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어느새 해가 져버리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데본셔 백작저에 도착한 알리시아는 갖은 핑계를 대며 홀로 뒷문으로 들어섰다.
‘지금쯤이면 아무도 없겠지?’
다행히 그녀의 예상대로 사냥개들은 모두 저택을 떠난 후였다.
고용인들은 값비싼 물품을 챙겨 달아났다. 고용인이 묶는 별채에 불이 하나만 켜져 있는 걸로 보아 그레이스는 남은 모양이었다.
자신을 위협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알리시아는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얼른 가지고 나오면 괜찮을 거야.’
알리시아는 서둘러 제 방이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 뒤편에 붙여 두었던 서류 하나를 얼른 떼어냈다.
“이걸 까먹다니…….”
아서를 데본셔가의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서류였다.
데본셔가가 몰락했다고 해도 유산으로 땅 몇 평 정도는 물려받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 제플린이 작위를 유지한다면 장차 아서는 데본셔 백작이 될 것이었다.
“준남작이라니. 말도 안 돼. 내 아들은 백작이 어울려.”
얼굴에 만연한 기쁨을 띠며 알리시아는 서류를 소중하게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부인. 여기 있었군.”
“꺄악!”
흐릿한 시야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플린이 거울에 비쳐들었다. 반쯤 동공이 풀린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냥개를 피하느라 그간 굶기라도 한 건지 여윈 얼굴에 퀭한 눈두덩이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먹을 것 좀 내와. 알리시아.”
그는 비척거리다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꼴을 보니 알리시아는 그가 자신이 반한 그 제플린 데본셔와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알리시아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이내 턱을 치켜들었다.
“싫어요.”
“뭐?”
“이제 전 당신의 아내가 되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 이혼해요.”
“이혼……?”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제플린의 눈에 분기가 서렸다.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이혼? 하! 받아달라고 내 발아래서 기어 다닐 때는 언제고 이혼이라고?”
“그, 그래요! 이혼해요. 우리! 이제 당신과 더는 못 살겠어.”
“레베카의 자리에 앉혀주니까 네가 진짜 레베카라도 된 것 같아? 애초에 난 널 부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어. 그런데 무슨 이혼?”
“버, 법적으로는…….”
알리시아는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쳤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몸짓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넌 아직 내 소유야. 절대 못 도망쳐!”
“아악!”
제플린이 득달같이 달려가 알리시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서 제 얼굴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잔뜩 충혈된 푸른 눈이 꼭 불바다 같았다.
“날 똑바로 봐, 알리시아. 네가 정말 이 제플린 데본셔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너 같은 팔푼이가?”
“이, 이거 놔요!”
알리시아는 열심히 반항했지만 그가 잡은 팔이 더 아파 올 뿐이었다.
“그 손 놓으십시오!”
베이츠의 우렁찬 외침이 저택을 가로질렀다.
“베, 베이츠? 아서는 어쩌고…….”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백작님.”
베이츠가 칼을 빼 들고서 성큼성큼 제플린에게 다가왔다.
제플린은 알리시아와 베이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잠시 상황 파악을 하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하찮은 버러지 같은 네 연놈들이 붙어먹은 거였어. 설마 요하네스 공작의 서신을 조작한 게 베이츠 네 짓이냐?”
“그 손부터 놓으십시오.”
베이츠는 바들바들 떨리는 알리시아의 여린 손목에 눈을 붙박인 채 으르렁거렸다.
제플린의 입꼬리가 삐뚤어졌다.
그는 알리시아를 품 안에 껴안고 외쳤다.
“내가 내 부인을 어찌하든 네가 뭔 상관이지?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알리시아는 내 소유야. 데본셔의 물건이라고.”
제플린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알리시아의 머리통에 천천히 겨누었다.
“그리고 내 물건을 내가 망가뜨리는 것도 내 자유지.”
“제플린 데본셔!”
“감히!”
제플린이 베이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알리시아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감히 네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너 또한 내 소유야. 내 기사다. 나의 사냥개야! 꿇어! 그렇지 않으면 이 자그마한 머리를 벌집처럼 만들어놓을 테니.”
베이츠는 하는 수 없이 주춤주춤 다리를 굽혔다.
비굴한 그의 모습에 알리시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처음으로 생긴 제 편이 자신 때문에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제플린의 콧대를 향해 머리를 날렸다.
“끄아악!”
“어서 도망가요!”
제플린이 코를 싸매며 주춤하자 알리시아가 그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른 베이츠를 손을 잡고 뛰었다.
“이 쥐새끼 같은……!”
제플린이 여러 발 총을 난사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을 반기는 바깥세상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알리시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리시아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하염없이 눈을 깜빡였다. 안개가 낀 듯이 온 세상이 희뿌옇게 변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입가엔 잔잔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베이츠의 손을 잡고 제플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지금, 비로소 그녀는 인생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타앙!-
단말마의 총소리가 귀청을 찢는 것 같았다.
