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레베카 님!”
간단한 식사를 다 끝내고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을 무렵 방문이 벌컥 열렸다.
칸나가 쏜살같이 레베카에게 뛰어왔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미안해, 칸나. 이젠 괜찮아. 아주 힘이 넘치는걸!”
레베카는 애써 밝은 웃음으로 팔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칸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래 보이시는군요! 식사는 하셨어요?”
“너도 그 소리니……? 아까 율리안이 줘서 먹었어.”
“잘하셨습니다. 공작님. 레베카 님께선 항상 배가 부르셔야 하지요.”
칸나의 진심 어린 칭찬에 율리안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네가 웬일로 내 칭찬을……?”
하지만 그게 다였다. 칸나는 율리안의 말을 곧장 무시하곤 레베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 뭔데?”
“감옥 섬의 인질을 모두 구출했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요!”
* * *
예고 없는 화산 분출에 크라운 리조트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박에 매여 있던 모든 배가 사람들을 싣는 데 동원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승선하기 위해 호화 크루즈선에 있던 값비싼 조각상이며 피아노며 할 것 없이 바다에 내던져졌다.
“곧 있으면 화산재가 쏟아질 겁니다! 다들 입과 코를 막으십시오!”
손님이고 직원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밀림 너머의 세상도 다를 바 없었다.
“비켜! 여긴 내 자리야!”
“이 상황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하다못해 우리 아들만이라도!”
몇 안 되는 순찰용 배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다.
테디가 제 발에 달라붙는 루시아를 쳐냈다.
그러고선 허공에 총을 탕-하고 쐈다.
“어차피 너희들은 죽은 목숨이잖아! 뒈질 운명을 여기서 미리 당기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용납할 수 없겠는데요.”
버틀리와 그림자 기사단이 수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경비병들을 포위했다.
버틀리가 테디에게 칼을 겨누었다. 예리한 칼끝을 바라보던 테디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지금부터 여긴 저희가 지휘하겠습니다. 우선 노약자들부터 배에 태우시죠.”
“하! 그깟 칼쪼가리 가지고 어쩌려고. 이쪽에는 총이 있다고.”
테디가 거들먹거리며 그의 머리통을 향해 총을 들었다.
“그건 저희 쪽에도 있습니다만?”
버틀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 기사들이 일제히 총을 겨눴다.
누가 봐도 일당백은 할 것 같은 제대로 훈련받은 기사들이었다.
테디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뒤에 서 있던 경비병에게 속삭였다.
“야! 빛의 장미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보낸 애들은 다 어디 갔어?”
“지진이 나자마자 도망간 지 오랩니다!”
“뭐야? 이 빌어먹을…….”
버틀리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좋은 말로 할 때 투항하지?”
“이익……!”
그림자 기사단은 손쉽게 테디 일행을 제압했다. 그들은 포박당한 채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버틀리는 그들은 사뿐하게 외면하고는 인질들을 모두 배에 태웠다.
샬럿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버틀리에게 물었다.
“기사님들도 같이 가요. 나눠서 타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저희까지 타면 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저희는 훈련받은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콰앙-!
그때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화산 분출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종말이 찾아온 것처럼 세상이 희뿌옇게 변했다.
버틀리가 소매로 입과 코를 막고서 발로 배를 거칠게 밀었다.
“먼저 가십시오!”
“안 돼요! 버틀리! 버틀리!”
버틀리가 그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다 죽었어…….”
테디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기쁘게 죽을 수 있겠군.”
버틀리가 희미하게 웃으며 덮쳐올 재앙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머지 기사들도 성호를 그으며 폭풍처럼 쏟아져 다가오는 화산재를 응시했다.
그들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죽음은 다가오지 않았다.
버틀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곧 인간들이 당신들을 구하러 올 겁니다.”
이노텐이 화산재를 막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이 쏟아져 내리는 분출물을 가두었다.
“이, 이, 이노텐……?”
테디는 거의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반사된 빛이 그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빛줄기와 함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황실 해군입니다! 생존자가 계시다면 신호를 보내주십시오!”
“여기예요! 여기입니다!”
순찰용 배에 타고 있던 인질들이 화산재가 입과 코에 들어오는지도 모른 채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손거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암초 사이로 거대한 함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함선엔 로티카나 황실의 인장이 위엄 있게 새겨져 있었다.
* * *
“제플린 데본셔. 당장 나와!”
