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28화 (128/232)

128.

율리안은 적대적인 타니샤의 태도가 익숙하듯 어깨를 들썩였다.

“됐어. 크로아. 곤란해 보여서 도와준 건데 방해가 됐나 보군. 목표한 광산을 얻었으니 기뻐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나?”

“공작님의 예상처럼 저는 전혀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론 좋을지 모르지만 이건 제 일이라고요. 전 파블로 자작을 손봐달라고 했지, 제 일에 참견해달라고 부탁드린 건 아닙니다.”

율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크로아는 중간에 껴서 갈팡질팡했다.

율리안의 편을 들자니 타니샤가 걸리고. 그렇다고 타니샤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평소처럼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크로아는 싸우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크로아의 예상과 달리 율리안은 부르르 떠는 타니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과가 좋으면 문제가 없다 생각했기에 그는 타니샤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레베카의 말이 떠올랐다.

‘율리안. 정 모르겠으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네가 한 말을 제플린이 했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그의 고용인이라 생각해.’

제플린이 뭐라 지껄이든 자신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으니 너무할 정도로 극단적인 비유였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율리안은 찬찬히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어봤다.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플린이 와서 제 공인 것마냥 가로채 간다?

거기다가 결과가 좋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지껄이기까지 했다면?

‘이거 상당히 기분이 더럽군.’

율리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름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네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어. 사과하지.”

그의 정중한 사과에 크로아는 물론이고 타니샤까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방금 들은 말을 찬찬히 되새김질하며 타니샤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쏘아붙일 말들을 총알 장전하듯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깔끔한 사과에 타니샤는 순간 멍해졌다.

사실 타니샤도 자신의 태도가 하극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 같았으면 벌써 매질을 당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싫었다.

율리안은 자신이 소리를 칠 때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짖어대는 걸 보듯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가뜩이나 작은 키 때문에 한참이나 그를 올려 봐야 하는데 그 위에서 자신을 비웃듯 바라보니 타니샤는 열이 뻗쳤다.

코웃음을 치며 자신을 봐준다는 식으로 구는 그의 태도는 타니샤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때문에 타니샤는 오기가 생겨 그에게 더 바락바락 대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타니샤를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진정 어린 사과에 타니샤는 얼른 제 태도를 고쳤다.

“아, 아닙니다. 저도 순간 욱해서……. 불충했습니다. 공작님의 말씀대로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괜찮습니다. 조금 비싼 값을 주기는 했지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널 위한 게 아니야. 레베카가 원하던 일이니 내 모든 재산을 걸어서라도 쟁취해야지.”

레베카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율리안의 미소가 한결 더 자연스러워졌다.

타니샤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율리안이 사과를 하게 된 것과 레베카는 큰 상관관계가 있는 듯했다.

“공작님. 그럼 이제 파블로 자작을 혼내주러 가볼까요?”

타니샤와 율리안 사이에서 눈을 데구르르 굴리고 있던 크로아는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깨질까 싶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율리안의 어깨 너머를 슬쩍 바라보던 타니샤가 픽하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녀가 문 뒤를 고갯짓하자 율리안이 등을 돌렸다.

파블로 자작이 문 뒤에 숨어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

* * *

“그래서 자네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달라?”

율리안은 심드렁하게 커피잔을 들었다.

파블로는 손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호, 혹시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어딘가에 있는 사냥개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블로는 사방을 살폈다.

율리안이 변장하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사업 이야기를 하는 사이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율리안은 그런 그의 생각을 안다는 듯 냉소를 머금었다.

“내게 손을 내밀면서 데본셔 백작은 무섭나 보군 그래.”

“당연하지 않습니까! 데본셔 백작은 악마입니다. 저는 그래도 운이 좋아 볼모로 잡힌 식구가 없어 망정이지…….”

“그래서 자네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파블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대로 그의 샛노란 눈동자는 야수의 눈빛을 품고 있었다.

파블로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예리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더듬더듬 말했다.

“간자가…… 되겠습니다.”

“간자라? 실리에 따라 주인을 순식간에 갈아치우는 당신의 뭘 믿고 간자로 쓰라는 말이지?”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율리안의 미간에 주름이 접혔다.

“이걸 어쩌나. 말은 고맙지만, 자네가 가진 것 중에 내가 탐낼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다, 담보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제가 공작님께 드릴 것은 단 하나입니다.”

“뭔데?”

“제플린 데본셔 백작입니다.”

“내가 그 추악한 자를 왜 원한다고 생각하지?”

