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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진실 (2) (174/203)


174화 진실 (2)
2022.03.24.


스테치는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던전도, 몬스터도. 모든 것이 그 아치발이라는 미치광이 한 명의 손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었다니.

“『그것이, 오두막 비밀 지하실에 있던 아버지의 연구 노트 속 내용이었다.』”

데스트라는 엘레나의 얼굴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스테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됐죠?”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어. 던전은 바깥에서 희생양을 끌어모았고, 그렇게 만들어 낸 사기를 마력과 뭉쳐서 ‘핵’을 키워 나갔지.』”

“그럼 아티팩트가…….”

스테치는 끙- 하고 신음했다. 던전은 아치발의 불멸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살아 움직이는 마력 수집용 공장이었던 셈이다. 데스트라가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검은 아티팩트를 통해 보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겨 보던 스테치는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의 계획은 실패했어요.”

데스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알았을 때엔 이미 한참 늦은 뒤였어. 결국 우린 마지막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를 찾아낼 수 없었고, 이미 던전은 대륙 여기저기에 퍼져 버린 지 오래였지.』”

세 종족이 거의 절멸의 위기에 다다랐을 때쯤, 아치발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의 핵들을 수거했다. 불멸을 다시 획득하려는 그의 정신 나간 계획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남은 마력까지 탈탈 쏟아부어 모든 핵을 하나로 합치는 순간,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굳혀졌어.』”

스테치는 그녀가 말하는 덩어리가 무얼 뜻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검은 아티팩트!”

“『그만한 마력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우리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카인과 엑스턴,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뒤를 쫓아갔고, 결국 핵을 흡수하려던 그분을 붙잡았어.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아치발이 자결을 택한 것이다.

“듣고 보니 이해가 안 되네요.”

스테치가 물었다.

“그렇게나 자식들과 헤어지기 싫어했다면서,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나 손쉽게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린 거죠?”

“『아니…….』”

데스트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자살이 아니었어.』”

* * *

“말해!”

엑스턴은 노호성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목이 잡힌 드워프는 킬킬거리며 웃어 대기만 하며 끝끝내 대화를 거부했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건 불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엑스턴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상대의 목뼈를 단숨에 부러뜨렸다.

우두둑!

드워프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고, 참다못한 엑스턴은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새끼가!”

콰앙-!

바닥에 집어 던져진 시체는 그야말로 산산 조각나 버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10년.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옛날로 되돌아갈 거란 예상과 달리 새로운 던전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종족들 간의 불화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배후에는 아치발의 신자들이 있었다.

아치발.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세 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껏 붙잡은 신자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일 뿐, 묻는 것에 대답하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신의 능력으로도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엑스턴의 등 뒤에서,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냐?! 어떻게 단 한 놈도-”

엑스턴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 지르려다가, 카인이 든 검은 구체를 보고선 멈칫했다.

“……그게 왜 네 손에 있어?”

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분 나쁜 감각. 엑스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인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진정해.”

카인이 말했다.

“아치발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야.”

“그러니까, 애초에 그게 왜 놈들한테 있냐고! 그때 네 손으로 박살 난 거 아니었어?”

이미 끝난 일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구체를 보는 순간 마음속 한켠에 깊이 묻어 두었던 악몽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인이 말했다.

“신자 놈들의 숨겨진 아지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찾아냈어.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귀중하게 품고 있더라고.”

그는 엑스턴이 보는 앞에서 검은 구체를 박살 내 버렸다. 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엑스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신자 놈들에게 우리의 능력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검은 구체 조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이게 끝은 아니겠지?”

“응.”

“녀석들의 목표는?”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거지. 지금까지 녀석들이 해 온 짓을 보면 뻔하잖아.”

엑스턴이 눈을 꾹 감았다.

생각 없이 속 편하게 지내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그게 대체 언제였더라?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이놈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

“우리가 만든 피조물들이, 아버지의 업으로 고통받게 만들 수는 없어. 너도 그건 잘 알잖아.”

