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로버트는 초조하게 기다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랫동안 애써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까지 기어코 카디르교를…….’
데프리아교가 공식 국교로 지정되기 전, 로탄더스 제국에는 수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혜의 신인 카디르를 섬기는 카디르교가 가장 성행했다.
제국의 보수적인 전통과 맞닿아 있어 카디르교는 손쉽게 로탄더스의 사람들에게 스며 들 수 있었다.
카디르교의 사제들과 열렬한 신도들은 이마 한가운데에 지혜를 의미하는 문신을 새겼다.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의 눈을 본뜬 문신이었다.
이 문신을 새긴 사람들은 어딜 가나 몸가짐을 철저하게 신경 썼다.
카디르교는 지나친 쾌락과 요행을 경계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가 카디르교를 관통하는 교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령 수준이었던 카디르교의 몇몇 규칙이 점차 강압성을 띠기 시작했다.
옷부터 시작해서 요일별로 먹어야 하는 음식까지 정해졌다.
신도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강박적으로 규칙을 지켰다. 그리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배척했다.
이런 카디르교의 행태에 불만이 쌓인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던 때였다.
제국에 반란이 일어났다.
정권 교체와 동시에 새로운 국교가 지정되어 데프리아교 이외의 종교는 갈 곳을 잃기 시작했다.
데프리아교의 신전은 사시사철 황금으로 번쩍였다. 교황은 황제보다 더한 사치를 즐기기도 했다.
행운의 여신답게 개개인의 노력보다는 느닷없는 행운을 가장 훌륭한 가치로 여겼다.
매달 신전에 바쳐야 하는 헌금도 십육면체 주사위 두 개로 결정되었다.
무작위적인 행운 앞에서 귀족도, 평민도 평등했다. 카디르교와 정반대의 교리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국교에 환호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탄압이 시작되었다.
종교탄압은 이상할 정도로 카디르교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카디르교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듯한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카디르의 신전은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엔 데프리아의 신전이 올려졌다. 작은 시골에 있는 신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데프리아교의 교황은 카디르교를 사기꾼들의 종교라 선언했다. 신도들의 헌금을 받기 위해 터무니없이 엄격한 교리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카디르 대신전에는 옮겨 붙지도 않고 절대 꺼지지도 않는 지혜의 불이 있었다.
교황을 그걸 이용했다.
교황은 군중 앞에서 지혜의 불을 꺼트렸다. 카디르교의 몇몇 고위 신관들은 교황이 꺼트린 지혜의 불이 가짜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사로잡힌 뒤였기에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 후로 진짜 지혜의 불은 종적을 감추었다.
교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묘하게 조작된 증거들을 쏟아내었다.
그렇게 실망한 다수의 카디르 교인들이 데프리아교로 개종했다.
그럼에도 신앙을 지킨 신도들은 있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카디르 교인을 환영해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핍박은 오랜 시간 지속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데프리아교 이외의 종교들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혔다.
다만, 카디르교가 사기 집단이었다는 부정적인 기록만은 이어져 내려왔다.
이제 지혜를 의미하던 부엉이 문신은 불행의 상징이 되었다.
그 누구도 카디르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때문에 겨우 살아남아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카디르 교인들은 문신을 숨기기 위해 모두 두건을 두르거나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다녔다.
대부분이 정착을 못하고 떠돌거나 산골짜기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아갔다.
그런 가문의 종교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은 부모가 새긴 이마의 문신을 불로 지지거나 칼로 찢어 없애기도 했다.
로버트도 그런 젊은이 중 하나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카디르 신전에서 사제를 지내던 가문이었다.
잔인한 핍박에도 그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로버트는 가문의 전통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카디르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신이 그에게 해준 것이라곤 불행뿐이었다.
진짜 신이 있다면 그의 가족들이 이렇게 살 리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교리에서 쉽사리 벗어나진 못했다.
스스로 문신을 찢고 가문 밖으로 뛰쳐나왔으나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교리들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카디르교의 신자처럼 행동할 때마다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그는 제플린을 만났다.
가문을 나온 로버트는 정보상에서 일을 했었다.
마침 수년간 꾸준히 실종된 인형술사들의 의뢰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단서들이 데본셔 백작저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백작저에 접근했다가 결국 사냥개들에게 붙들렸다.
제플린은 그에게 분노하기보다는 로버트의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을 높게 샀다.
그는 로버트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자신의 사냥개가 될 것을 요구했다.
로버트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플린이 이미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제플린은 사로잡은 로버트의 가족을 어딘가에 숨겨 놓고 포상을 내리듯 검열된 편지와 사진을 건네주었다.
이미 버렸던 가족일지라도 핏줄의 정은 무시할 수 없었던 걸까.
