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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96화 (96/232)

96.

신중히 패를 던지는 클럽원을 살피던 자히드라의 눈길이 마주 잡은 율리안과 레베카의 손을 향했다.

율리안은 귀까지 벌겋게 된 채로 레베카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발견한 자히드라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보아하니 단순한 계약 결혼은 아닌 것 같군.’

믿어 의심치 않게 율리안을 여기까지 이끌어 낸 건 레베카였다.

자히드라는 율리안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거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향해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한낱 공작의 아내로 있기에 그녀는 아까운 인재였다.

제 자식, 아니 하다못해 황태자비라도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하고 황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폐하,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과는 무효표 하나를 제외하면 만장일치나 다름없었다.

무효표를 누가 던졌는지는 알 만했다.

테레사였다.

테레사는 지켜보겠다는 듯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수두룩하게 나온 찬성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히드라가 흐뭇하게 테레사를 바라보았다.

휘둘리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해 거둬들였던 사람이었다.

테레사는 자히드라가 바라던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반대표를 던지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율리안에게 마음이 기울었다는 의미였다.

‘대단하군. 정말로 모두를 구워삶을 줄은 몰랐는데.’

자히드라는 단시간에 넘어가 버린 자신의 클럽 회원들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젠 자신의 사람이 된 율리안과 레베카의 능력이 만족스러웠다.

“요하네스 공작님, 그리고 레베카 오벨리아 양.”

애브러햄이 둘을 불러 세웠다.

그의 부름에 레베카와 율리안이 등을 돌렸다.

레베카는 무척이나 초조했지만 능숙하게 감정을 숨겼다. 그녀의 얼굴 위엔 고요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자히드라가 애브러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애브러햄이 말했다.

“무효표 하나, 찬성표 열다섯으로, 요하네스 공작님과 레베카 오벨리아 양의 몽블랑 클럽 입단을 허합니다.”

‘됐다!’

레베카는 채신머리없이 튀어나오려는 환호성에 입을 황급히 틀어막아야 했다.

율리안의 입술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기뻐하는 두 사람을 살펴보던 자히드라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나, 입단하기 전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조건이라니요?”

율리안이 대번에 낯빛을 흐리고선 물었다.

“자네들의 약점을 한 가지씩 내줘야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시다시피 이건 엄청난 대업이야. 혹여나 배신자가 나온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원래라면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연설할 기회도 주지 않아. 자네가 요하네스 공작이라 특별히 배려해 준 걸세.”

‘그러니까 이 정도까지 성의를 봐줬으니 꼬리 자르기를 할 구실을 달라?’

자히드라의 속내를 읽어낸 율리안의 목에 힘줄이 바짝 섰다.

어쩐지 그가 순순히 초대에 응한다고 했다.

분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자히드라 앞에 엎드리는 것 외엔 별수가 없었다.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으리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황제가 약점을 달라고 하거든, 가장 소중하지만 가장 쓸데없는 걸 줘버려.’

살롱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레베카가 그에게 말했다.

대체 그녀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걸까.

무심하게 황제의 조건을 듣고 있는 레베카를 보며 율리안은 또다시 그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레베카가 그에게 뭘 버리라고 하는지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제 깊은 곳까지 다 안다는 그 푸르른 눈동자로 레베카는 망설이고 있던 자신의 등 뒤를 떠밀고 있었다.

그래, 버려버리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율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무언가 걸라고 하시면 그래야지요. 뭐가 좋을까요……. 그렇지. 제 작위를 걸겠습니다.”

이건 자히드라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작위를 걸겠다?”

“예. 혹여나 일이 잘못되거나 제가 배신을 한다면 제 공작위를 폐하십시오. 제가 폐하께 그 정도도 못 드리겠습니까.”

“파하하하!”

평소의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온 율리안의 말에 황제가 방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는 책상까지 두들겨 가며 박장대소했지만 정작 그의 웃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점차 파리해졌다.

황제가 저렇게 크게 웃는 건 보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심히 마음에 들거나.

심히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황제가 율리안의 발언을, 네까짓 게 요하네스 공작의 작위를 뺏어갈 수 있겠냐는 도발로 생각했을지, 아니면 영원한 충성의 맹세로 생각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자히드라가 애브러햄에게 소리쳤다.

“좋다!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겠지? 애브러햄! 가서 입단서를 가지고 오게. 지금 당장 요하네스 공작의 서명을 받아야겠으니.”

