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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1화 (21/232)

21.

“예? 이걸 전부 다요? 나중에 필요하실지 모르니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괜찮아. 다 외웠으니까. 후환을 남겨둬서 좋을 건 없지.”

“이걸 그 사이에 전부 다 외우셨다고…….”

“응. 보통 다 그러지 않아? 뭐가 이상해?”

“아, 아닙니다. 태우겠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지금 제플린은 어디에 있어?”

“백작은 궁정 회의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잘됐네. 오후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까. 잠시 밖에 나갔다 와야겠어.”

“아직 몸이 다 회복되시지 않았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제가…….”

레베카는 이불을 걷고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뛰다가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다.

칸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실 크게 다치지 않았어. 가볍게 삔 것뿐이었어.”

“하지만 의사가 최소 두 달 이상은 누워 계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집 주치의들은 감기에 걸려도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굴어. 혹시라도 내가 잘못돼서 제플린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거겠지. 난 오랫동안 그 사람들에게 진찰을 받았어. 그 정도 꾀병을 꾸며내는 건 일도 아니지.”

레베카는 옷장을 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죄다 불편한 옷들뿐이구나. 최대한 편안한 옷을 입고 싶은데…….”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에 레베카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레이스가 정원사들에게 무어라 고함치고 있었다.

분명 잔가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는 그레이스의 완벽주의 성향에 거슬리는 일이 있던 게 틀림없었다.

레베카는 물끄러미 그레이스를 보다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정원사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정원사의 수수한 옷차림을 훑어보던 레베카의 눈이 번뜩였다.

* * *

“쯧쯧. 다들 장인 정신이 없어.”

그레이스는 정원사들에게 퍼붓던 기나긴 잔소리를 끝마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뒤통수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을 완벽하게 하려면 이 정도 군소리는 별스럽지 않았다.

그때 칸나가 종종걸음으로 문을 나서는 걸 보았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눈으로도 칸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저쪽으로 가면 남자 하인들 숙소가 있을 터인데…….’

그레이스는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두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칸나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칸나는 다른 하녀들과 달리 구시렁거리는 일 없이 주어진 일을 항상 완벽하게 해내고는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가르칠 것이 없는 아이였다.

‘사고를 칠 만한 아이는 아니지.’

그녀는 의심을 거두고 고용인들만 쓰는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레이스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들었다.

이층에서 레베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카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레베카는 사라졌지만 그레이스는 그녀가 있었던 공간을 시린 눈으로 잠시간 올려다봤다.

* * *

“여기로 나가시면 됩니다.”

로버트가 벽돌 몇 개를 치우자 그 밑으로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나왔다.

“그리고 여기,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로버트는 묵직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물건으로 잘 구해주셨군요. 고마워요.”

로버트는 평민 남자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투박한 모자를 꾹 눌러쓴 레베카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아프신 게 아니셨군요. 그리고 그 복장도 참…….”

“무척 편한 걸요. 이렇게 편한 걸 당신들만 입고 다녔다니 질투가 날 정도예요.”

“왜 계속 말을 놓지 않으시는 겁니까. 불편합니다.”

“로버트는 저보다 연장자잖아요. 거의 아버지 또래이신 분께 그럴 수는 없지요.”

로버트는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참았다. 며칠간 레베카와 대화를 하면서 그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쾌활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고집이 황소만큼 셌다.

로버트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백작님은 수도에 가셔서 밤늦게야 돌아오실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알겠어요. 로버트는 칸나를 지켜줘요.”

“어차피 항상 침대에 누워 계셨으니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예의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지금 레베카의 침대에는 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칸나가 누워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어올 때를 대비한 일이었다.

로버트가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고는 개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넣는 레베카에게 말했다.

“돌아올 때 조심하십시오. 약속한 시간에 제가 이곳에 있겠습니다만, 일이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하녀장이나 다른 사냥개에게 얼굴을 보이지 마십시오.”

레베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멍을 빠져나갔다.

“하아.”

담 하나 넘었을 뿐인데 같은 공기도 백작저가 아닌 곳에서 맡으니 좀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안에 있었을 때는 좀 더 높아 보였던 것 같은데.”

레베카에게 있어 백작저의 담은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막상 저택을 벗어나 밖에서 보니 그저 평범한 담일 뿐이다.

처음엔 제 발 가는 대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러나 이내 레베카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뜀박질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발목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내달려도 자신을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달콤한 자유에 레베카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레베카의 입가에 홀가분한 미소가 번졌다.

* * *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호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짐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백작저에서 목적지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안락한 객마차를 탈 수도 있었겠지만 레베카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얻은 자유의 시간이었다.

