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귀환
(2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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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귀환
2021.10.29.
레드트리 던전을 지키던 사수들과 다른 스트라이더들은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인간이 던전에 단신으로 진입한 지 고작 몇 시간이 지났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왠 빛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것.
“쏘지 마! 공격 중지!!”
적습으로 오인하여 화살촉을 겨누는 사수들의 모습에 나지르가 목이 찢어져라 악을 쓰며 경고했다.
“대장님! 저 사람들은…….”
부하들의 경악 어린 목소리에 나지르는 새로이 등장한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숲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을 주민들, 개중엔 심지어 1년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이도 있었다.
나지르는 마치 죽은자가 부활하는 광경이라도 본 마냥 충격에 빠져 말을 더듬으며 지시를 내렸다.
“시, 실종자들이다! 모두 저 사람들을 장벽 뒤로 이동시켜!”
“……케인?”
뒤늦게 던전에 도착한 올리비아는, 그 많은 엘프 무리 안에서도 자신의 아들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하얗게 새어가는 머리카락, 부축을 받아야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육체.
어느 것 하나 자신의 기억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벨라도라 또한 생각치도 않은 케인의 모습에 그 자리에 멈춰서고 입을 열지 못했으나, 엘레나는 달랐다.
“아빠!”
거의 넘어질 뻔하며 달려나간 엘레나는,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다 죽어가는 케인을 끌어안고는 펑펑 울었다.
이어서 다가온 올리비아는 다급히 손을 뻗어 케인의 가느다란 팔뚝을 붙잡았다.
《액티브 스킬 : 힐.
목표 대상의 상처와 기력을 회복시킵니다.》
마력을 쏟아붓는데도 금방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올리비아의 눈가가 물기로 촉촉해졌다.
케인이 15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그녀로썬 알 턱이 없었지만, 어지간한 스킬로도 회복이 쉽지 않을 정도로 험한 시간을 보내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트라이더들은 물론, 다른 엘프들까지 이 3대에 걸친 가족 상봉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케인이 스스로를 던전에게 바친 15년간, 그의 위상은 어둠의 숲 엘프들에게 있어 영웅급으로 올라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전설이 지금 막 살아서 귀환한 것이다.
몇 시간 뒤, 생존자들의 수습이 얼추 끝나갈 무렵.
던전의 폭주 소식에 달려온 나머지 장로들이 모두 치료에 매진한 결과, 케인의 의식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다른 생존자의 부축을 받으며 상반신만 일으킨 케인은 엘레나와 올리비아를 보고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어머니. 엘레나.”
쉬어터진 목소리에 올리비아와 엘레나는 다시 울 뻔했지만, 간신히 감정을 삭인 그들은 어떻게 살아나온 것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케인의 뒤에 서 있던 엘프들이 그를 대신하여 일제히 말했다.
“왠 남자가 와서 저희와 드레이노어님을 구해줬습니다. 그 사람이 저희에게 스크롤을 건네주더군요.”
“그 인간이?”
당연히 그들을 구해줄 사람이라곤 안에 들어간 스테치밖에 없었지만, 올리비아의 물음에 생존자 엘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다급했고, 또 주변이 어두웠던 탓에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 엘프가 아닌 인간이었는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죠?”
“모르겠습니다. 그가 던전의 더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려던 것밖에는 저희도 아는 내용이…….”
그 말에 엘레나는 벌떡 일어났다.
벌써 케인과 생존자들이 복귀한지도 2시간이 넘게 지났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올리비아가 그런 그녀에게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갑작스럽게, 어둠의 숲에서는 크고 작은 지진이 짧은 시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놀란 엘프들은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는 등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던 도중 던전 위에 홀로 우뚝 서있던 붉은 거목, 레드트리에는 세로로 금이 가는가 싶더니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쿠궁!
그 자리에 있었던 엘프들 중, 그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입구를 통해 흙먼지를 토해내며 붕괴해가는 레드트리 던전. 전조도 없이 불과 몇분만에 무너져내린 던전을 본 엘프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레드트리의 최후를 지켜볼 뿐이었다.
파아앗!
쓰러지는 붉은 나무를 배경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무리와 함께 한 인간이 허공으로부터 나타나 바닥에 주저앉았고, 현장에 있던 모든 엘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왔다!”
“인간이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대량의 피를 끼얹은 채 복귀한 스테치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없이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보이자, 엘프들은 인생 처음으로 맛보는 흥분과 승리감에 도취되어 온 숲이 울릴 정도의 함성을 터뜨렸다.
* * *
다음 날, 숲의 모든 엘프들이 레드트리로 몰려왔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각자가 꽃과 유품들을 손에 들고, 무너져내린 레드트리의 앞에 묻어두는 것이었다. 장례와도 같은 이 의식은 엘프들 전체의 참여로 꼬박 반나절이 넘게 진행되었으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후 스테치를 보는 엘프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테치가 구해낸 생환자들의 가족이나 스트라이더들, 그리고 장로들은 그를 인간으로선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 극진히 대접하였다.
“…….”
눈을 번쩍 뜬 스테치는 상반신만 일으키며 늘어지게 하품을 흘렸다.
과일이 담긴 쟁반. 나뭇잎과 풀을 집어넣어 만든 매트리스. 유령불로 은은하게 빛나는 실내조명까지. 영락한 엘프들의 영역에서 받는 대접이, 숲 바깥의 인간의 왕국에서 받는 대접보다도 후하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침대에서 일어나 지내던 건물의 테라스로 나오자, 저 아래쪽에서 거대한 유령불을 피운 채 떠들썩하게 축제를 벌이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하고 있네.’