자히드라는 하얀 치아가 다 드러날 정도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율리안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어딘가 공포스러움까지 느껴지는 기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보란 듯이 그가 내민 입단서를 받아들였다.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였지만 결국 황제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약점을 찌르겠단 협박이 담긴 계약서였다.

이래서야 제플린 같은 무뢰배와 뭐가 다를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펜을 들어 입단서 위에 서명을 했다.

예리한 펜촉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종이 위에 미끄러져 내렸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분부대로 했습니다. 이제 제 가문의 명줄은 폐하의 손에 있는 겁니다.”

율리안은 펜을 내려놓고는 입단서를 황제 앞으로 슥 내밀었다.

황제는 그의 서명을 흘깃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친 둘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숨 막히는 신경전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을 깬 건 레베카였다.

“그럼 이제 제가 서명하면 되겠습니까?”

율리안을 응시하던 자히드라의 눈이 레베카를 향했다.

레베카는 이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펜을 들었다.

“제게는 공작님만큼의 재산도 직위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 알량한 목숨을 걸죠.”

“레베카!”

율리안이 불에 던져진 콩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무얼 하든지 지지하는 그였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자히드라 같은 사람에게 목숨을 걸겠다니.

레베카는 눈을 부릅뜬 율리안을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걸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제 모든 것을 드린 충성의 증표로 받아주시겠습니까?”

이번에 자히드라는 웃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쥔 채 자신을 노려보는 율리안과 태연자약한 레베카를 번갈아 보았다.

‘율리안의 약점은 오히려…… 이쪽인 것 같군.’

썩 괜찮은 제안이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작위와 율리안의 약점을 동시에 잡았다.

자히드라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애브러햄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레베카가 서명을 끝내자 그의 얼굴은 다시 인자한 평소의 성군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둘은 완벽히 몽블랑 클럽의 사람이 되었네. 앞으로 잘해보세.”

자히드라는 멍하니 현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곧이어 떨떠름한 박수가 쏟아졌다.

레베카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피우며 말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이런, 벌써 티타임이 다 되었군요. 저희 라본느 살롱이 자랑하는 다과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낭랑한 말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다들 반기는 분위기라 레베카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가렛을 불러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

이윽고 화려한 외양만큼이나 맛있는 디저트들이 줄지어 세팅되었다.

“이건……?”

접시의 유려한 문양을 감상하고 있던 헬렌이 접시 밑에 놓인 종이를 발견하곤 꺼내 들었다.

“청첩장입니다. 여러분께 가장 먼저 드리게 되었군요.”

레베카의 고아한 목소리에 즐겁게 케이크를 떠먹던 사람들이 얼른 제 접시 밑의 청첩장을 확인했다.

레베카는 율리안을 슬쩍 바라봤다. 어쩐지 그는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결혼을 하시는군요! 늦었지만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르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살바도르가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해맑은 웃음에 레베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녀는 살바도르처럼 순진한 자가 어째서 이런 음침한 클럽에 들어왔는지 궁금해졌다.

“부디 결혼식 날에 아무런 잡음이 없도록 그때까진 저희의 비밀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합니다. 이제 두 분은 저희와 같은 몽블랑 클럽 회원이 아니십니까. 비밀 엄수야말로 우리 클럽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첼스턴이 포크를 휘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이 클럽에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너도나도 레베카와 율리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레베카는 뚱하게 있는 율리안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그를 흘깃거렸다.

* * *

“오늘은 일이 정말 잘 풀렸어. 다 당신이 노력해준 덕분이야.”

오벨리아 저택이 보이는 언덕을 오르며 레베카가 율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율리안은 대꾸 없이 여전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살롱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그는 레베카의 말에 한마디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잠시 같이 걷자는 레베카의 말은 순순히 따랐다.

레베카는 대체 저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길이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처럼 삐져 있는 그에게 내줄 인내심이 슬슬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저만치 먼저 걸어가는 율리안을 따라가 신경질을 내며 돌려세웠다.

“평생 나와 말을 안 할 셈이야?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알려줘야 사과를 하든 고치든지 하지.”

똑같이 침묵을 지키려던 율리안은 레베카의 잔뜩 치켜 올라간 눈매를 보고는 움찔거렸다.

앙칼진 얼굴이 꼭 심통을 부리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그의 화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율리안은 자그맣게 볼을 부풀렸다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자히드라에게 목숨을 바쳤잖아.”

“뭐?”

레베카는 얼이 빠진 얼굴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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