“너야말로 잊지 마.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엑스턴의 말에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세 신의 목숨은 양초와도 같았다. 체내에 저장된 마력은 그들의 몸을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고, 그 끝에 언제 다다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까 더더욱 서둘러야지. 우리가 눈을 감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해.”

그것은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수호하겠다는 거룩한 선언이었다.

* * *

“그럼 제가 싸워 왔던 그 모든 신자들이……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가 아니었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힘에 의해 몸도 마음도 뒤틀린 자들이겠지.』”

데스트라가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이후로 아버지가 남긴 ‘조각’들을 찾아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김 없이 찾아내서 파괴해 버릴 생각이었지. 하지만…….』”

“실패하셨죠.”

스테치의 말에 데스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꽤나 직설적이네?』”

“이제 와서 돌려 말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그래도 함부로 말해서 죄송합니다.”

“『하긴, 사실이 그런데 무슨 변명을 할까. 결국은 우리 가족 때문에 너희가 고통받고 있는 셈인데.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스테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버린 데스트라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신이, 이제는 다른 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누가 비난을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데스트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지.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점점 줄어만 가는데, 신자들은 계속해서 힘을 키우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잖아?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어.』”

* * *

아직도 용암이 펄펄 끓는 활화산 근처를 지나쳐, 데스트라는 엑스턴의 공방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데스트라!”

다른 쪽에서 날아오던 카인이 그녀와 합류했다. 둘은 함께 공방 앞에 내려앉았고, 미리 마당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엑스턴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밤새 철야 작업으로 초췌해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밝아 보였다.

“잘 왔다……. 내 비밀 공방에.”

“이렇게 대놓고 드러난 공방은 아무도 ‘비밀’이라고 안 해.”

카인의 말을 들은 엑스턴은 툴툴거렸다.

“까칠하긴. 그냥 한번 말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들어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엑스턴은 두 사람을 공방 안으로 들였다.

공방 안은 용도를 파악할 수 없는 온갖 형태의 기계 장치들과 무구들로 한가득이었다. 그중에는 엑스턴이 카인과 데스트라를 위해 만들었던 갑옷도 있었다.

“박물관이네, 아주. 아이들한테 보여 주면 아주 좋아할 텐데.”

데스트라는 자신의 피조물인 엘프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서 커다란 테이블 앞에 도착한 엑스턴은, 자신을 따라오던 둘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백업 플랜이 필요해. 오늘 너희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어.”

데스트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우리가 소멸되고 난 이후를 위한 계획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엑스턴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냈다.

“설마 진심으로 우리가 이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아버지가 남긴 조각은 절대 남은 시간 안에 못 찾아.”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아치발이 남긴 검은 구체의 조각은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숫자는 물론, 조각이 숨겨진 위치조차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조각 안에 잠재된 아치발의 힘이 워낙 강력했던 탓에, 신들의 능력으로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자그마치 15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계속해서 새 조각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데스트라가 물었다.

“너희들의 정수가 필요해.”

그의 말에 카인과 데스트라는 당황했다.

안 그래도 수명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정수를 뽑아 간다면 그건 말 그대로 지금 당장 목숨을 내놓으란 소리와도 같았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카인의 질문에 엑스턴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카인과 데스트라가 테이블 위를 살펴보자, 설계도들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이건?”

“머지않아 아치발의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지를 다시 되살리겠지. 하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 싸워 나갈 힘이 없어. 그러니까…… 난 대리자를 만들 셈이야.”

“대리자?”

“몇 년, 몇십 년…… 심지어 몇백 년이 지나더라도 우리의 의지를 이어, 우리의 싸움을 이어 나갈 영원불멸할 신의 대리자. 그래서 이 빌어먹을 조각들을 세상에서 모조리 쓸어버리게 만드는 거지.”

그 말에 데스트라가 항변했다.

“기껏 내놓은 답이 우리들의 업보를 후세로 넘기겠다는 거야? 그건 너무…….”

“가혹하겠지.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어.”

데스트라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씁쓸하게 바라보며, 엑스턴은 말했다.

“이건 내 일생을 바친 최고의 걸작이 될 거야.”

카인과 데스트라가 내려다본 테이블 위에는, 반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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