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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97화 (97/232)

97.

율리안은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자히드라 같은 작자를 위해 목숨을 버릴 작정이었어? 당신은 목숨이 그렇게 하찮아?”

“내 목숨이야. 내 걸 내 마음대로 한다는 데 당신이 무슨 참견이야. 그리고 그 한마디로 황제의 마음에 들었으면 된 거지. 게다가 당장 황제가 날 죽일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거면 됐다고? 당신,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나? 이제 당신 목숨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당신이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 생각은 안 해?”

그 장면을 상상이라도 한 듯 율리안은 절망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슬픔이 묻어나는 그의 눈동자에 레베카의 가슴이 일렁였다.

그러나 레베카는 고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난 원래 이기적이야. 이런 사람이라고! 당신 멋대로 만든 틀에 나를 가두지 마. 그리고 저번에 말했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거라고. 그러니 이것도 마찬가지야.”

“죽어버리면 복수 따위 아무 의미도 없어.”

“아니. 적어도 내겐 의미가 있어!”

소리를 빽하고 내지른 레베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입이 고집스럽게 닫혔다.

또다시 그녀는 율리안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도망쳤다.

자신은 솔직할 준비가 되었는데 레베카는 숨기 바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을 하는 것만 같아 율리안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레베카의 침묵이 길어지자 율리안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돌을 발로 찼다.

그의 세찬 발길질에 흙먼지가 일었다.

문득 들판에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르익은 광활한 억새밭을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낭창하게 흔들리는 억새를 따라 레베카의 마음도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

율리안의 말이 잔잔하던 그녀의 마음에 돌을 집어 던졌다.

그가 일으킨 작은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점점 커져 갔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잃을 게 없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무모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가족들과 칸나, 크로아, 라본느 살롱의 사람들, 그리고 분을 삼키지 못한 채 억새를 쥐어뜯고 있는 율리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느새 가진 것이 많아져 버렸다.

“레베카……?”

새하얗게 질린 율리안이 그녀의 뿌연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당신 지금 우는 거야?”

율리안은 손에 쥐고 있던 억새 뭉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급하게 레베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레베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당황하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라…… 나 왜 울지? 나 우는 거 아니야. 누,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

말과 다르게 레베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율리안의 눈에 진한 후회가 떠올랐다.

자신이 레베카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턱이 덜덜 떨려왔다.

“내, 내가 소리 질러서 그래? 미안해. 레베카. 당신이 목숨을 걸었다니까…… 아니다. 내가 그냥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울지 마. 제발.”

레베카가 눈물에 질식당할 것 같아 율리안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울음은 그의 어머니가 죽기 직전 터뜨렸던 울음과 닮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끔찍한 삶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눈물짓는 법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처음으로 율리안을 껴안고 울었던 날이 있었다.

자신의 끝을 예감했던 걸까. 그녀의 눈물에는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널 두고…… 널 두고 내가 결국…….’

그렇게 한참을 울던 어머니는 생명 불이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율리안. 너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마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

어머니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어린 율리안은 잠자코 지켜봤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많은 추억을 쌓았던 모자 관계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부재에도 그의 일상은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 품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 감촉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뼈가 앙상하게 만져지는 어머니의 시신을 안은 채 율리안은 불 꺼진 방에 오도카니 있었다.

율리안은 으스러지듯 레베카를 껴안았다.

어머니의 눈물엔 삶에 대한 미련이 담겨 있었다.

지금 레베카의 눈물도 그와 같았다.

율리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언젠가 그녀도 어머니처럼 죽어버릴 것 같다고.

“죽지 마…… 죽지 마. 레베카…….”

덜덜 떨리는 율리안의 어깨를 바라보던 레베카는 눈을 그냥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율리안, 나는 죽어야 해. 널 위해서 죽어야만 해.’

요하네스 공작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요하네스의 피가 흐르지 않는 자의 완전한 희생.

크로아의 몸에는 미약하게나마 요하네스가의 피가 흐른다고 했다.

그래서 이전 생의 그는 율리안의 저주를 풀지 못했다.

돈만 준다면 제 목숨을 내던질 사람이 수두룩하겠지만 ‘완전한’이란 단어가 걸렸다.

