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알리시아는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차는 어느덧 이렌시아를 벗어나 요하네스 공작령의 성문을 지나고 있었다.
‘아서를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알리시아는 레베카에게 아서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아이의 잘생긴 코와 민들레 홀씨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져보게 하고 싶었다.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 아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내다 버린 삶이 사실은 찬란한 것이었다고, 당신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고 확인받고 싶었다.
“흑…….”
창문의 커튼 닫은 알리시아는 적막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서 울음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바람과 달리 알리시아는 결국 레베카가 옳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보아도 요하네스 공작령은 이렌시아보다 월등히 부유해 보였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이토록 절망감에 휩싸인 건 레베카가 자신보다 잘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백작저에서 알리시아의 입지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옥타비오는 제 아들인 것마냥 아서를 싸고돌았다.
알리시아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아서에게 손조차 대지 못하게 했다.
기억이 돌아온 제플린은 옛날보다 더 쌀쌀맞은 사람으로 돌변했다.
오히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녀장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레베카의 말대로 데본셔는 시궁창일까.
하지만 이내 알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래도 제 고향보다는 여기가 훨씬 나았다.
“거울을 줘.”
알리시아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캐서린이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그녀는 감시역으로 따라온 하녀였다. 알리시아는 이제 어딜 가나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캐서린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방에서 커다란 손거울을 찾아내 건넸다.
알리시아는 그녀를 잠시간 흘겨보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아이를 낳고 나선 피부가 푸석푸석해지고 모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필사적으로 현존하는 미용 용법이란 용법은 다 써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데본셔 백작저에 발이라도 붙이고 있으려면 절대로 추해져서는 안 됐다.
레베카를 닮은 이 금발과 푸른 눈 때문에 제플린이 그나마 자신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자리에서 이따금 자신을 레베카라 부르기도 했다.
비참했지만 기뻤다.
아직은 제플린이 자신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거울 속에서 요리조리 얼굴을 살펴보던 알리시아는 눈동자 색이 옅은 하늘색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머니를 뒤져 안약을 꺼냈다.
눈 안에 몇 방울을 흘러 넣자 눈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괴로웠지만 익숙한 고통이었다.
이제 알리시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이를 앙다무는 것으로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아픔이 점점 가시자 알리시아가 슬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덜컥 겁이 났다.
겁에 질린 채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자 다행히도 불만 가득한 하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알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약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마차가 잠시 멈췄다.
요하네스 공작 성에 도착한 모양이다.
“누구십니까.”
“데본셔 백작가의 알리시아 데본셔 부인이십니다. 공작 부인을 뵈러 왔으니 아뢰주십시오.”
문지기는 마차 안을 슬쩍 보더니 조금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알리시아는 이대로 문전박대라도 당할까 싶어 조마조마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굳건한 대문은 쉽게 열렸다.
마차에서 내린 알리시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양 옆으로 펼쳐진 광활한 숲을 바라보았다.
숲 가운데로 난 흰 자갈길의 끝에는 멀리서 보아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공작 성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 성에 비하면 데본셔 백작가는 별장이나 다름없었다.
알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 순간 사방에서 앙칼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비명 같은 섬뜩한 울음이었다.
알리시아가 흠칫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양옆의 나무와 덤불 사이에서 야생의 눈을 치켜뜬 고양이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 소리까지 더해져 그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이곳에서 나가라는 축객령처럼 들렸다.
알리시아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 때 멀리서 백마가 끄는 마차가 유유히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이 마차로 갈아타셔야 합니다.”
다소 쌀쌀맞은 태도의 하인이 흰색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알리시아는 구세주를 만난 듯 얼른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캐서린도 음산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꼈는지 투덜거리는 것도 잊고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알리시아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마차가 멈춰 섰다.
“내리십시오.”
“여긴 공작 성이 아니지 않는가.”
“마님께서 여기로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불손한 하인의 태도에 알리시아는 눈을 찡그렸지만 별말을 하지 않았다.
공작 성은 고용인들까지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여긴…….”
