 돔으로 되어 있는 전시관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빛의 전당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유리돔은 햇볕을 가리기 위해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님이 올 때만 검은 천이 거둬졌다.

데본셔 백작가는 대대로 예술적 조예가 깊기로 유명했다.

전대에 걸쳐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예술 작품들을 사들였다.

특히 제플린은 역대 데본셔 백작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작품을 수집했다.

작품 관리를 위해 온도와 습도까지 조절되는 건물을 따로 만들 정도로 예술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강박적이었다.

레베카는 빛의 전당을 부숴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절망하는 제플린을 그려봤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빛의 전당은 경비가 철저했다. 지금도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전시관 입구 앞을 상주하며 지키고 있었다.

레베카를 발견한 기사 몇몇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 레베카는 눈길을 돌렸다.

아직은 그녀에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든든한 친정이라도 있었더라면 진작에 그와 이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미한 자작가에 불과한 레베카의 친정은 결혼 후 파산했다.

레베카가 회귀하기 전까지도 그녀의 친정은 백작가에 의지해 겨우겨우 가문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해가 강하네요. 살이 안 타게 조심하세요.”

앨리스가 숄을 가져와 레베카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양산을 들어 햇빛을 가려주었다.

“앨리스, 오래 양산을 들고 있으면 네 팔이 아프잖니. 아니면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

“아니에요. 마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지급 답답하시잖아요. 이렇게 산책이라도 해야지 속이 풀리지 않겠어요?”

이전 생에서 알리시아가 둘째를 낳은 날, 레베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겠다며 앨리스는 그녀를 마을 축제로 데려갔다.

정말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허락 없이 외출한 게 알려지자 제플린은 앨리스를 죽을 때까지 때렸다.

레베카는 자신의 눈앞에서 피투성이로 죽어가던 앨리스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에겐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기분이었다.

“소원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앨리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줄게.”

“소원이라면 지금처럼 마님과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렴. 보석? 아니면 봉급을 올려줄까?”

“마님.”

앨리스가 양산을 잠시 바닥에 두고 레베카의 두 손을 잡았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저 이렇게 마님의 영원한 측근이 되고 싶어요.”

애정 어린 앨리스의 미소에 레베카도 따라 웃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때로 돌아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황량한 저택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앨리스밖에 없었다.

“그래. 고맙구나. 역시 앨리스 너밖에 없어. 그럼 조금만 더 걷다가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레베카의 말에 앨리스는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의 미소는 봄볕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데본셔가에 스며든 유일한 온기였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레베카는 이층에 있는 자신의 방을 향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플린의 방과 서재가 있는 삼층을 올려다봤다.

부부는 보통 침실을 공유했지만 제플린과 레베카는 달랐다.

제플린은 잠자리가 끝나면 언제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혼자 잠들었다.

레베카의 잠버릇에 자신의 얼굴에 생채기라도 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기를 원했다.

제플린은 꼭대기 층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누구도 그의 영역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삼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었고, 그 아무나에는 레베카도 포함되었다.

레베카는 삼층에 있는 서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플린은 레베카가 지식을 쌓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모든 책은 그의 서재에 있었기에 특별한 용무 없이는 레베카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저곳에 백작가의 모든 게 있겠지.’

제플린은 외출할 때면 서재의 문을 항상 단단히 잠갔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걸 봐선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비밀이 서재 안에 숨겨져 있는 게 확실했다.

레베카는 서재의 문을 올려다 봤다.

‘뒤지다 보면 뭔가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레베카는 앨리스가 없는 틈을 타 삼층 계단으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출입 금지입니다. 마님.”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부진 체격의 하인이 레베카의 앞을 막아섰다.

“알고 있네. 길을 잘못 든 것뿐이야.”

레베카는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용 드레스를 가지고 올라오던 앨리스가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봤다. 그리고 가늘게 눈을 뜨더니 생각에 잠겼다.

“마님, 서재에 가고 싶으세요?”

“뭐?”

레베카가 화들짝 놀라며 자수를 놓던 손을 멈추었다.

“아까 계단으로 향하시는 걸 봤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반짝이는 앨리스의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레베카는 옛날 일이 떠올랐다.

‘축제에 잠시만 갔다 오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가요, 마님!’

또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너무 위험해.”

“어차피 백작님은 일주일 동안 돌아오시지 않을 텐데요. 경비가 느슨해진 지금이야말로 기회예요.”

앨리스의 말이 맞았다.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도박이었다.

레베카가 망설이자 앨리스는 빠르게 속삭였다.

“들어보세요. 지금 삼층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한스 한 명밖에 없어요. 다행히도 제가 한스랑 친분이 좀 있어서요. 그를 꼬드겨서 주방으로 데리고 갈게요. 그 사이에 마님은 삼층으로 올라가세요.”

“하지만 앨리스…….”

“정말 괜찮다니까요! 책을 읽고 싶으신 거죠? 백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적적하실 테니 책이라도 읽으시면 좋을 거예요.”

끈질긴 앨리스의 설득에 레베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저에서 도망치던 날처럼 레베카의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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