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알리시아의 침울한 얼굴에 레베카는 과거를 떠올렸다.
이전 생에서도 그녀는 첫 아이로 아들을 낳았다.
첫 아이가 아들이라면 보통 집안에선 경사라고 했을 테지만, 딸을 고대하던 제플린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제플린은 갓 태어난 제 아이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고 근 두 달 동안 레베카만 찾아댔다.
‘딸을 낳아달라고 닦달했었지.’
그가 그토록 딸에 집착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레베카의 머릿속에 제플린의 서재에서 봤던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금발과 푸른 눈의 아름다운 왕족이 그려진 그림.
그 그림 속의 왕과 왕비가 안고 있던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레베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알리시아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백작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어요. 이름도 친히 붙여주셨고요. 어쩌면 후계자로 임명해주실지도 몰라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레베카 님도 아이를 낳으시면 분명…….”
알리시아는 아차하고 서둘러 입을 닫았다.
공작과 결혼한 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이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레베카는 정말 불임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레베카가 은인이라는 생각은 있는지라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파고 싶진 않았다.
‘네 배 속에 있는 작은 비밀을 잘 지켜야지. 네 유일한 재산이잖니.’
게다가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레베카는 제 비밀을 알고 있었다.
후계자 이야기는 하지 말 걸 하고 알리시아는 내심 후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처지를 사실대로 말해서 그녀에게 동정을 받고 싶진 않았다.
알리시아는 애써 행복한 척을 해 보이며 과장된 몸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레베카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알리시아를 공작 성 안으로 들인 건, 지난번 양수가 터진 알리시아의 모습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내렸던 결정이었다.
무슨 말을 지껄이나, 사람이 좀 변했나 하는 약간의 기대가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가엾게 포장하며 의기양양하게 구는 꼴을 보니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를 살펴보고 저녁 훈련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게다가 오늘은 릴리와 그네를 타야 하는 일정까지 있었다.
레베카가 흘깃 시계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할 말이 그것뿐인가요?”
축객령을 내리려는 듯 레베카가 운을 띄웠다.
지금 이 자리가 끔찍하게 불편했지만 알리시아는 금방 떠나고 싶진 않았다.
뭐라도 손에 쥐고 가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늪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제플린은 자신을 버렸고, 마지막 동아줄이라 생각했던 옥타비오는 자신이 아니라 아들을 원했다.
그녀의 삶에서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은 레베카가 유일했다.
그동안 했던 짓이 있기에 차마 조언을 해달라는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레베카와 오래 대화하다 보면 돌파구가 떠오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알리시아는 얼른 제 옆에 놓아둔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감사의 의미에서 선물을 가져왔어요!”
사실은 공작 성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제플린이 레베카에게 건네주라던 선물이었다.
‘답장이라도 받아온다면 당신을 다시 받아줄 의향이 있어.’
커다란 상자를 받아든 알리시아는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제플린의 다시 받아준다는 말은 어떤 제안보다도 달콤했다.
그녀는 선물의 정체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공작 성에 도착했다.
어차피 레베카를 회유할 값비싼 보석 따위일 게 분명했다.
배가 아프긴 했지만 제플린이라면 레베카도 눈을 휘둥그레 뜰 만한 최고급으로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면 레베카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선물의 정체를 확인한 알리시아는 경악에 차서 입을 틀어막았다.
“하!”
레베카는 눈앞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응시했다.
백작저의 가보인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그 위에는 향수를 뿌린 카드가 올려져 있었다.
<당신은 영원한 데본셔의 보석이야.>
지독한 장미향이 코를 찔렀다.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올랐다.
레베카는 순간 총을 들고 다 죽여버릴 걸 하고 후회했다.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고 싶던 레베카의 망설임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복수심을 조롱하듯 다이아몬드에서 푸른 광채가 반짝였다.
제플린과 자신, 둘 중 한 명이 처참한 죽음을 맞기 전까지 이 끔찍한 굴레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레베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금 복수를 다짐한 그녀는 살기 가득한 눈을 들어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저, 저는 정말 선물이 이런 건지 모르고…….”
무척이나 당황하는 알리시아를 보아하니 제플린 혼자 꾸며낸 일인 듯싶었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도 뻔뻔하게 나왔을 그녀가 오늘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아무래도 백작저에서 입지가 좁아진 모양이었다.
“감히…….”
