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진실 (1) (173/203)


173화 진실 (1)
2022.03.23.


태초에 아치발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불멸의 몸. 그리고 만물을 창조, 혹은 파괴할 수 있는 힘을 몸에 지닌 자. 그러나 그가 막 눈을 뜬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엔 바위와 산을 빚어내고, 그 이후에는 나무와 식물. 더 나아가서는 살아 숨 쉬는 동물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물들은 모두 단순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살아 있는 것에 애정을 가지고 대해 줘 봤자, 서로가 사는 시간은 너무나도 달랐다.

세상이 풍부해져 갈수록, 그는 반대로 고독을 느꼈다.

허무해진 그는 하릴없이 긴 세월을 혼자 지냈다. 한때는 다른 생물들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할까 하는 생각도 품었지만, 타고난 불명성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결심했다.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드는 거야.’

새나 물고기 같은 동물과 달리,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정도로 고등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방법도 모르고, 지식 또한 없었다.

모든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는 상황.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은 아치발의 편이었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다루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결국 세 명의 자식들을 탄생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카인. 데스트라. 엑스턴.

아치발은 비로소 행복해졌다. 또한 그의 지식을 타고난 자식들은 아치발이 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간단하게 대륙 전체에 생명을 퍼뜨렸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모든 것이 행복하게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두막의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던 아치발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종이에 적힌 복잡한 수식들이 도출해 낸 답은, 그에게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절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아치발과 그의 자식들의 수명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본디 완전한 하나의 그릇이었던 것을 쪼개 세 개로 나눈 탓에 불멸성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였던 옛날과 달리 지금의 아치발은 죽음이 두려웠다. 자신이 죽는 것도, 자식들이 죽는 것도.

‘또 혼자가 되라고? 지긋지긋한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가족을 떠나보내고?’

“안 돼!”

그는 절규했다. 간신히 손에 넣은 행복을 이렇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불멸성을 재획득하는 것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치발이 지금껏 쌓아 온 모든 지식들은, 그가 하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현재 그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깨진 그릇. 체내의 마력이 자연 회복되는 속도가, 새어 나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구멍을 틀어막을 수만 있다면, 불멸성을 회복하여 자식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릇을 고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마력을 모아다가 일시에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해야 하지?’

아치발은 고뇌했다.

자연 상태의 마력은 절대로 한곳에 저장할 수 없다. 인위적으로 모아 두려 해 봤자, 결국엔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뿐이었다. 더군다나 대기중에 떠다니는 마력을 포집해 봤자 그 양은 극히 적었다.

처음엔 사람을 모아다 마력을 추출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마력이 더 컸기 때문에 포기해 버렸다.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동산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묘한 특성을 가진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기(邪氣)였다.

* * *

사기는 다름 아닌 세 신의 피조물들, 즉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개념의 에너지였다.

자연사가 아닌, 살인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죽일 때에만 피어나는 기운.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었지만, 아치발은 사기가 가진 독특한 성질에 주목했다.

바로, 사기가 주변의 마력을 끌어모아 서로 엉겨 붙는다는 점이었다.

아치발은 이 특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처음으로 넘고 말았다.

“헉…… 헉…….”

소나기처럼 비가 내리는 밤.

시체의 산을 바라보며, 아치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을 직접 죽여 사기를 만들어 냈다.

자식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피조물들을, 그가 죽였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는, 자식들을 제외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시체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을 확인한 아치발은, 손끝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방출시켰다.

그러자 무형의 에너지였던 사기와 마력이 결합되기 시작했다.

‘됐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자연계의 마력을 모아 저장하는 일도 꿈은 아니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뭐야……?!”

합쳐진 사기와 마력이, 점점 실체가 있는 형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당황한 아치발이 뒤로 물러서자, 두 에너지의 결합에서 탄생한 무언가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발톱과 엄니. 근육질의 사지와 붉은 눈. 그것은 맹수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정도로 흉포한, 미지의 생명체였다.

‘대체 이건…….’

그것이 바로, 아치발이 처음 만들어 낸 몬스터(괴물)였다.

