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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제물 (1) (187/203)


187화 제물 (1)
2022.04.06.


제라드의 두 손을 옴짝달싹 못 하게 꽉 마주 잡은 스테치는, 그를 번쩍 들어서 집어 던졌다.

“끄아아아악!”

으스러진 양손 끝으로부터 팔뚝을 타고 전해져 오는 통각. 땅에 떨어진 제라드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나 스테치는 그런 그의 복부에 자비 없는 발길질을 날렸다.

뻐억!

바닥을 구르느라 천지가 뒤집히는 와중에, 제라드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문득 떠올렸다.

‘왜 이렇게나 강한 거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동안 그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타이런트를 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기 위한 재활 훈련을 거친 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내에서는 정체불명의 힘까지 넘쳐흘렀다.

제아무리 스테치 아텔리어가 강해졌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을 정도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말이지 허무맹랑한 희 망사항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마냥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제라드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으스러진 타이런트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망가진 관절 틈새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망가진 양손 모두가 곧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재생 능력?』

프레야가 중얼거렸다.

오른팔을 곧장 암 캐논으로 변형시킨 제라드는 포구를 스테치에게 겨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에너지 차징을 완료한 그는 손끝으로 굵직한 광선을 발사했다.

첫 발사 때보다도 훨씬 짧아진 발사 간격에 도저히 피할 틈이 없었던 스테치는, 정면으로 이에 맞서는 쪽을 택했다.

『《써멀 비트》!』

스테치의 등 너머로 자그마한 결정체가 셋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태양처럼 뜨겁게 작렬하는 열광 선을 쏘아 냈다. 세 개로 시작된 광선들은 하나의 굵은 줄기로 합쳐져 그대로 제라드의 것과 맞부딪쳤다.

열광 선과 에너지빔이 사방으로 비산하면서 왕성의 벽과 천장, 바닥을 무너뜨렸다. 그사이 스테치는 《써멀 비트》의 공격을 맞받아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제라드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한 뒤, 그대로 검을 올려 베었다.

카앙-!

결국 제라드는 열광선을 피해 몸을 날림과 동시에 스테치의 검을 갑옷으로 받아 냈다.

타이런트는 마치 이드릴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스테치의 생체 에너지를 빨아먹기 위해 뼈로 된 손아귀를 주둥이처럼 우악스럽게 벌렸다.

그러나 스테치는 거기에 잡히는 대신 검을 밀어넣더니, 힘을 써서 억지로 타이런트를 치워 버렸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스테치가 내민 손바닥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의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는 레지아 계곡을 돌면서 새로 익힌 마법을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아쿠아 스플래터》!”

『《에어 드릴》!』

《콤비네이션 스킬: 하이드로 제트. 바람의 힘을 조합하여, 상대를 꿰뚫는 고수압의 물을 발사합니다. 적의 방어를 일부 무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위나 금속도 절단하는 강력한 고수압의 물줄기가 제라드에게 날아갔다. 갑옷이 워낙 튼튼해서 꿰뚫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그의 몸은 스테치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수류에 밀려 날아가 벽에 부딛혔다.

“프레야!”

부름에 응하여 나타난 프레야가 스테치의 등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선이 얇은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불끈 쥔 그녀는, 그대로 낙하하여 제라드의 머리통을 더블 액스 핸들로 내려쳤다.

쾅!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하지도 못하고 얻어맞은 제라드. 갑작스러운 충격 탓에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스테치는 그의 턱으로 플라잉 니킥을 먹여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어딜 쳐 누워!”

“컥!”

이어지는 육탄 공격의 세례.

제라드는 스테치와 프레야의 예상치 못한 변칙적인 콤비네이션에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공격을 막았나 싶으면 별안간 다른 한쪽이 나타나 빈틈을 공략해 온다. 흡사 패기 좋은 샌드백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젠장!’

제라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대체 나한테 부족한 게 뭐길래?’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아티팩트 타이런트에는 아직 발휘되지 않은 능력과 힘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제라드는 끝끝내 결전의 날인 오늘까지도 타이런트를 완전히 각성시키지 못했다.

문득, 그는 떠올렸다.

‘저주니 뭐니 하면서 남에게 떠넘기지만 않았어도, 그 아티팩트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되었을 텐데.’

아버지의 말, 그리고 눈앞에서 덤벼드는 스테치 아텔리어. 제라드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마치 모든 세상이 승자는 저놈이고, 패자는 자신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내 의지가 저 새끼보다 약하다고? 어딜 함부로 그딴 소리를……!’

절그럭.

타이런트의 뼈마디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디 사이가 벌어지면서, 그 틈새로 뜨거움 스팀이 뿜어져 나왔다.

‘왕이고 나발이고 다 X 까라 그래! 지금 저놈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뭐든……!’

그 순간. 스테치의 타격을 막아 내느라 뒤로 한참 밀려난 제라드는, 오른팔에서 전해져 오는 맥박에 눈길을 돌렸다.

타이런트.

의수용으로 쓰이는 것에 불과했던 팔이, 마치 처음부터 몸의 일부였던 듯이 혈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붉은 피가 혈관을 타고 타이런트 내부로 흘러 들어가자, 타르처럼 찐득한 액체로 뒤바뀌어 반대쪽 혈관을 따라 제라드에게 되돌아왔다.