로버트는 결국 제플린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로버트는 백작저에서 가장 오래된 사냥개가 되었다.
그러다 알리시아가 왔다. 알리시아를 길들이기 위해 대부분의 사냥개가 그녀에게 붙었다.
제플린은 가장 유능한 로버트와 소수의 사냥개만을 레베카에게 배정했다.
레베카가 계단에서 구른 일로 그마저도 떨어져 나가고, 이제 로버트 혼자만이 레베카를 담당했다.
사실상 이미 길든 레베카보단 칸나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어린 사냥개에겐 노련한 사냥개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로버트가 지금까지 칸나를 지켜본 바, 칸나는 제플린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칸나는 제플린보다는 레베카에게 더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의심은 이층 창문에서 레베카를 껴안고 뛰어내린 칸나를 보고 확신으로 변했다.
레베카는 여자치고 키가 큰 편이었다.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레베카를 양손에 안고서도 칸나는 여유롭게 바닥에 착지했다.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휘파람을 불었다.
‘백작의 인재를 보는 능력은 무시할 수 없군.’
로버트는 곧장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를 하루 종일 괴롭히던 신의 존재라던가 가문의 일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잠시 잊혔다.
그의 감이 레베카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낸다 하더라도 제플린에게 보고할 생각은 없었다.
로버트는 제플린이 어떻게 레베카와 결혼했는지 처음부터 다 지켜봤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었다. 소유물에 대한 집착일 뿐이지.
그래서 그는 항상 레베카를 가엾게 여겼다. 이따금 그녀의 실수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한 동정심 때문에 레베카에게 관심이 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레베카는 카디르 교리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여자였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사치를 부리지 않으며 겸손했다.
그리고 천사가 질투할 만큼 얼굴마저 아름다웠다.
만약 카디르교가 아직까지도 성행했더라면 레베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성녀로 추앙받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레베카를 대하는 제플린의 잔악무도한 짓을 보고 있자면 그녀는 악마의 손에 떨어진 가여운 성녀처럼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레베카를 구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감정이 단순한 기사도에서 비롯된 오지랖인지, 아니면 곤란에 빠진 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카디르의 교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기가 어찌 되었든 로버트는 자신에게 그녀가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게 막을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 * *
“좋은 밤입니다. 마님.”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로버트였다.
레베카는 잠시 놀라 눈을 떴다가 다시 가늘게 좁혔다.
문득 돌풍이 불어와 로버트의 앞머리가 들썩였다.
레베카는 그의 이마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발견하곤 슬며시 웃었다.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시간 동안 레베카는 과거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로버트의 가족이 떠올랐다.
그의 가족은 로버트의 조촐한 장례식이 끝나고 백작저의 굳게 닫힌 철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겨우 섬에서 풀려났는데! 로버트가 죽었다니……. 게다가 이미 장례까지 치렀다니요! 로버트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을 타던 아이입니다! 다시 조사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이 억울함을 황제께 빠짐없이 고하겠습니다!’
문지기들이 그들을 재빠르게 입막음하고 끌고 갔기에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로버트의 가족은 검은 옷과 흰색 카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서 이마 한가운데에 부엉이의 눈을 새기고 있었다.
레베카는 어릴 적 아버지와 떠난 여행에서 카디르교 신자의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레베카에게 카디르 신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레베카는 로버트의 흉터를 바라보며 그때 들었던 핍박의 역사를 떠올렸다.
제플린은 사람의 약점을 쥐고 충성심을 받아냈다. 카디르 여신을 섬기는 가문이라는 사실은 제플린에게 충분한 먹잇감이었으리라.
레베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로버트는 잠시 멍하니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녀의 미소와 뒤얽힌 라일락 향기가 어지러웠다.
“로버트 크로울리. 엿듣고 있었던 건가요?”
“엿듣다니요. 우연입니다. 오늘 달빛이 하도 좋아서 산책을 나왔을 뿐입니다.”
“정말 충직한 하인이네요. 이런 늦은 시간까지도 제 일을 하고 있다니.”
“그저 정원을 거니는 것뿐입니다. 일이 아니라 찰나의 휴식입니다.
“크로울리.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저택의 모든 하인이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로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딱히 그를 질책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로버트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베카에게 있어 지금은 꽤 곤란한 상황일 터였다.
그녀가 몰래 빠져나온 걸 자신이 백작에게 한마디라도 한다면 당장이라도 칸나가 매질을 당하거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로버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녀가 앉아 있고 그가 서 있었지만 로버트는 어쩐지 레베카가 자신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로버트의 표정을 보고 레베카가 말했다.
“그리 놀라지 마세요. 당신을 질책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당신은 주어진 일을 할 뿐이잖아요.”
로버트는 약간 얼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그, 그럼……?”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환한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눈부시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