덜덜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파블로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 공작님이 아니라 레베카 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얼마나 떨고 있는지 그의 손에 든 커피잔이 요동치고 있었다.

커피가 곧 쏟아질 것처럼 출렁거리며 몇 방울은 그의 셔츠에 튀기까지 했다.

율리안의 시선이 파블로의 셔츠를 적시는 검은색 얼룩을 지나 그의 얼굴로 향했다.

파블로의 작은 담과 다르게 그의 혓바닥은 멈출 줄 모르고 움직였다.

“소, 솔직히 말하자면 데본셔 백작에게 아무런 복수심을 가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합니다. 그분께서 심한 고초를 당한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리고 아직도 레베카 님을 향한 백작의 집착은 여전하지요. 저는 요, 요즘 데본셔가에 닥친 불운들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의견이군.”

파블로는 슬쩍 율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까보다는 한층 너그러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눈빛은 무서웠다.

파블로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저런 요하네스 공작이 여자에 미쳤으니 데본셔 백작이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파블로는 결혼식에 초대받지는 못했으나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요하네스 공작이 레베카에게 단단히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전제지만 상대가 그 ‘레베카’였다.

제플린 데본셔를 미치게 만든 장본인이니 어린 요하네스 공작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었으리라.

그가 알던 레베카는 복수 따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살다가 쥐가 무엇으로 변했을 줄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지금 그녀는 율리안 요하네스라는 호랑이의 등에 타기까지 했다.

결과는 뻔했다.

침몰하는 배를 지키고 있을 만큼의 의리는 파블로에겐 없었다.

“저는 일개 가신이라 내밀한 정보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데본셔가의 사업에는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어렵겠지만 가신들을 공작님 편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가신들?”

율리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최근 레베카가 계속해서 바쁜 것도 살롱 사업 때문이었다.

애초에 살롱을 연 목적은 데본셔가의 가신들을 빼내 오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니 파블로가 일을 제대로만 해준다면 살롱 사업에 레베카가 크게 관여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된다면야 레베카와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늘어나겠군.’

신혼여행 때처럼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날이 찾아올지 몰랐다.

평화로웠던 그때를 떠올리자 율리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파블로는 그의 미소가 긍정적인 표시라 받아들였다.

그의 손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율리안이 콧수염 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곧 사람을 보내 연락하도록 하지. 다만 그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게나. 괜히 일을 벌였다간 자네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을 거야.”

다소 험악한 어투에 파블로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더듬거렸다.

“다, 당연하지요. 쥐 죽은 듯이 있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봅세.”

“자, 잠시만요!”

파블로는 황급히 손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율리안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또 뭐지?”

“제가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파블로는 멀리서 종종걸음을 치는 자신의 하인에게 급히 손짓을 했다.

짙은 고동색의 나무상자를 손에 든 하인이 파블로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왔다.

그가 율리안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 보십시오.”

율리안은 말없이 상자의 금빛 걸쇠를 풀었다.

상자를 열자 화려한 은색 총이 나왔다.

“아까 경매장에서 눈여겨보시기에 한번 사봤습니다. 연금술사들이 만든 총인데 크기를 마음대로 줄였다가 다시 커지게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휴대용으로 아주 딱인 신기한 물건입니다. 연금술에 관심이 많으신 공작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율리안은 파블로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총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무심한 그의 눈길에 파블로는 혹시 잘못 산 게 아닌가 싶어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럼 당장 다른 걸로다가…….”

철컥-

율리안이 순식간에 장전을 하고는 파블로에게 총을 겨눴다.

살벌하게 반짝이는 은빛의 총구와 마주하자 파블로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히익……!”

율리안의 입꼬리가 씨익 호선을 그렸다.

“아니. 아주 마음에 들어.”

* * *

마차에서 내린 레베카는 곧바로 공작 성으로 달려갔다.

벨마가 서둘러 나와 레베카를 맞았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다가 아침과 다르게 엉망진창이 된 레베카의 몰골을 보고 기함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하자면 사정이 긴데……. 혹시 율리안은 어딨습니까?”

“거참, 하대를 하시라고 그리 말씀드렸는데도 여전하시군요. 공작님이라면 아마 숲속에 계실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리기로 하지요. 그럼 전 이만.”

레베카는 조금이라도 빨리 율리안을 만나고 싶었다.

그의 따뜻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 불쾌한 기분이 가실 것만 같았다.

서둘러 숲속으로 내달리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보고 벨마는 남몰래 웃었다.

“역시 신혼이 좋긴 좋구나.”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신의 찬란했던 한때를 떠올리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