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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화 (20/232)

20.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달빛이나 즐기자고요. 예전부터 크로울리랑은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로버트라 불러주십시오.”

“왜죠? 자신의 성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그런 게 아니라…….”

“핏줄의 정이란 건 참 잔인하죠.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조차 혐오하면서도 그들을 살리기 위해 개가 되다니.”

차마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버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쳐들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레베카는 요동치는 로버트의 눈동자를 보고 소리 죽여 웃었다.

로버트는 팔에 소름이 돋아 주먹을 쥐었다.

차갑게 웃는 레베카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로버트가 조바심이 나는 걸 꾹 참고 천천히 되물었다.

“뭘 알고 계신 겁니까.”

“많이 알고 있는 건 없어요. 그저 당신의 가문이 유서 깊은 카디르교라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제플린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

로버트가 제플린에게 잡힌 약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대외적으로 그는 고아로 컸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레베카는 그가 허둥지둥하는 걸 잠시 즐기다 뜸 들여 입을 열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내가 당신을 구해줄 거라는 사실.”

“저를 구해주신다고요? 레베카 님이요?”

로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레베카를 훑어봤다.

레베카는 두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칸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딜 훑어봐. 눈알을 뽑아버리기 전에 그 더러운 눈길 치우지.”

“괜찮아, 칸나. 지금 내 몰골이 믿음직스럽지는 않잖니.”

레베카의 만류에 칸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눈빛만은 계속해서 로버트를 향해 있었다.

마침 잘되었다. 레베카는 칸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종이와 펜을 주겠어?”

칸나가 작은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레베카는 종이에 무어라 쓰더니 반으로 곱게 접고 로버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여기에는 당신이 그토록 찾던 가족의 거처에 대한 단서가 있어요. 정확히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정도 정보밖에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유능하니 언젠가 찾을 수 있겠죠?”

레베카의 말에 로버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마님을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제가 이십여 년이 넘도록 찾았지만 손톱만큼의 정보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순진한 마님을 어떻게 해야 할까.

로버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법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님. 그런 협박이라면 백작님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설프게 그를 따라 하지 마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한에서 마님을 도울 테니 그런 협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저는 조건 없는 도움을 바라지 않아요. 빚을 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대신 우리 거래를 하죠. 제가 먼저 이 정보를 당신에게 드릴게요. 제 눈과 귀가 되어주세요.”

레베카는 로버트에게 쪽지를 건넸다.

떨리는 손으로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로버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배신하면 어쩌시려고 먼저 정보를 내어주신단 말입니까.”

“전 로버트를 믿으니까요. 당신, 카디르교잖아요. 카디르교 신자들은 거짓말도 배신도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버트는 예쁜 눈을 깜빡거리는 레베카를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조금 이해가 갔다.

어쩌다가 흘려들은 정보를 가지고 칸나가 이것저것 조언을 했나 보았다.

꽤 양질의 정보였지만 백작 부인이니 그 정도는 자신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었을 테다.

부부의 침실에선 수만 가지의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어리숙한 마님은 그 귀중한 정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착하다고 믿는 거겠지.

그럼 그렇지, 레베카는 레베카였다.

로버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레베카 님, 사람을 그리 쉽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카디르 신자라 하더라도 나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흉터 보이시나요? 열다섯 살 때 아버지 앞에서 스스로 문신을 찢고 가문에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냥 카디르 신자가 아니라 로버트 크로울리잖아요. 카디르교의 고위 사제를 대대로 맡았던 가문의 후계자죠.”

“그래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니요. 로버트는 항상 무채색의 옷만 입고 다니죠? 다른 사람들이 신을 찾을 때 당신은 흉터를 문질러요. 그리고 누군가 맞거나 죽을 때 당신은 허공을 보더군요. 크로울리, 당신은 카디르교를 버리지 못했어요. 그러면서도 용케 제플린의 사냥개로 남아 있었네요.”

로버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레베카는 제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습관들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과 별개로 레베카의 눈썰미가 놀라웠다.

자신처럼 하찮은 평민은 귀족들에겐 그저 가구와 같은 것일 텐데.

설마,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자신을 예의주시해왔단 말인가.

레베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로버트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저를 도와줬다는 건 알고 있어요. 당신이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이 정보로 그동안 당신이 베푼 호의를 갚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

이전 생에서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 건 자신이었다.

때문에 그를 제 편으로 들이지 못하더라도 레베카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전 계산은 확실히 하는 편이라. 그런데 당신은 정말 할 수 있나요? 당신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저지른 데본셔 백작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지켜볼 수 있나요?”

