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십분천하(十分天下)
(186/203)
186화 십분천하(十分天下)
(186/203)
186화 십분천하(十分天下)
2022.04.05.
“이익!”
제라드의 검에 복부가 꿰뚫리려는 찰나, 스테치는 커스 디바우러의 부스트를 한 번 더 걸었다. 폭발적인 힘으로 타이런트의 구속을 풀어낸 스테치는 제라드의 검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뒤로 밀려났다. 한번 박살 난 탓인지 커스드 아머는 제대로 발동되질 않고 있었다.
콰광!
벽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스테치와 제라드 모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검을 쥔 스테치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적셨다.
“말해 봐라, 스테치!”
제라드가 외쳤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내 부하의 목을 잘랐냐? 그 알량한 복수심 때문에 내 인생은……!”
스르륵-.
붙잡은 손을 피로 물들이며 더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제라드의 검. 스테치는 이를 악물고선 상체를 돌려 검극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러나 그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리스트 블레이드를 뽑아낸 타이런트가 채찍처럼 그를 공격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그딴 개소리를!”
퍽!
이마로 제라드의 턱을 들이받은 스테치는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 프론트 킥을 날렸다. 흉판을 차인 제라드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사이, 스테치는 온몸을 날려 그와 함께 나뒹굴었다.
“하아아아!”
보디 체크를 먹여 거리를 벌린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번쩍 치켜들어 그대로 제라드의 머리 위로 휘둘렀다.
금속 간의 충돌음, 그리고 단단한 바닥을 뚫고 움푹 들어가는 제라드의 두 다리. 스테치는 폰두스로 검의 무게를 조절해 가며 제라드를 수차례 이상 연거푸 공격했다.
“뒤져, X발아! 뒤지라고!”
쾅! 쾅!
한쪽 팔의 건틀릿으로 스테치의 검을 막아 내던 제라드는, 타이런트의 관절들을 이리저리 돌려 댔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던 그의 팔은, 이내 끝부분에 작은 포구가 달린 암 캐논으로 돌변해 있었다.
“윽?!”
《오토매틱 리플렉스》로 위기를 감지한 스테치가 《라이트닝 스피드》의 가속으로 몸을 꺾었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제라드의 타이런트가 보랏빛 광선을 뿜어냈다.
쥬와아앙!
광선은 스테치의 어깨를 뚫고 지나가 그대로 왕성의 위층까지 뚫고 올라갔다. 무너져 내린 천장 일부가 땅에 떨어지면서 커다란 먼지구름과 함께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지를 낀 스테치의 왼팔은 어깨에서 통째로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상처에서 분수처럼 튄 피가 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하!”
그 꼴을 본 제라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깐. 스테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결손 된 신체 부분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본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이……!”
경악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누구는 잃은 팔 대신 의수까지 달아야 했는데, 저놈은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그걸 복구한단 말인가? 제라드는 스테치의 왼손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메멘토 모템을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저 반지가 순순히 나의 것이 되었다면, 이딴 개고생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스테치!!”
분개한 제라드가 고함을 내질렀다.
우우웅-.
스테치는 다음 발사를 위해 에너지 충전을 시작한 타이런트의 포구를 팔꿈치로 찍어, 궤도를 강제로 꺾었다. 이번엔 바닥을 뚫고 베네지아 왕성 지하 감옥까지 내려가는 광선. 스테치는 손을 뻗었다.
“《아이시클 불렛》!”
제라드의 앞에 솟아오른 얼음벽이 터지면서, 총탄만큼이나 빠른 파편들이 그에게 날아갔다.
“《서지》!”
두터운 갑옷이 무색하도록 전신을 마구잡이로 휘젓는 전류. 제라드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멈칫거리는 사이, 스테치는 다음 주문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안 통한다아아!”
제라드는 스테치의 얼굴을 타이런트로 강하게 쳤다. 머리가 홱 돌아간 그가 비틀거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제라드는 리스트 블레이드로 스테치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그때.
“아뵤!”
콰직!
제라드의 리스트 블레이드가 스테치의 살갗을 꿰뚫으려는 찰나, 스테치의 머리 위에서 뚝 떨어진 프레야가 두 발로 타이런트의 검신을 지면에 찍어 눌렀다.
“?!”
생각지도 못한 제삼의 인물의 난입으로 당황한 제라드.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프레야는, 그대로 다시 도약한 뒤 온몸의 회전력을 더해 제라드의 면상에 드롭킥을 먹였다.
빠캉!
제라드는 포탄에 얻어맞은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벽들을 뚫고 옆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간신히 여유를 얻은 스테치가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프레야에게 물었다.
“……가렛은 어떻게 하고?”
“본인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길래 물러나 줬어.”
프레야는 스테치의 어깨 위에 쌓인 먼지를 탁탁 털어 주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엉망이네, 아주.”
“시꺼. 그래도 아직까진 잘하고 있었거든.”