알리시아는 문을 빼꼼히 열고서 성난 사냥개들이 서재로 쳐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인질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에 사냥개들의 이빨이 주인을 향했다.
곧 감옥 섬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황실 기사단이 그를 잡으러 들이닥치기까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안 돼! 문은 부수지 마!”
서재를 부수려고 조각상을 치켜든 로드리고를 그레이스가 기겁하며 말렸다.
“뭐야? 하녀장, 당신도 죽고 싶지 않으면…….”
“무슨 소리야. 저택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열어주지.”
그레이스는 황급히 열쇠 꾸러미를 뒤적거리더니 곧 서재의 문을 열었다.
단단히 잠겨 있던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로드리고가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알아챈 그레이스가 퉁명하게 대꾸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데본셔 백작이 아니었어? 그를 내줄 테니 이 이상 저택을 훼손하지 마.”
“그레이스 하녀장. 당신도 참 제정신은 아니군.”
“하! 이곳에 제정신인 사람이 있기나 해? 로드리고 너도 미친 건 마찬가지야.”
“이…….”
로드리고가 씩씩거리자 다른 사냥개가 그를 만류했다.
“이런 데 힘 빼지 마. 데본셔 백작을 잡아야지.”
“그렇지.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제플린 이 자식, 당장 나와!”
성난 사냥개들이 호기롭게 서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하지만 서재는 텅 비어 있었다. 정갈한 자태는 그대로였다.
발코니의 문까지 열어보고 혹시나 매달려 있나 싶어 난간 아래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데본셔 저택의 주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제기랄! 벌써 튄 건가?”
“제플린이 용의주도한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잖아. 이래서 레베카 님이 지시하시기 전에 먼저 잡아둬야 한다고 했잖아!”
사냥개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화풀이하듯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제플린이 평생을 모아온 컬렉션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찢겼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몸서리치며 바라보았다. 저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향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녀도 썩 좋은 주인은 아니었기에 알리시아는 서둘러 짐을 챙겨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에는 베이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가시죠.”
마차 안에는 아서가 곤히 자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제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던 순간과 똑같이 데본셔 백작가는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미련이 잔뜩 남은 미소가 알리시아의 입가에 번졌다.
“갈 길이 멉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베이츠. 당신도 귀족이죠?”
“준남작도 귀족이라 쳐준다면 그렇습니다.”
“준남작…….”
알리시아는 조용히 준남작을 읊조렸다. 알리시아 롬바디 준남작 부인.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뚱한 알리시아의 표정에 베이츠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덕분에 편한 것 같아요. 그렇지. 우리가 지낼 저택 이야기를 해줘요.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고요?”
저택이라는 말에 베이츠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네. 미적 감각이 없는 제 눈에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원하신다면 정원에 꽃을 심어서 꾸미면 볼만할 겁니다.”
“그…… 꽃을 제가 직접 심어야 할까요?”
“예?”
“제 처지에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조금 염치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 생활은 어떻게 하나요? 무슨 돈으로 먹고살죠? 가지고 계신 영지가 있나요? 제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하나요? 아서는 귀족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에 보내고 싶거든요.”
속사포로 쏟아지는 알리시아의 질문에도 베이츠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모아둔 돈이 꽤 됩니다. 영지는 없지만 당신 손에 흙을 묻힐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서에게도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줄 겁니다.”
“그럼 모아둔 돈은 얼마나…… 아니에요.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절 구해주신 분께 너무 무례했군요.”
“괜찮습니다. 궁금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알리시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베이츠를 훑어봤다.
솔기가 터진 바지에 셔츠의 소매는 다 해져 있었다. 언뜻 봐도 허름한 그의 옷차림에 알리시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알리시아는 드디어 결정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저…… 혹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베이츠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데본셔 백작가로 돌아가잔 말씀이십니까?”
“완전히 돌아가자는 게 아니고, 놓고 온 게 있어서요.”
그에 베이츠가 얼굴을 풀었다.
“그런 거라면 도착한 다음에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안 돼요!”
“예?”
알리시아가 눈을 피하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베이츠의 예리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무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필요한 거라서요.”
“다른 데선 살 수 없는 겁니까?”
“네……, 여성용품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베이츠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그가 접해 본 여자는 데본셔 저택의 고용인들이 전부였다. 그마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베이츠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 멀리 오지 않았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베이츠.”
알리시아가 살포시 웃자 베이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