레베카가 비뚜름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눈에 광기 같은 것이 어렴풋이 서렸다.

“로버트. 나는 절대 못 봐요. 우리 복수해요. 처절하게 망가뜨려 버리자고요. 그가 괴로워서 죽고 싶다고 애걸할 때까지. 모두가 힘을 합치면 불가능하지도 않아요.”

로버트는 물끄러미 그녀의 악랄함에 가까운 미소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일부러 제 본성을 숨기고 조용히 지냈던 건가.

그가 구하려 했던 성녀가 오히려 그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성녀가 아니라 악녀일지도.’

빛 하나 들지 않는 구렁텅이에 갇혀 지낸 기나긴 세월.

드디어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는 그 손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잡고 싶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환한 달빛에 질세라 라일락이 향기를 쏟아내던 밤, 로버트는 레베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하얀 손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로버트 크로울리.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 *

이른 아침, 다나에는 눈이 절로 떠졌다.

레베카가 그녀에게 제안한 일 때문에 며칠간 잠을 설쳐 눈 밑이 퀭했다.

다나에는 서둘러 몸단장을 대충 마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테오를 흘깃 보고는 침실 문을 열었다.

“마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유일한 하녀 캐서린이 반갑게 인사했다.

다나에는 잠시 캐서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제플린의 끄나풀이에요.’

레베카는 그동안 제플린이 오벨리아가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다나에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 있는 제플린의 사냥개도 알려주었다.

다나에는 캐서린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쥐꼬리만 한 봉급에도 잘 버텨주어 거의 한 가족처럼 여겼던 아이였다.

배신감에 당장이라도 뺨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써 참았다.

“잠시 시장에 다녀오마.”

“그러세요? 그럼 저도 같이…….”

“아니, 됐어. 이따가 남편이랑 아이들이 깨어나면 아침이나 제대로 챙겨주도록 해. 아, 그리고 시장 아주머니들이랑 수다 떨다가 늦을 수도 있으니까 점심까지 준비해두고.”

다나에는 캐서린을 따돌리고 집 밖을 나섰다.

그리고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한 다음 레베카가 일러두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슥한 골목에는 약속대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나에는 마차 안에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바구니가 있는 걸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모두 그녀의 가족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었다.

‘역시 내 딸. 철저하구나.’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나에는 벅찬 가슴을 누르며 창밖 풍경에 눈을 돌렸다.

요하네스 공작 성으로 가는 길은 내내 평온했다.

* * *

“흠, 지금쯤 도착하셨으려나.”

레베카는 침대에 누운 채로 로버트가 가져온 서류 꾸러미를 읽으며 말했다.

칸나가 식은 찻잔에 뜨거운 차를 다시 따르며 말했다.

“네, 아마 그러실 겁니다. 믿을 만한 아이들을 호위로 붙여 드렸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그나저나 로버트 대단하네. 사냥개의 정보를 이렇게 상세하게 알다니”

“아무래도 사냥개가 된 지 오래 됐으니까요.”

레베카가 로버트에게 부탁한 첫 번째 일은 제플린의 사냥개들을 조사해 달라는 일이었다.

제플린이 쥐고 있는 목줄의 정체를 알 수만 있다면 사냥개들을 제 편으로 돌릴 수 있으리라.

꼭 레베카의 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제플린의 곁을 떠나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레베카는 사냥개의 신상정보와 약점들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레베카가 가장 얻고 싶어 하던 정보는 없었다.

하녀장 그레이스 던컨.

전대 데본셔 백작 때부터 이곳에 있던 그녀는 제플린의 사람이 아니라 데본셔가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백작가의 비밀을 제플린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작가의 모든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공략해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순수하게 백작가에 충성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데본셔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만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 백작가를 무너뜨리려는 레베카의 계획에 순순히 따라줄 리가 없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스는 딱히 제플린에게 잡힌 약점도 없었다.

그녀에게 있던 하나뿐인 딸마저 세상을 떠나 남은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가나 목적을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추악한 가문에 충성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녀의 출신이나 이력으로 미뤄보자면 그녀는 다른 훌륭한 가문으로 충분히 이직을 하고도 남았다.

매일같이 고용인들에 대한 학대가 이어지는 곳에 발을 붙이고 있을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레베카는 이마를 짚고선 로버트에게 받은 서류들을 칸나에게 건넸다.

“다 봤으니 없애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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