* * *

몇 주 뒤.

인구수 60명 정도의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건물만을 남긴 채 사람들만 말끔하게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굉장해.”

“크와아악!”

아치발은 미쳐 날뛰려는 몬스터를 마법으로 붙잡아 놓고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처음엔 고작 1m 정도에 지나지 않던 덩치가, 지금은 거의 5m에 육박하고 있었다. 녀석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은 마을 사람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를 시사하고 있었다.

“하하하!”

아치발은 광소를 내뱉으며 몬스터를 살펴보았다. 체내에는 갓 녀석을 만들었을 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마력과 사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기는 그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에 비례하는 양만큼의 마력과 결합하려 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녀석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죽임으로써, 더 많은 사기와 마력을 흡수했다. 그 결과, 아치발은 당초 목표 일정보다도 더 빨리, 훨씬 많은 양의 마력을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얻은 마력은 아치발이 흡수하기에도 용이했다.

몇 년 안에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그에게 있어 이것은 호재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을 달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몬스터를 무작정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어설프게 굴었다간, 기껏 만들어 낸 몬스터들을 자식들이 없애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계획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몬스터의 개입 없이도 대량의 사기를 만들어 낼 무언가가.

“……그래.”

눈을 반짝인 그는 인근의 다른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서 대략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착지한 그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아치발은 밭을 개간하던 한 인간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턱이 없었던 남자는 반가움에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치발은 곧장 그에게로 다가갔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남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아치발이 생각 이상으로 접근해 오자 당황한 남자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는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전에 아치발의 손이 먼저 그의 이마에 닿고 말았다.

“어어…….”

“복종하라.”

아치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남자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스윽-.

남자는 조용히 손에 쥔 농기구를 들어 올리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겉으로는 서로 간에 쌓인 앙금이 터져 나와 불거진 싸움으로 보였지만, 그 뒤에 사실 아치발의 개입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자식인 세 신들조차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힘이 아무리 강력해 봤자, 아치발의 힘보다는 못할 테니까. 남은 흔적으로 뒤를 캐 봤자 부질없는 짓이었다.

물론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치발은 몇 번씩이고 종족과 종족을 오가며 남몰래 분란의 씨앗을 심어 넣었고, 이는 최종적으로 세 종족의 분열을 발생시켰다.

성과는 훌륭했다.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없던 사기가, 지금은 온 대기 중에 충만하게 차올라 있었다.

계획을 앞당길 수 있게 된 아치발은 기뻐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 * *

지난 며칠 동안 아치발은 집에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종족 간 싸움의 중재를 부탁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엑스턴이 틈날 때마다 방문해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금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흠…….”

그는 실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물체를 쳐다보았다. 5m를 넘어 끝없이 성장하던 몬스터는, 어느새 숲속에 커다란 고치를 틀었다. 고치의 두꺼운 피막으로 뒤덮인 몬스터는 외부에서 관측할 수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더 큰 형태로 진화하려는 건가? 아치발이 그런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고치가 서서히 찢어졌다. 갈라진 틈새로부터 시커먼 사기가 물안개처럼 퍼져 나왔고, 아치발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쩌저적!

안에서 나온 것은 몬스터가 아닌, 잘 세공된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어?”

뭐지?

그 순간, 폭발적인 기세로 터져 나온 사기와 마력이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아치발은 황급히 공중으로 날아올라 이를 피한 후,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았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력과 사기의 폭풍은 마치 블랙홀처럼 근처의 모든 지형지물들을 빨아들였다. 나무와 바위, 흙과 모래등등.

이윽고,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섬광.

잠시 시선을 피했던 아치발이 고개를 돌릴 때쯤엔, 전에 없던 거대한 규모의 동굴이 고치가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치발은 보았다.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동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축을 울리며 동굴을 빠져나온 녀석들은, 사람이 사는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 달려갔다.

사기를 끌어모으는 곳.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곳.

그렇게 아치발은 첫 ‘던전’을 만들어 냈다.

1656430536642.png

1656430536642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