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데드라인 (2)
(195/203)
195화 데드라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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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데드라인 (2)
2022.04.14.
스테치의 손끝이 아치발의 몸에 박히는 순간, 그의 피부가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치발이 크게 심호흡을 하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그의 몸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뭐……?!”
스테치가 당황해하는 사이, 아치발은 그의 손을 떼어 내고 아스트랄 차원을 경유함으로써 프레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더니 스테치가 다음 수단을 강구해 내기 직전, 프레야의 뒤에서 나타난 아치발은 그대로 그녀의 날갯죽지에 자신의 손을 쑤셔 넣었다.
“《코어 블라스트》!”
“크악!”
푸화아앗-!
아치발의 손이 박혀 들어간 상처 부위에서, 검붉은 피 대신 푸른 마력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스테치는 스피라투스의 포탄과 《써멀 비트》의 연계 공격으로 아치발을 잠시 물러서게 한 뒤, 프레야를 부축하며 거리를 벌렸다.
“괜찮아?”
“다친 곳은 치료하면 돼! 하지만 방금 그 기술은……!”
그녀의 말대로 상처는 금방 회복되었다. 한숨 돌린 스테치는 고개를 돌려 아치발을 노려보았다. 《코어 블라스트》는 상대의 약점을 강제로 노출시키는 기술. 하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아치발은 그 과정을 캔슬 시키는 것도 모자라 즉석에서 흉내 내기까지 했다.
“《코어 블라스트》……. 상대의 방어능력을 무력화하고, 약점을 강제로 외부에 노출시키는 기술. 먹히기만 한다면 훌륭한 마법이지. 하지만 나에게 써먹기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치발은 그렇게 말하더니, 스테치를 노려보았다.
“결국 네놈이 남에게 빌려온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정도라는 뜻이지.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그의 눈에는 스테치가 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치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뿌리 깊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X발……. 할 말이라면 이쪽이 더 많구먼, 신이라는 새끼가 대체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울 일투성이야?!”
스테치가 악에 받쳐 소리치자, 아치발이 말했다.
“내 아이들이, 고작 너희처럼 하찮은 놈들을…… 목숨까지 깎아 가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속이 끓는단 말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흡사 벌레를 상대로 말하는 듯한 혐오감이 묻어 나왔다.
독.
저놈은, 아니, 이것들은 독이다.
안 그래도 유한했던 자식들의 목숨을 앗아 간 혐오스러운 독이자 벌레가, 이제는 자식들의 힘을 몸에 두르고 자신을 죽이려 든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기분이 어떻지?”
아치발이 스테치에게 물었다.
“잠시나마 신으로서 무한의 힘을 두르게 된 기분이 어떻지? 즐겁나? 흥분되나? 내 눈에는 네놈이…….”
그 순간, 그의 전신을 감싸며 폭발적인 마력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스테치가 그 기세에 버티는 동안, 지척까지 다가온 아치발이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내 자식들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날뛰는 괴물로밖에 안 보여.”
빠칵!
스테치의 몸이 뒤로 쏠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갔다. 뒤에서 프레야가 타이밍 좋게 그를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보다도 훨씬 더 멀리 튕겨 나갔을 것이다.
“스테치, 조심해라!”
《액티브 스킬 : 썬더 볼트. 주변으로 벼락을 풀어놓는 번개 덩어리를 생성합니다.》
프레야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이번에는 아치발이 마법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파랗던 하늘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뇌운으로 가득 차더니, 곳곳으로 보랏빛 벼락을 흩뿌렸다. 위협적으로 두세 번 번뜩이던 구름은, 이내 스테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수의 벼락을 쏟아 냈다.
하늘 전체가 일순 섬광에 물들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이익!”
스테치는 자세를 가다듬고선 벼락을 피해 먹구름 아래를 총탄처럼 빠르게 비행했다. 방어 아티팩트, 환상 아티팩트, 거기에 가렛의 타른카페까지 써 가며 빗발치는 벼락을 모조리 회피한 그는, 유유히 공중에 뜬 채로 자신의 모습을 관망하는 아치발을 찾아냈다.
스테치는 수십, 수백 번의 《디스펠》을 걸어 벼락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시킨 다음, 날아가던 방향을 꺾어 아치발과 격돌했다. 아치발의 맨손과 스테치의 할로우 블레이드가 맞닿은 접점에서 불똥과 스파크가 튀겼고,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힘겨루기를 벌였다.
쾅!
“지금은 스스로 떳떳한 척하고 있지만, 너는 어떻지?!”
스테치의 복부에 아치발의 무릎이 꽂혔다. 허리를 기역 자로 숙인 스테치의 등짝을, 아치발은 팔꿈치로 찍어 강제로 바닥에 눕혔다. 그가 흡수했던 신체루스의 기억 속에서, 스테치 아텔리어란 그저 자기 욕심을 채우기 급급한 일개 복수귀에 지나지 않았다.
“너 또한 복수를 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냔 말이다! 그런 주제에 너는 선이고, 나는 악이라고? 웃기는 소리!”
아치발은 스테치를 두들겨 패며 말했다. 그러자, 크로스 암 가드로 방어를 굳히고 있던 스테치는 결국 쌓여 있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괴물이라고? 내가?”
스테치가 외쳤다. 메멘토 모템에서 나온 프레야가 반격을 날려 아치발의 공격을 끊어 놓은 틈을 타, 이번엔 스테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
버티고 있던 아치발의 몸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뒤로 밀려났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파워 밸런스가 점차 스테치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스테치를 밀어낸 아치발은, 육중한 워 해머를 소환하여 휘둘렀다.
콰칵!
그러나 날아오는 해머가 두들긴 것은, 다름 아닌 레오니다스였다.