축제는 거의 5일 동안 진행될 예정이고, 오늘은 그 이틀째. 비축해둔 식량을 풀고, 사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하여 먹거리와 노래가 끊이질 않을 지경.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엘프들이 이 정도씩이나 흐트러지는 것도 드문 일이라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이번 해프닝을 반갑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스테치가 응답하자 엘레나와 올리비아, 그리고 케인과 그를 부축하는 엘프 하나가 스테치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런.”
스테치가 황급히 가져다 놓은 의자에 털썩 앉은 케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고맙네, 스테치.”
케인의 영양 상태는 마법의 힘으로 급격히 나아졌지만, 빠진 근육은 긴 재활을 통해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었기에 자력으로 움직이는 건 아직 무리였다. 그러다 보니 축제 기간 동안은 이렇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케인을 부축하던 이가 문밖으로 나가자, 스테치가 물었다.
“몸은 어떠신가요?”
“…… 아마 이전처럼 돌아가는 건 무리겠지, 역시.”
케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쥐락펴락하며 대답했다.
레드트리에 갇혀있던 15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쉴 틈 없이 지속적 으로 마력이 뽑힌 탓에 원래라면 지금쯤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어야 할 케인의 신체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80대 노인처럼 바뀌어버렸다고 한다.
물론 상태가 호전되어 원래대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언제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케인과 올리비아, 그리고 엘레나 전원이 동시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음…….”
“무슨 일이죠?”
두통인가?
스테치가 어리둥절하여 묻자, 케인은 아직도 머리가 쑤시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엘프중에서도 우리 가족같이 마력에 민감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가시화된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지.”
“제가 아텔리어씨의 스킬을 차단한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엘레나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바로 납득해버렸다. 케인과 올리비아같이 마법에 능통한 일가에서 태어난 엘레나라면 그런 짓이 가능할 법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케인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보는 우리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대기 중의 마력이 급격히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쏠리는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던전이 생성되는 순간이라네. 보아하니 방금전에도 어디선가 생겼겠지.”
그 말에 스테치의 눈이 번뜩였지만,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인은 턱끝을 매만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게 해서 미안하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야. 마력을 보고 느낀다는 게 겉보기엔 대단해 보여도, 실제론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케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잡담이 길어졌네만…… 꼭 좀 듣고 싶어서 말이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
“별다른 일이 없다면, 며칠내로 숲을 나가서 다른 던전을 방문할 생각입니다만…….”
스테치의 말에 케인은 놀라서 되물었다.
“또 가겠다고? 던전에?”
“네.”
엘레나와 올리비아도 조금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특히 엘레나는 방금 한 스테치의 말에 더더욱 궁금해졌다.
스테치가 던전을 노리는 이유는 분명 아티팩트의 흡수 그 자체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그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스테치의 즉답에 케인은 멋쩍은 듯 머리만 긁적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원래는 그냥 이대로 여기 머물러줄 생각은 없냐고 물을 생각이었는데…… 마을 사람들도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일 테고.”
“감사합니다만, 해야 될 일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최소한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가게. 가기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챙겨가고.”
케인이 내심 아쉽다는 듯 말하자, 올리비아도 입을 열었다.
“부담가지지 말고 내려가서 축제라도 함께 즐기는 건 어떤가? 어제부터 계속 방에만 있는 모양이네만.”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나고 방문객들이 모두 돌아가자, 스테치는 대답과는 달리 침대에 도로 누워버렸다.
“휴우…….”
방금 전의 이야기엔 스테치 본인도 아주 조금이지만 혹했다.
대접도 좋고, 의지만 있다면 은둔하고 평생 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너한테 그걸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겠지.』
잠자코 있던 메멘토 모템의 말에 스테치는 두 눈을 부릅떴다.
“…… X발, 당연하지.”
성공여부는 둘째치고, 기습이나 암살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정도로 스테치가 겪은 고통은 적지 않았다.
또한 제라드는 스테치에게 적은 액수나마 현상금을 걸어두었다.
이는 곧 스테치가 언제라도 다시 눈에 띄기만 하면 추격할 것이며, 아직도 그를 죽일 의지가 충만해 있다는 뜻. 스테치가 평생을 숨죽여 지내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언젠가 마주치는 일은 피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호구가 아닌 이상 가만히 기다려서 두 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놈이 자기 원수를 죽일 기회를 포기하겠냐.”
스테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로 다가가서는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케인씨는 던전이 생성되는 순간을 포착했어. 마력이 ‘쏠렸다’는 건 던전이 생성된 방향을 알 수도 있다는 소리지. 그리고 그건…….”
『베네지아나 다른 왕국들이 던전의 존재 자체를 아직 눈치못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군.』
찰떡같이 알아듣는 메멘토 모템의 모습에 스테치는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으나, 애써 참아낸 뒤 지도를 보고선 이동 계획을 짰다.
“마을을 떠나기전에 한 번 물어봐서, 그 던전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해 두는게 좋겠어.”
스테치가 한참 지도를 들여다보며 다음 이동 계획을 세우자, 뒤쪽에서 누군가가 물어왔다.
“누구한테 물어본다고요?”
“으아악!”
생각치도 못한 제삼자의 존재에 소스라치게 놀란 스테치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엘레나는 그런 스테치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까, 깜짝이야. 그런건 물어서 뭐하게?”
당황한 나머지 본인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하는 스테치에게 엘레나는 말했다.
“뭐하긴요. 저도 가게될 행선지인데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어요?”
“…….”
『…뭐요?』
자기 목소리가 남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멘토 모템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된 스테치가 물었다.
“…… 아니 왜? 유물이라면 마을 돌아온 후에 돌려줬잖아?”
황당해하는 스테치를 바라보며, 차분한 미소와 함께 엘레나가 답했다.
“그러니까요. 마을의 은인인 당신에게 은혜를 갚아야죠.”
“은혜?”
스테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