레베카는 손이 새하얘질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 상황을 저주했다.
이 순간 알리시아에게 짤막한 연민을 가진 자신이 싫었고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제플린이란 자식은 더더욱 싫었다.
가장 싫은 건, 아직도 완벽하게 그를 무너뜨릴 힘이 없는 자신이었다.
“꺄악!”
레베카가 버터나이프를 치켜들었다.
알리시아는 칼날의 끝이 자신에게 향하는 줄 알고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녀가 내려친 것은 알리시아의 도자기 같은 얼굴이 아니라 푸른색 다이아몬드였다.
레베카는 자신을 지금껏 옭아매고 있던 자신의 눈동자 색과 같은 다이아몬드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그러나 이깟 힘에 다이아몬드가 깨어질 리가 없었다.
레베카는 휘어진 버터나이프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버터나이프가 자신의 처지 같아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레베카는 절망에 빠져 버터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알리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은 레베카는 자신을 조롱하듯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바라봤다.
저 목걸이에 얽힌 추잡한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아……. 이걸로 하시면 될 겁니다.”
그때 칸나가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그리고 레베카에게 망치를 불쑥 내밀었다.
칸나는 레베카가 상자를 열자마자 내용물을 확인하곤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칸나는 데본셔의 가보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이어질 레베카의 행동이 예상되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야만 했다.
칸나는 빠른 속도로 공작 성을 뒤져 쓸 만한 도구를 겨우 발견했다.
“현존하는 물질 중 경도가 가장 높은 금속으로 만든 망치입니다. 이 정도면 다이아몬드도 깨질 겁니다.”
초점 없이 멍하게 있던 레베카의 눈에 차차 생기가 돌아왔다.
그래. 도구는 바꾸면 그만이다. 다이아몬드를 부술 도구를 찾으면 된다.
“고마워. 칸나.”
비장하게 망치를 받아든 레베카는 고고하게 빛을 뽐내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쾅! 쾅! 쾅!
전설 속의 대장장이 신이 망치로 모루를 내리친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굉음에 가까운 망치 소리가 유려한 응접실 안을 가득 메웠다.
알리시아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녀에게 공격적이던 숲의 고양이들과 총구를 겨누던 레베카.
그리고 매섭게 망치를 내리치는 눈앞의 레베카까지.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며 알리시아는 두 귀를 막고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레베카의 움직임에 따라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흩날렸다가 다시 그녀의 하얀 얼굴을 휘감았다.
레베카의 가느다란 팔과 저 무거운 망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렇게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악마와 같은 표정으로 망치를 내리치는 건 알리시아의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장면은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렸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광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반쪽으로 쪼개졌다.
“하아……. 하아…….”
레베카는 숨을 몰아쉬며 부서진 테이블 사이로 산산조각이 난 다이아몬드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레베카가 땀을 훔치는 사이, 칸나가 조각난 다이아몬드를 한 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목걸이를 목걸이 함 안에 넣었다.
레베카가 망치를 집어던지자 망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이게 내 답례품이야.”
여전히 소파에 얼굴을 묻고 덜덜 떨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칸나가 상자를 내밀며 속닥였다.
“반드시 백작에게 전해야 할 겁니다. 목걸이 꼴이 나기 싫으면요.”
알리시아는 불안정한 호흡을 내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알리시아가 떠난 걸 확인한 레베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레베카 님……. 파, 팔이…….”
칸나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망치를 들었던 레베카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오른팔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한 번에 쓴 혹독한 대가였다.
경련하는 레베카의 팔을 붙들고 칸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걱정만 하고 있는 건 아무런 해결책이 못 되었다.
칸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한마디 말도 내뱉을 힘이 없는지 레베카는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편, 소파 위에 앉아 사건을 관망하고 있던 레오는 충격받은 얼굴로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째서 저 여자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거지?’
레오가 레베카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온 건 그저 내켜서가 아니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해줘.’
레오는 참 귀찮은 부탁이라 생각했지만 율리안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귀찮은 마음도 싹 가셨다.
저 인간 꼬맹이가 누군가에게 열중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대상인 레베카가 슬그머니 궁금해졌다.
때마침 심심하던 찰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리시아라는 여자를 바라보는 순간 제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푸른 다이아몬드를 마주했을 때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화가 났다.
슬픔이 묻어 있는, 이토록 깊은 분노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의 것이었다.
마치 율리안과 연결되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 레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