“개소리 작작 해!”
투쾅!
방패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전방을 휩쓸었지만, 아치발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아므리타의 힘으로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포착한 스테치는, 폰두스를 두른 주먹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다른 차원에 숨어 있던 아치발이 이에 얻어맞고 본래 차원으로 튕겨져 나왔다.
“으극!”
“뚫린 주둥이로 주객전도 같은 소리 좀 지껄이지 마!”
퍽! 퍽!
말 하나하나에 강세를 집어넣으며, 스테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상대가 날아가면 추격해서 다시 두들겨 팼다. 도망치면 잡아당겨서 다시 팼다.
“모든 것이 다 인과응보야! 너도 그렇고, 제라드도 그렇고! 하나같이 이기적인 새끼라서 그걸 모르는가 본데!”
스테치의 발길질에 날아간 아치발은 한참을 날아가더니, 카델트 대사막의 어느 모래밭에 떨어졌다. 충격으로 솟아오른 모래가 다시 내려앉고 잠잠해질 무렵, 쓰러져 있던 그의 복부 위로 스테치의 발이 꽂혔다.
뿌드득-!
“크학!”
폐부에 남아 있던 공기가 입 밖에 강제로 튀어나왔다.
스테치는 그런 아치발의 멱살을 들어 올린 뒤, 반지 밖에 실체화한 프레야와 동시에 주먹으로 그의 턱에 더블 어퍼컷을 날렸다. 일반인이라면 턱은 물론이고 골통이 박살 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너는 가족을 원했고! 불멸성을 잃어버림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다!”
스테치가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아치발에게 윽박질렀다. 안 그래도 뜨거워진 머리에 사막의 열기까지 더해졌다.
“네 자식들은 자기 목숨을 대가로 치러서! 자신들만의 새 가족을 만들었어!”
터벅- 터벅-.
스테치는 푹푹 박히는 모래를 걸어가, 결국 쓰러져 있는 아치발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치발의 몸 위에 마운트 포지션으로 걸터앉은 뒤, 안면으로 주먹질을 해 댔다.
“공통점이 좀 보이냐?! 행동엔! 결과가 따라온다! 그 논리는 지금 이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돼! 누군가에게 좆대로 굴었다면! 남이 자신에게도 좆같이 굴 거란 생각을 하란 말이야!”
퍽!
스테치의 손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겉으로는 티가 안 나던 아치발의 얼굴에, 자그마한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네놈이 말했지? 생명을 뿌렸으니 거둬 갈 뿐이라고! 말 한번 잘했다 이 새끼야! 너나 제라드가 개 같은 짓거리를 하니까, 나라는 업보가 되돌아온 거라고!”
퓻!
아치발의 안면에 몇 번째인지도 모를 주먹을 꽂아 넣자, 스테치의 뺨으로 작은 핏방울 하나가 튀었다. 어쩌면 이것이 아치발이 살면서 처음으로 흘린 피가 아닐까. 그러나 스테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이 손에 피를 묻혀 온 것도! 불살주의는 개나 줘 버린 듯한 행보를 이어 온 이유도! 전부 다 너네들이 한 행동의 결과라 이 말이야!”
콰과광!
충격으로 날아간 아치발은 한참 동안 모래사장을 굴러갔다. 스테치는 지면에 침을 탁 뱉은 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치발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거 알아? 난 아주 잠깐이지만 널 동정했어.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소리지. 억 단위가 넘어가도록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희대의 미치광이를, 가족 때문에 그랬다는 백 스토리 때문에 일순이나마 동정했다고. 그런데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이 뭔 줄 알아?”
스테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아치발을 뻥 걷어차고선 외쳤다.
“너는 그냥 애새끼라는 거다! 당연히 되돌아올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되도 않는 땡깡을 부리는 애새끼!”
아치발은 일반인이 들 수 없는 사이즈의 대검을 소환하더니, 그대로 스테치의 머리 위로 내리찍었다. 그러나 날이 두개골을 쪼개기 직전, 스테치는 열십자로 교차시킨 골드메라와 할로우 블레이드로 막아 낸 다음 대검을 튕겨 냈다.
“어딜!”
두 개의 무자비한 검날이, 자세가 무너진 아치발의 양쪽 어깨를 쑤시고 들어갔다.
푸욱!
아주 약간이지만, 날의 끝부분이 아치발의 살가죽을 파고들며 희미한 상처를 남겨 놓았다. 스테치는 그대로 상대를 걷어차 검을 뽑아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자식들이 그걸 원했냐?! 자기네 피조물들을 제물로 삼아 가면서까지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아니지! 누구도 그걸 원하지 않았지! 너 하나만 빼고!”
“큭!”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 프레야는 아티팩트 골드메라와 녹터널. 세 개의 검이 아치발의 대검 위를 후드렸다. 낑낑대며 버티던 아치발의 두 다리가 뜨거운 모래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미움받을 짓을 했으니까 미움받는 거다! 그 당연한 이야기를 왜 이해 못 하는 건데!”
피를 토해 낸 아치발은 계속되는 스테치의 일갈에 대꾸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가올 운명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였어야만 했다는 거냐? 죽음을 거부하고 부활한 네놈과,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리려고 애쓴 내 차이가 도대체 뭐길래?”
빡!
스테치는 아치발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더니, 이마를 확 들이받아 버렸다.
“X발, 그럼 너랑 내가 같냐?”
부당하게 삶을 강탈당하는 것과 정해진 순리대로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의 의미가 결코 같을 리가 없었다.
콰당탕!
스테치는 바닥에 쓰러진 아치발을 내려다보며 윽박질렀다.
“일어서!”