알리시아는 캐서린과 찰싹 붙은 채로 하인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연무장인지 여기저기서 기합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고함과 함께 땀 냄새가 바람결을 따라 풍겨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리는 연무장을 따라 걸으며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베카가 이런 곳에 있다고?’
탕! 탕! 탕!
그때 느닷없이 총성이 들려왔다.
알리시아가 기겁하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기 계십니다.”
하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알리시아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기다란 금발을 한데 모아 높이 묶은 레베카가 총을 들고 과녁을 겨냥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넋을 잃고서 그녀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승마용 바지를 입고서 그 위에 간단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사격을 배운 지 얼마가 안 된 터라 무척이나 서툰 자세로 총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사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알리시아의 눈에 레베카는 그저 사냥의 여신 같기만 했다.
레베카가 기세 좋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거센 반동에 유니콘의 꼬리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총알이 과녁을 보기 좋게 빗나간 걸 확인한 레베카가 눈을 찌푸렸다.
레베카는 다시 한 발을 더 쏠 기세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마님. 아까 말씀드린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레베카는 총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알리시아를 돌아보았다.
알리시아는 자신을 과녁으로 삼은 것 같은 총구를 마주하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냥터의 토끼처럼 벌벌 떨고 있는 알리시아를 응시하는 레베카의 눈이 첨예하게 번뜩였다.
‘그냥 쏴 버릴까…….’
이전 생에서 알리시아가 제 아이를 제플린에게 바쳤던 사실을 레베카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연습용 총에는 실탄이 들어 있었다.
이대로 알리시아의 머리에 한 방.
그리고 그녀가 타고 온 마차로 데본셔가로 달려가 제플린의 머리에 또 한 방.
그렇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연도 다 끝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자비롭지.’
레베카는 허탈하게 웃으며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장갑을 벗어들며 말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안으로 모시렴.”
* * *
알리시아는 응접실에 앉아 옷을 갈아입으러 간 레베카를 기다렸다.
응접실에 하녀는 동석할 수 없다기에 이 넓고 호화로운 곳에 홀로 있어야만 했다.
그토록 미워했던 캐서린이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간절했다.
알리시아가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방 안에 만발한 가을꽃들을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응접실을 둘러보며 열심히 구경했겠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통유리창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빛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광경에 손톱만큼의 부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시기심이란 건 가질 수 있는 것이라야 생기는 법이었다.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공작 성의 어느 것 하나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그릇은 백작저, 딱 거기까지였다.
똑똑-
다소 거친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알리시아가 작게 대답했다.
“드, 들어오세요.”
하녀가 다과상을 내왔다.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자 긴장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알리시아는 레몬 타르트를 먹으려 무심코 포크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예리한 포크의 끝을 보니 자신을 겨냥하던 총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식욕이 가신 알리시아는 포크를 조용히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자신을 압도하던 레베카의 눈빛이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레베카의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녀가 아는 레베카는 자상함 그 자체였다.
부드러운 미소는 자애로웠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그녀가 본 레베카는 빙하를 깎아 만든 사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공작이 잘해준다고 들었는데 사실 다 거짓말인 거 아니야?’
알고 보면 구박을 받는 건지도 몰랐다.
알리시아는 내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만큼 불행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았다.
“멋대로 찾아왔으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레베카는 목욕까지 하고 나왔는지 비누 냄새를 폴폴 풍기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칸나와 레오가 레베카의 뒤를 이어 등장했다.
“그, 그럼요.”
알리시아는 애써 양 볼에 보조개를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레베카의 무릎 위에 자연스레 착석하는 레오를 흘깃 바라보았다.
요하네스 공작 성에는 신의 사자인 검은 고양이가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특정하지 못하도록 두 마리의 고양이를 더 대동해서 공작은 항상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다녔다.
실상은 레오는 공작 성에 머물고, 평범한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레베카의 무릎 위에서 나른하게 하품을 하는 저 고양이가 레오 님인가 고민하며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아서도 무사히 태어났고요.”
“아서? 아들인가 봅니다.”
“예……. 유감스럽게도…….”
알리시아가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