동시에 베이츠가 다리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아아악!”
베이츠는 다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다물었다.
아프다는 걸 느낀 게 얼마만일까. 그는 근 몇 년간 최강자로 군림하며 상처 하나 입은 적이 없었다.
순간 베이츠의 뇌리에 그동안 자신이 고문하고 목숨을 앗아갔던 수많은 이들의 마지막 눈빛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다리를 절단해야 할 거야. 닿는 순간 수십 갈래로 터지는 총알이거든. 공들여서 구한 보람이 있군.”
낄낄거리는 제플린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베이츠는 필사적으로 알리시아를 밀쳤다.
“어서……! 어서 도망가십시오!”
“하지만 베이츠!”
“저는 여기에 두시고 당신만이라도 아서와 함께 행복하게 사십시오!”
“어디에 있어요? 베이츠? 앞이…… 앞이 안 보여요.”
절망 섞인 그녀의 외침에 베이츠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눈이 멀어버렸다. 종이 한 장을 가지려다가 평생을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
제플린이 손수건으로 총구를 닦아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둘 다 어디 하나 성하지 못한 게 환상의 커플이군. 지하 감옥에 둘을 평생 전시해 줄 테니. 감사하도록 해.”
* * *
“그렇게 도망치듯 나가면 어떻게 해.”
율리안이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베카가 그를 짐짓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욕실에서 갑자기……. 밖에서 다 들었겠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좋아하래?”
“그거야 당신이!”
레베카는 다음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율리안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비릿한 물맛이 레베카의 미뢰를 자극했다.
율리안은 오랫동안 농밀한 입맞춤을 이어갔다. 애써 씻은 땀이 다시 번들거릴 무렵에서야 율리안은 입을 뗐다.
그는 몽롱하게 눈을 뜨고 레베카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난 다시 한 번 더 할 수 있는데…….”
레베카가 펄쩍 뛰며 그를 밀쳐냈다.
“나, 난 못해!”
그녀는 노련한 맹수에게서 도망가듯이 후다닥 침대 위로 뛰어갔다.
그러곤 이불을 둘둘 만 채 눈만 빼꼼 내밀어 그를 노려봤다.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야!”
율리안은 즐겁게 웃으며 느릿하게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귀엽게 있으면 조금 헷갈리는데? 유혹하는 거야, 아니면 제발 해달라고 애원하는 거야?”
“둘 다 아니야……!”
율리안이 으르렁거리며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진 건 레베카였다. 율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곤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지금.”
레베카는 손가락으로 율리안의 콧날을 훑어 내렸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곧이어 그의 도톰한 콧망울에 레베카의 손이 닿자 율리안이 고개를 쳐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유, 율리안…….”
그는 레베카의 손가락이 사탕인 것 마냥 입 안에서 굴리다 놓아줬다.
그녀의 아랫배가 다시 죄어들었다.
율리안이 발갛게 달아오른 레베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이 기나긴 싸움도 끝이야.”
“그래. 이제 정말 끝이야.”
율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주…… 어떻게 푸는 건지 물어봐도 돼?”
레베카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율리안이 그녀의 눈동자를 불안하게 쫓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레베카가 눈을 사르르 접었다.
“사랑.”
“어……?”
“당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사랑이 필요해.”
레베카는 그 이상의 질문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그의 입술을 덮쳤다.
율리안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슬그머니 자신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레베카의 몸짓에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 * *
로탄더스 제국은 유례없는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신전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거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공갈 협박, 카지노 확률 조작, 인신매매, 납치, 감금까지 가담했다는 증거도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게 교황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빛의 장미라는 은밀한 장로회의 지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요하네스 공작은 실상 저주받은 공작이었고, 신전은 어느 이익집단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사실에 수많은 신도가 충격을 받았다.
재판이 길어졌다. 판결을 내리지 못해 길어진 게 아니라, 파고 파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전의 악행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재판이 끝이 났다. 이에 대해 오늘 오후 세 시, 대광장에서 황제가 직접 재판의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긴장되나?”
자히드라가 벌벌 떨고 있는 살바도르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꾹꾹 눌러 닦으며 답했다.
“떠,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하, 할 수 있습니다. 데프리아교를 정화하는 첫걸음이니까요.”
“내가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는 걸세. 보기엔 유약해 보여도 누구보다 올곧은 심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그때 애브러햄이 연설문을 들고 자히드라에게 다가왔다.
“폐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자히드라가 살바도르의 어깨를 툭툭 치곤 앞으로 나아갔다.
애브러햄의 신호에 붉은 휘장이 걷혔다.
자히드라가 루비가 박힌 황금 지팡이를 바닥에 쿵쿵 짚으며 연단석 앞으로 나갔다.
“제국의 존엄한 태양이신 자히드라 황제 폐하!”
광장을 가득 메운 제국민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