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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29화 (129/232)

129.

“율리안! 율리안!”

숲속 어귀에서 레베카는 율리안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다.

마침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던 담당 하인이 눈에 들어왔다.

레베카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공작님을 못 보았는가?”

신나게 나뭇가지 끝에 길게 매달린 장난감을 흔들고 있던 하인이 깜짝 놀라 레베카를 바라봤다.

“고, 공작 부인!”

“그래, 수고가 많네. 내 남편이 숲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공작님이시라면 지금쯤…….”

하인은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오늘 해가 쨍쨍하니 이 시간쯤이면 대왕 바위에 계시겠군요.”

“대왕 바위?”

“예. 저쪽 오솔길을 따라가시다 보면 널따란 바위 하나가 나올 겁니다. 아마 거기 계실 겁니다.”

“그래. 고맙네.”

레베카는 서둘러 하인이 가리킨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는 하인의 발치에서 고양이가 날카롭게 울었다.

“아! 죄송합니다. 고양이님. 빨리 흔들겠습니다.”

하인은 다시 자신의 본분대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열정적으로 사냥 본능을 불태우는 고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하인이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지금 공작님께서는…….”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얼핏 서렸으나 이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뭐 어때. 부부인데.”

그의 시선은 다시 장난감을 향해 날아드는 고양이의 분홍색 발바닥을 향했다.

* * *

레오는 길게 하품을 내빼며 바위 위에 누워 있는 율리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커다란 율리안이 발을 뻗고도 남을 바위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 찾던 곳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볕이 좋았다.

그 때문에 숲속의 고양이들이 죄다 이곳으로 모였다.

고양이들은 율리안의 옆에 한 자리씩 차지하곤 늘어지게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레오는 갈색 얼룩무늬의 새끼 고양이와 손장난을 치고 있는 율리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 하나 사라져도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율리안은 새끼 고양이의 애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개박하밭으로 가볼까.’

레오는 처음부터 자신이 고양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의 사자라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신계에서 죄를 지어 추방당한 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원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건 데프리아의 조소어린 한마디뿐이었다.

‘그곳에서 저를 숭배하도록 하세요.’

고양이의 몸속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몸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처럼 생각하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가끔 이러다가 지성까지 사라지지 않을까란 생각에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름대로 즐거울 것 같았다.

진짜 고양이가 된다면 이 끔찍한 저주의 굴레를 고민하지 않아도 됐으니.

그러나 그는 절대 평범한 고양이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겐 식욕이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하네스 공작이 언제나 그에게 신성력을 제공해주었다.

음식의 맛은 느낄 수 있었으나 그는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레오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생선을 탐하지도, 부엌에 들어가 우유병을 쏟지도 않았다.

그가 음식을 먹는 건 호기심이 일었을 때나 음식을 준비한 상대방을 기쁘게 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여느 고양이처럼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개박하였다.

개박하 향을 맡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현 상황을 잊게 되었다.

심란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는 했다.

그래서 레오는 속이 답답할 때, 혹은 심심할 때마다 개박하를 찾고는 했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숲에는 여러 군데에 개박하가 심어져 있었다.

레오는 공작 성의 고양이 중 서열이 가장 높았다. 그가 등장하면 고양이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자신에게 애교를 피우곤 했다.

그 덕에 가장 커다란 개박하 군락은 레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박하를 생각하자 그의 꼬리가 수직으로 저절로 치켜 올라갔다.

레오는 끝이 살짝 말린 꼬리를 천천히 흔들면서 사뿐히 목적지를 향해 발을 뻗었다.

그는 바위가 있는 넓은 들판을 빠져나와 풀숲에 들어섰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레오가 코를 쳐들고 킁킁거렸다.

‘이건…… 레베카?’

레베카에게선 달콤한 바닐라 향이 났다. 개박하의 청쾌한 향기도 조금 섞인 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레오는 처음부터 그녀가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솔길에서 레베카가 불쑥 튀어나왔다.

“레오!”

레오는 얼른 레베카에게 달려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비볐다.