크로아의 설명에 따르면 순수한 마음으로 요하네스 공작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악취미라 생각했지만 별수 없었다. 원래 신이 하는 일은 다 그 모양이었으니.

한낱 인간은 신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율리안의 품 안에서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레베카는 복수를 끝내고 나면 삶에 미련 따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준 율리안을 위해 기꺼이 남은 생을 바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니 자신만큼 그의 저주를 풀기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레베카는 자신했다.

“율리안…….”

하지만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그의 온기가 레베카의 발목을 잡았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를 바라본 레베카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율리안의 눈이 젖어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비가 내린 밀밭 같았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보던 레베카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바위처럼 단단하던 사내가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울음에 이렇게까지 동요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원인 모를 그의 슬픔이 레베카를 움직였다.

‘내가 감히…… 너를 사랑해도 될까.’

레베카는 가만히 율리안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율리안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레베카의 손에 제 얼굴을 비볐다.

손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음껏 사랑하다 죽으면 되지 않을까.

제가 밀어내니 율리안이 오히려 이렇게 안달이 난 걸지도 몰랐다.

불타오르듯 사랑을 나누고, 그가 자신을 질려 하면 그때 떠나는 게 더 쉬울지 몰랐다.

견고하게 닫혀 있던 레베카의 문이 몇 방울의 눈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레베카, 당신의 목숨은 하찮지 않아.”

율리안이 레베카의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그의 한마디에 레베카는 이제 자신이 율리안을 거절할 수 없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낮이 끝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구름이 무거워지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썰물과 밀물이 공존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는 건 이미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를 사랑한다는 건 자신이 부정한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다.

조금씩 젖어 들던 감정은 어느새 깊고 깊은 바다가 되어 레베카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결국 질식해 죽을 걸 알면서도 헤엄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의 손안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뛰려고 하는 그의 심장을 더 이상 괴롭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레베카는 손을 뻗었다.

율리안이 기꺼이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절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의 아름다운 입술을 훑었다.

그가 자신을 위로했던, 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처럼 레베카는 그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게 자신을 파멸시킬 거란 걸 알면서도 레베카는 율리안의 안으로 들어갔다.

신이 금지한 열매를 탐했던 어느 어리석은 여자처럼 레베카는 그를 집어삼켰다.

율리안이 레베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그렇게 레베카의 흐름에 제 몸을 맡겼다.

레베카를 따라 흐르던 그의 몸은 곧이어 억새밭 사이로 풀썩 쓰러졌다.

뻣뻣한 억새 줄기 위에 누워 레베카는 낮과 밤의 경계선에 서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높은 하늘 아래서 율리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을 레베카는 가만히 눈 안에 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자신이 꿈꾸던, 매일 밤 상상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덧없는 꿈처럼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키스를…… 내게 키스해. 율리안.”

율리안은 레베카의 말에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열감이 가득한 입술을 그녀에게 가져다댔다.

그는 레베카의 도톰한 이마와 작은 도토리 같은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따라 목덜미로,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흰 골짜기에 입을 대었다.

“아…….”

레베카가 얕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 희열이 존재한다는 건 많이 전해 듣기는 했다.

하지만 제 생에는 경험할 리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 환희에 찬 자신의 얼굴이 비쳐들었다.

아직 넘지 말아야 할 선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황홀한 전희에 레베카의 허리가 꺾여 들었다.

* * *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크로아는 하품을 크게 하며 오밤중에 팔굽혀 펴기를 하는 율리안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백만은 무슨……. 이제 겨우 백 개 하셨습니다. 공작님.”

크로아의 말에 율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터는 율리안을 보고 크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제 트집에 그가 또 어떤 불호령을 내릴까 싶었지만 율리안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잠시 착각했나 보군. 준비 운동은 끝냈으니 이번에는 검술을 단련해 볼까.”

연무장 바닥에 놓여 있던 목검을 들던 율리안이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달이 참 밝군.”

율리안의 말에 크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밝은 달은커녕 별빛조차 보이지 않은 흐린 밤이었다.

그 탓에 연무장을 밝히느라 마석을 세 개나 써야 했다.

율리안은 한술 더 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나? 이 서늘한 밤공기며, 풀벌레 소리하며. 아직 좀 더 살 만한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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