두근.

“끄흑!”

심장이 멎는 듯한 압박감.

그리고, 그가 보는 세상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푸쉬이이-.

타이런트의 뼈마디들이 조금씩 벌어지더니, 그 틈새에서 뜨거운 스팀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갑옷과 타이런트가 발하던 검은 아티팩트의 기운은 이전보다도 한층 더 강해졌다.

그 모습을 본 스테치와 프레야는 막 당겼던 주먹을 그대로 거둬들이며 황급히 뒤로 몸을 뺐다. 눈으로 보고 한 행위가 아닌, 본능에 기반한 방어 동작이었다.

“?”

제라드의 타이런트로부터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사기. 이제껏 봐 온 그 어떤 던전보다도 진한 사기가, 주변 일대를 가득 채워 가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스테치!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어!”

프레야의 경고에 스테치가 투덜거렸다.

“나도 눈깔 있으니까 보면 알아! 썩을, 이제 와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 순간, 스테치와 프레야는 사기의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제라드의 모습을 보았다.

검은 눈과 보랏빛으로 변색 된 피부. 거기에 어딘지 모르게 생물 같은 특징이 더 두드러지도록 바뀐 타이런트의 외형.

파앗!

지면을 박찬 제라드가 포탄처럼 그를 향해 튀어 나갔다.

* * *

“저게 뭐야……?”

한창 수도 외부에서의 공격에 맞서 싸우느라 여념이 없던 병사들의 시선은, 어느새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왕성으로 꽂혀 있었다.

처음엔 바빠서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왕성 상층부를 뚫고 나온 보랏빛 광선이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광경. 그것은 비단 베네지아의 병사들뿐만이 아닌, 그들을 상대로 맞서 싸우던 가렛의 부하들의 주의를 끌기에도 충분했다.

“저거 혹시?”

“음.”

가렛의 부하 하나가 중얼거리자, 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저 빛은 십중팔구 제라드와 스테치의 싸움이다. 그래도 명색이 최종 결전인 만큼 스케일이 무지막지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예상대로 정말 엄청나게 치고받는 중인 듯했다.

“……이길 수 있겠죠?”

“이겨. 무조건 이겨. 절대 질 리가 없지.”

지금 그들이 굳이 남문과 북문에서 버티고 서 있는 이유는 결국, 스테치가 오롯이 셋째 왕자와의 싸움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한만 없다면 단신으로라도 방어를 뚫고 들어가 스테치의 싸움을 도왔으리라.

‘뭐, 우리한테는 여신님도 있으니까.’

데스트라를 직접 보기 전까진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이제 와서 신을 의지할 생각을 한다니. 과거의 자신이 본다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 칠 일이다.

“저 빛은?”

가렛의 부하들에게 날아온 화살들을 대신 막아 주던 마르크가 물었다. 그러자 스카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왜? 너도 가서 한탕 뛰고 싶냐?”

“…….”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렇다는 의미로 보였다. 스카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서라. 저기서 벌어지는 싸움은 우리가 끼어들 만한 수준이 아닐걸. 기껏 해 봐야 여신 정도나 되지 않으면…….”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이번엔 스테치가 날려 보낸 열광 선 파가 왕성의 반대쪽을 뚫고 나왔다. 여기저기가 박살 나는 와중에도 주저앉지 않는 왕성의 튼튼함이 그저 놀라울 지경이었다.

『싸움이 격해지고 있나 보구나. 걱정이 되진 않는 게냐?』

한편, 북문에서 병사들을 견제 중이던 엘레나의 머릿속에서 데스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엘레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죠. 이 세상에 계획대로 완벽히 흘러가는 일이란 없는 법이니까요.”

필요하다면 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다 뚫어 버리면 그만이다. 엘레나는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무심코 힘을 주었다.

“어, 어떻게 하죠?”

엘레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성벽 위에서 자세를 바짝 낮추고 있던 병사 하나가 북문 지휘관 개리슨에게 물었다. 방금 전의 광경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왕성이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젠장……. 대체 무슨 방법으로 알렌테의 성벽을 넘어온 거지? 설마 내부자의 조력이 있었나? 아니면 남문이 벌써 돌파당한 건……?’

열심히 골머리를 쥐어짰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왕성에 남겨 둔 수비 병력도 나름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들마저 모두 당했다면…….

‘아, 안 돼!’

절망적인 미래가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개리슨은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여기를 포기하고 성으로 가 볼까? 아니, 만약 그게 적이 원하고 있었던 거라면…….’

“으아아악!”

병사들의 단말마 섞인 비명 소리가 개리슨의 귓전을 때렸다. 적측에서 날아온 포탄이 끝내 마지막 남아 있던 대포를 날려 버린 것이다. 하늘 높이 튀어 오른 성벽의 자잘한 파편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썅……. 거기 너!”

주위를 둘러보던 개리슨은 직급이 자기보다 하나 아래인 병사를 불렀다.

“북문 지휘는 네가 맡아라! 나는 왕성으로 돌아가서 습격자를 막아 보겠다!”

“예, 예?”

갑작스러운 지휘권 이양에 당황한 병사. 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 사실을 이해한 병사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개리슨은 다른 병사들에게 외쳤다.

“절반은 나를 따라와라! 왕성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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