레베카는 쪼그려 앉아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혹시 율리안 어딨는지 알아? 이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레오는 기쁜 마음으로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려다가 불현듯 바위에 누워 있는 율리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레오는 다급하게 울면서 율리안이 있던 곳과 반대 방향으로 레베카를 이끌었다.

그때 고양이들이 일제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고양이들은 그의 음색을 따라 부르곤 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율리안이 저기 있어?”

레베카는 율리안이 있는 들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레오가 필사적으로 레베카의 드레스를 물고 들판과 다른 방향으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미 고양이의 합창에 홀린 듯 들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난…… 최선을 다했다.’

결국 레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레베카를 놓아주었다.

그는 곧이어 떠오를 율리안의 절망적인 심정을 예상하곤 한숨을 쉬었다.

아마 자기가 느끼기 싫어도 알아서 그의 고통이 전해져 올 것이다.

그러려면 좋은 곳에 가 있는 게 나았다.

레오는 서둘러 개박하 군락으로 바삐 움직였다.

“율리…….”

레베카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너른 들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바위 위에 누워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는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모습을 마주하곤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율리안은 홀딱 벗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으나 그의 큰 몸집을 전부 다 가려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레베카는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몸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태운 탄탄한 그의 몸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레베카의 눈길이 조각같이 옹골차게 들어찬 그의 근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나체로 고양이들 사이에 누워 있는 율리안은 신이 만들고 난 뒤 심히 아름답다고 감탄했다던 태초의 사내 같았다.

레베카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팔베개를 하고 있던 율리안이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레베카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와악!”

레베카를 발견한 율리안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탓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던 그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났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레베카는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크…… 크다.’

“뭐하는 거야! 왜 빤히 보고 있어!”

율리안은 새빨개진 얼굴로 얼른 엎드려 고양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거의 울먹이는 듯한 율리안의 고함에 레베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이제 가린다고 뭐가 달라져?”

성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레베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러게 누가 거기서 다 벗고 있으래?”

“갑자기 들어온 건 당신이잖아!”

율리안은 서둘러 바위 아래 곱게 개어두었던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황급히 바지춤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퍽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레베카의 입매가 자꾸만 샐쭉샐쭉 올라갔다.

“됐어. 이제 눈 떠도 돼.”

그의 말에 레베카가 슬며시 눈을 떴다.

대충 셔츠를 걸쳐 입고서 눈살을 잔뜩 찌푸린 율리안이 보였다.

율리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당신 은근히 밝혀.”

“내, 내가 뭘 밝혔다고 그래.”

“날 훑어보는 게 예사롭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 당신 일부러 쳐다봤지?”

“아니야! 내가 무슨 변태인 줄 알아?”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한 걸?”

“억울할 건 또 뭐야.”

“나도 공평하게 해야지.”

“뭐?”

율리안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레베카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고양이들이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 잠시만!”

“내게 잠시라는 건 없어.”

레베카는 두 손을 들어 율리안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그는 오히려 레베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얼굴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그의 얼굴이 레베카의 위로 기울어졌다.

그에게선 햇볕에 잘 말린 뽀송한 이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쪽-

볼에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라 그의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레베카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율리안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얼굴을 맞댔다.

“이걸로 퉁친 걸로 하지.”

레베카는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잔잔한 햇살을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아…….”

전율이 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한 느낌이 훑고 지나갔다.

그의 예쁘게 휘어지는 반달눈과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추던 붉게 물든 젖은 입술.

적당히 태운 구릿빛 품에 안기면 뽀송한 담요에 쌓인 것처럼 따뜻할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자신을 향해 있으니 레베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베카?”

“아, 괜찮아……. 잠시 어지러워서.”

정확히 말하자면 율리안의 얼굴에 홀려서 그랬지만 레베카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율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레베카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괜찮다니까. 이렇게 앉아 있으면 곧 괜찮아질 거야.”

레베카는 바투 다가온 그의 얼굴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몰래 참았던 숨을 빨리 내뱉고는 당장 의사를 데려올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다 버, 벗고선…….”

“아, 그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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