스테치의 항변에 프레야는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쓸데없이 심술부리긴. 근데 뭐냐? 일방적인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비등비등하게 맞붙고 있잖아?”
방 서너 개를 가로질러 날아간 제라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보였다.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이 자식 뭔가 이상해. 맷집이 강해졌다고 해야 하나…….”
풀 파워를 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말 죽일 작정으로 신명나게 두들겨 팼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라드는 스테치가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제라드의 의수와 갑옷은 할로우 블레이드의 날이 제대로 박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저기 의수랑 갑옷.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검이 거기에 반응하고 있어. 너도 보이지?”
“그래.”
프레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라드의 갑옷과 의수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운은, 소름 끼칠 정도로 검은 아티팩트와 닮아 있었다.
‘혹시…….’
잠시 고민하던 프레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벽에 난 구멍 너머로 잔뜩 쉬어 터진 제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구지?”
“와우. 그래도 나름 있는 힘껏 날려 버린 건데 벌써 일어나네.”
제라드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프레야가 휘파람을 불어 댔다. 일반인이라면 전신의 뼈가 가루가 돼도 모자랄 위력이었는데, 제라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단순히 회복 능력이 뛰어나서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정상적이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스테치 아텔리어.”
콰르륵.
주먹으로 벽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며 되돌아오던 제라드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스테치에게 조소를 날렸다.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도발해 대더니, 결국은 자기 부하의 도움 없이는 이길 자신이 없는 건가?”
“푸핫!”
그 말을 들은 프레야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비웃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리액션이었다.
“내가? 얘 부하?”
“진짜 개소리도 정도껏…….”
스테치가 어처구니없어하자, 프레야는 그의 등을 두들겨 대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댔다. 잠시 후, 간신히 숨을 고른 프레야가 입을 열었다.
“어이. 고작 방금 전에 쪼오끔 투덕거린 정도로 본인이 스테치보다 더 강해졌다든가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설마?”
“?”
제라드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프레야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멍청하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콰콱!
다가오던 제라드가 스테치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벽을 부쉈다. 그러자 프레야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스테치, 직접 보여 줘라.”
파앗!
몸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이 흩어지면서, 프레야는 반지로 빨려들어 갔다. 그것을 본 제라드는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아티팩트의 안으로……?”
“준비됐냐?”
스테치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물었다. 제라드가 타이런트의 손아귀를 괴물의 주둥이처럼 벌리며 방어 자세를 취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시야에서 스테치의 모습이 사라졌다.
“뭣-”
처음 제라드를 상대로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스피드였다. 《라이트닝 스피드》로 가속한 스테치는, 제라드의 배후를 잡은 뒤 주먹으로 그를 후려쳤다.
퍼어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또 한 번 날아가는 제라드. 벽면에 꽂히기가 무섭게 따라붙은 스테치가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으아아!”
쾅! 콰광!
주먹과 발길질. 거기다 몇백 킬로그램 이상으로 증량된 할로우 블레이드를 몽둥이처럼 능숙하게 다뤄 가며, 제라드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한 스테치. 그 터무니없는 속도와 위력에 반격은커녕 방어하기에 급급한 제라드였다.
“아악!”
급기야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타이런트의 외갑과 갑옷판을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충격에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스테치는 제라드가 걸친 갑옷의 이음매 사이에 손을 집어넣은 뒤, 그대로 집어 들어 반대쪽 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콰과과광-!
기둥과 벽을 뚫고, 계단통 한가운데로 낙하하는 제라드. 바짝 추격해 오던 스테치는 제라드가 땅에 추락하기가 무섭게 그 위로 함께 떨어졌다.
“빌어먹을 새끼가아아!”
주먹을 피한 제라드는 스테치와 손을 맞잡은 상태로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아까 전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 째서?”
제라드는 한쪽 무릎을 꿇었고, 스테치는 그런 그를 향해 체중을 실어 가며 압도해 나갔다. 전력을 내고 있는 제라드와 달리, 스테치는 아직도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뭐지? 그 여자가 뭔가 한 건가?”
붉은 머리의 여성이 전투에 개입한 이후로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테치는 제라드의 말을 정면으로 비웃었다.
“이 X신아.”
그는 킬킬거렸다.
“‘그 여자’는 내 친구인데, 조금 전까지도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내 힘을 절반이 넘도록 떼어 갔었거든? 그 힘이 이제 돌아왔으니 너 따위가 내 상대가 될 턱이 없잖아.”
제라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제대로 이해한 부분은 단 하나.
‘핸디캡을 끌어안고서도 나와 대등하게 싸웠다는 말인가?’
심지어 본인 입으로는 그것이 절반도 안 되는 힘이라고 말했다. 제라드는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스테치는 한층 더 힘을 가하며 제라드에게 윽박질렀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오늘은 진짜 너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 줄 테니까!”
뿌드득!
타이런트의 우수, 그리고 뼈와 살로 된 좌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으깨졌다.
고통에 찬 제라드의 비명 소리가 왕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