레베카는 남장을 한 김에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충동적으로 지나가는 상인의 짐마차를 불러 세웠다.

어릴 적 아버지와 배낭여행을 다닐 때 종종 이렇게 짐마차를 얻어 타고는 했었다.

레베카는 상인에게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간다며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여놓았다.

자신도 놀랄 만큼 능숙한 거짓말이었다.

얼굴에 흙칠을 하고 일부러 가장 해진 옷을 골라 입은 보람이 있었는지 상인은 흔쾌히 그녀를 짐마차에 태워주었다.

짐마차에는 원두가 잔뜩 실려 있어 레베카는 짧은 여정 내내 향긋한 커피향을 맡으며 갈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레베카는 잊지 않고 상인에게 물었다.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하. 은혜는 갚을 필요 없어. 오늘은 데프리아 여신께서 잘생긴 청년에게 행운을 베푸신 거라 생각해.”

“그래도 성함만 알려주세요.”

“고집이 센 청년이구만. 내 이름은 아돌프라네. 저기 중심가에서 원두상을 하고 있어. 언젠가 한번 들르면 커피라도 한 잔 내주겠네.”

“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짐마차가 요란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자 레베카는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는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팻말들은 녹이 슬어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렸다.

<유스타프의 식물 연구소>

커다랗게 글씨가 쓰인 팻말 밑으로는 경고문구가 잔뜩 적혀져 있었다.

<방해하지 마시오>

<방해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 못함>

<진짜진짜 무서운 일이 벌어짐>

‘퍽이나 무서운 경고다.’

악필로 휘갈겨 쓴 그의 글씨를 보기만 해도 그가 이전 생에서 괴짜라고 소문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유스타프 맥핀.

그는 훗날 악마의 발톱의 효능을 알아낼 식물학자였다.

그는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걸로 유명했다.

가족도 없고,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연구뿐이라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약점도 없었다.

제플린이 갖은 수를 써서 그를 영입하려 애썼으나 결국 실패한 인재이기도 했다.

레베카는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예상대로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맥핀 씨!”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자, 결국 갖은 욕설과 함께 다 썩어 가는 대문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앞의 팻말 못 봤어? 방해하지 말고 꺼져!”

‘윽, 담배 냄새.’

매캐한 담배 연기에 레베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유스타프가 담배를 입에 물고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온 은발을 질끈 묶은 유스타프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마른 감은 있었으나 그래도 대체로 골격이 단단한 편이었다.

피곤함에 찌든 은회색의 눈이 레베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준수한 그의 외모에 레베카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생각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스타프 씨. 제안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유스타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제안? 또 그 백작 뭐시기 하는 놈이 보낸 사람이야? 말했지, 귀족 놈들 돈벌이에 놀아날 생각 없다고. 지금이야 원하는 연구를 해주겠다고 살살 꼬시지만 결국엔 지들 입맛에 맞게 주물럭거릴 거 뻔히 알아. 당장 꺼져!”

쾅, 하고 문이 세차게 닫혔다.

레베카는 로버트가 구해다 준 종이봉투를 품속에 소중히 안고는 문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제가 가져온 선물도 필요 없겠네요?”

“…….”

“방금 밭에서 캐낸 신선한 봄 감잔데. 무려 몽푀르에서 난…….”

“들어와.”

‘봄 감자’라는 말에 유스타프는 냉큼 문을 열었다.

레베카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그의 엉망진창인 연구실로 들어섰다.

* * *

“용케 제대로 된 감자를 구했군. 요새 감자들은 개량을 얼마나 해대는지 본연의 맛이 없다고.”

유스타프는 갓 쪄낸 포슬포슬한 감자를 후후 불어가며 게걸스럽게 먹었다.

“흠, 흠.”

정신없이 먹던 그는 레베카의 헛기침에 그제야 그녀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머쓱하게 감자 한 알을 내밀었다.

“먹을래……?”

레베카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소파와 오래된 책들이 잔뜩 올려진 큼직한 테이블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스타프는 이 공간을 응접실 겸 서재, 그리고 침실로까지 쓰는 모양이었다.

이곳 외의 장소에는 커다란 식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 식물에 둘러싸인 레베카는 마치 정글 한복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제안이 뭐야?”

배가 어느 정도 찼는지 유스타프는 방금보다는 퍽 유해진 얼굴로 레베카에게 물었다.

레베카는 테이블 위에 너저분하게 펼쳐진 책들의 제목을 훑었다.

‘세계 모든 염료 백과사전, 악마의 이름이 붙여진 식물들, 악마의 발톱에 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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